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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5)화 (175/181)
  • 175화 

    이제 와 떠올려 보면, 지난 생에서 그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구태여 숨기려 했다. 내게 정보를 전달할 때 ‘그대로 전해드리기엔 위험한 내용이 있다’며 일부 내용을 제외한 채 필사본을 만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주 저택을 비우고 변방을 오가던 진짜 이유를 숨기기 위해.

    그 진짜 이유라는 게 바로 몬스터 조종을 비롯한 금술 연구였다. 애초부터 엄마를 암살하기 위해 몬스터를 이용한 것도 실험이었던 것이다.

    마나 억제용 구속구 같은, 일상생활에선 필요도 없는 고가품을 소유한 것부터 수상쩍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뢰드그뢰드가 어색하게 웃으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행히도 이 대화를 들은 사람은 없었다.

    내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바움쿠헨의 황제께서 신심이 깊다 하셨으니, 그 증명을 플뢰데 후작님의 압수 수색으로 해주시면 어떨까 싶군요.”

    그러자 뢰드그뢰드가 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 반응으로 나는 내 예상이 들어맞았음을 확신했다.

    그가 아빠에게 가진 감정은 단순 열등감뿐 아니라 방해물에 대해 응당 가질 만한 적대감이기도 했다. 아빠가 변방에서 영향권을 넓힐수록, 그가 변방에서 행해야 하는 불법적인 연구가 힘들어질 테니까.

    이번 생에선 아빠가 변방에 없으니만큼 저번보다 훨씬 규모가 큰 실험을 하고 있었을 터였다. 지금도 실험에 대한 기록과 물품 등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게 뻔했다.

    그는 더 이상 부정할 여유도 잃고 후다닥 출구로 향했다.

    곧바로 변방으로 돌아가 남은 증거를 인멸하려는 심산이겠지.

    나는 애써 웃음을 삼키고는 그의 뒤통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 그리고 플뢰데 후작님, 부디 저와 아드님을 비교하진 말아주세요. 저는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잖아요!”

    내 말소리가 잘 들렸으려나?

    나는 그가 나간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당장 증거를 눈앞에 들이밀지 않아도, 내가 성녀라는 사실이 전 대륙에 퍼진다면 그를 매장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드디어 앓던 이를 뽑은 기분이로군.

    한결 개운해진 내가 흐뭇하게 주변을 살폈다. 발코니에 있던 황제가 막 커튼을 걷고 나타났다.

    “얘기 끝나셨어요?”

    키슈도 어느덧 작아진 브라우니를 안고 돌아왔다.

    “네, 아펠만 오면 될 것 같은데…….”

    대답하다 말고 그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저를 찾는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곧 아펠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 눈을 맞춰 웃었다.

    “머랭을 데려다 놓고 왔어. 이제 시작할 거지?”

    “응.”

    짧게 대답한 내가 아펠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내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있던 검은 백합을 그의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이번엔 내가 널 지켜줄게.

    나는 그 말을 삼키고 대신 미소 지었다. 언젠가 마탑에서 나를 향해 손 내밀어 주던 아펠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그의 팔을 이끌어 단상에 올랐다.

    “신의 비호 아래 축복이 있기를.”

    나의 그 말로 팔미에 황비의 장례가 시작됐다.

    【 다음 이야기 】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뢰드그뢰드는 침몰했다.

    내가 먼저 찌르지도 않았는데 감사가 들어갔다고 했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고, 누군가 그의 수상쩍음을 감지하고 먼저 신고한 모양이었다.

    변방에 있던 연구실은 마나 탐지를 전문으로 하는 수색대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발각됐으며, 금술을 연구한 뢰드그뢰드는 대륙 법에 의해 바움쿠헨의 황성 지하에 갇혔다고 한다.

    이후 뢰드그뢰드의 위협에서 벗어난 아빠는 다시 변방으로 나갔고 나 역시 마탑을 나와 쉬제트 백작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게는 남동생이 생겼다.

    ‘열여섯 살이나 차이 나는 남동생이라니, 부모의 금실이 너무 좋아도 힘들구만.’

    나는 웃음을 참으며 동생이 서툴게 포크질 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체리를 먹고 싶은지 동생의 포크 밑에서 동그란 체리 하나가 이리 데굴 저리 데굴 하고 있었다.

    동생은 엄마를 닮은 적갈색 머리카락과 저 체리만큼 빨간 눈을 갖고 있었다. 가을에 임신 사실을 알았다는 이유로 태명이 ‘단풍’이었던 동생은, 결국 이름도 메이플이 되었다.

    메이플 바펠 세자르 쉬제트.

    몸을 뒤집고, 기어 다니고, 걸음마를 하던 모습까지 다 봤더니 꼭 내 아들 같단 말이야.

    “먹고 싶어?”

    “응… 해주 꺼야?”

    네 살배기 메이플이 울상이 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누나, 소리만 겨우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참 세월 빠르다.

    “자, 체리 들어간다아~”

    공손하게 내민 작은 두 손을 살짝 밀어내고, 끝이 뭉툭한 아동용 포크 대신 내 것으로 체리를 찍었다. 쉬우웅, 비행기 소리를 내며 메이플의 입에 체리를 넣어주자 금세 아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좋아?”

    “웅! 누나가 주니까 더 조은 거 가타!”

    메이플이 함박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동생,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여워?”

    “누나!”

    이런 식으로 갈레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될 줄이야!

    나는 메이플의 머리 세팅이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만 꼭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나도 포크를 들었다.

    네가 체리로 만족해 준다니 이 누나는 기쁘단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흐뭇하게 웃고, 나는 체리가 장식돼 있던 케이크를 포크로 눌렀다. 토독 토독 하는 특유의 감촉과 함께 크레이프 케이크가 깔끔히 잘려 나왔다.

    층층이 쌓인 크레이프 사이로 살짝 삐져나온 우유 생크림.

    혹여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씹을 때마다 고소하고도 깔끔한 우유 향이 느껴졌다.

    “으으음!”

    역시 에이미의 손맛은 최고라니까!

    벅찬 감동에 몸부림이 쳐질 정도였다.

    하지만 참아야지…….

    스스로에게 되뇐 내가 군침을 삼키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눈앞에 있는 것 외에도 케이크가 나올 거라고 했고 먼저 먹어도 괜찮다는 말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가족이 다 모이기도 전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긴 꺼려졌다.

    이건 내 스무 번째 생일을 기념한 자리였으니까.

    “아무래도 내가 너무 빨리 왔나 봐.”

    “다들 금방 오실 겁니다.”

    어색한 기분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마르크가 대꾸해 줬다.

    “그렇겠죠?”

    가볍게 반응하고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에이미가 요리를 차곡차곡 가져와 곧 넓은 테이블이 접시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것도 소규모 파티에 어울릴 양이었다. 대규모라면 테이블 세 개가 기본이니까.

    물론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진행하자 한 것은 내 의사였다. 공표했다간 성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귀족과 일반 백성, 대륙 각지의 성직자들까지 몰려와서 큰일이 되어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내게 선물 공세를 했지만.

    종류도 다양했다. 각종 보석과 조각상 같은 사치품부터 시작해, 독자적으로 입수했다는 성궤나 역대 성녀의 친필 사인이라는, 진위 여부도 불투명한 물건들까지.

    그러나 내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보낸 건 오늘도 딱 한 명, 마론 슈를 보낸 몽블랑뿐이었다.

    몽블랑 후작이 아는 디저트는 마론 슈밖에 없나, 하는 의문은 접어두자.

    아무튼 자리가 커지는 게 부담스러웠던 나는 제대로 초대장조차 돌리지 않았다. 보통의 귀족 아가씨처럼 사교 활동에 집중한 것도 아니고 학교도 안 갔으니 사사로이 올 만한 사람이 적은 것도 당연했다.

    “…….”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메이플을 쳐다보았다.

    메이플은 조그마한 입으로 아직도 체리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오래도 먹는구나 싶어 가만히 쳐다보자, 메이플이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이 샤탕 마 없셔.”

    어쩐지 체리를 너무 먹고 싶어 하더라니. 사탕인 줄 알았구나.

    * * *

    “저기 오시네요.”

    체리를 처음 먹어본 메이플이 겨우 다 삼켰을 때쯤, 마르크가 짧게 알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곧 이 자리에 방문하겠다고 알려온 유일한 외부 일행이 홀에 들어왔다.

    “벌써 스물이라니, 성인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나이가 되셨네요! 그죠?!”

    “하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오르와 키슈의 인사를 받았다. 뒤에 멀대같이 서 있던 파타슈도 그들에게 얹혀 가듯 고개를 까딱했다.

    “아들!”

    “…생일 축하드려요.”

    키슈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파타슈가 입을 뗐다.

    “아휴, 죄송해요. 이 녀석이 사춘기가 왔는지…….”

    키슈가 호들갑스럽게 내게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파타슈와 종종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그의 사정도 편지에서 봐 알고 있었다.

    그동안 장난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우연히 키슈의 책상 위에서 『크레페 며느리 삼기 대작전♡』이라는 제목의 공책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날 대하기가 점점 어색해지려 한댔나.

    “크흠, 이제 마탑에도 한 번 들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오르가 지나가는 말인 척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태자 책봉식과 황비의 장례가 치러진 그날부터 나를 향한 그의 태도는 조금 바뀌었다. 처음엔 단순히 마법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더니 이제는 눈빛에 경외심이 묻어 나온다고나 할까.

    어쩐지 정말 처음 하는 것이 맞냐면서 연신 확인 질문을 하더니 말이지.

    물론 직접 제식을 주도하기는 처음이었지만 사실 비슷한 것을 옆에서 본 적은 있었다. 피오르가 변방에서, 아빠와 갈레트를 위령해 준 적이 있었으니까.

    “뭐야, 같이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갈레트가 카눌레와 함께 입장했다.

    그는 내 방 앞에서 기다리느라 늦었다면서 야속하다는 투로 말했다.

    “갈레트 님, 성녀님께 말을 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오르가 눈썹을 씰룩이곤 갈레트를 나무랐지만 그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성녀이기 이전에 제 귀여운 동생인데요.”

    “…….”

    피오르가 입을 다물었다.

    갈레트의 홈그라운드니 이 정도지, 마탑이었다면 ‘갈레트, 성녀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로 시작해 성녀를 대하는 태도와 인식에 대해 한바탕 설교가 시작됐을 테다.

    갈레트도 그 사실을 아는 듯 한 치도 물러섬 없는 표정이었다.

    그것도 잠시였지만.

    “마탑으로 돌아가면 과제를 추가해 드리죠.”

    “윽.”

    차라리 설교가 나았을지도, 하고 생각하려나?

    내가 웃음을 참는 사이 카눌레가 고개를 젓고 성큼성큼 들어와 메이플 옆자리에 앉았다. 나란히 앉은 두 명을 보니, 눈 색 때문인지 꼭 부자지간처럼 보였다.

    실제로 메이플도 카눌레를 꽤나 잘 따랐고.

    의자에 앉아 허공에 붕 뜬 다리를 휘젓던 메이플이, 카눌레가 옆에 앉자마자 귀엣말로 속삭였다.

    “누나 칭구들 엄청 많다!”

    “내가 더 많아.”

    카눌레의 무뚝뚝한 대꾸에 메이플이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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