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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4)화 (174/181)
  • 174화 

    성녀라 대하기 어렵나? 아니면 뢰드그뢰드의 의심에도 내 편에 서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거나.

    아무튼 나를 향하는 시선에 처음보다 경외심이 담겨 있다는 건 알겠다.

    시간이 지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귀족들은 막 책봉식을 마치고 황태자가 된 아펠에게 줄지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주위를 맴도는 머랭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본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동안 나는 브라우니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펠의 주변에서 벗어나지 않는 머랭과 달리 브라우니는 놀이공원 마스코트처럼 설렁설렁 홀을 누비고 있었다. 평범한 말처럼 걸어 다니던 녀석이 이내 단상에 올랐다.

    브라우니는 검고 흰 백합을 포함한 식물들로 장식된 관을 한 바퀴 돌고 황제 옆에서 멈췄다. 혹시 실례되는 일이라도 저지를까 싶어 마음을 졸이던 그때, 황제가 피식 웃으며 브라우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모습은 인형 같더니, 큰 모습은 멋있군요.”

    “푸릉!”

    브라우니가 칭찬을 알아들은 것처럼 머리를 치켜들고 기분 좋은 듯 콧소리를 냈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 브라우니를 진정시켰다.

    나를 바라보던 황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성녀님께 발언을 떠맡긴 것 같아 면목 없습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바라던 일인걸요.”

    “…….”

    황제가 고개를 돌려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아펠을 바라보았다. 다수를 상대로 아펠의 출생에 대해 말할 때 나를 앞장세운 것이 못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황제가 더 마음이 쓰였다. 아들에게 출생의 비밀에 대해 처음 이야기해야 했던 것도 그였다. 사랑하던 이를 떠나보내는 자리라서인지, 그는 내 기억에서보다도 초췌해 보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까요.”

    황제가 발코니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브라우니의 갈기를 쓰다듬어 준 후 황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손길이 끊어지자 브라우니도 미련 없이 이 공간을 마저 둘러보러 갔다.

    사교장이 넓은 만큼 발코니도 여러 개였다. 황제는 그중에서도 단상에서 제일 가까이 있던 커튼을 걷고 나갔다. 그러고는 날 돌아보지도 않고 난간에 손을 올렸다.

    햇빛 아래에 서자 황제의 눈가가 부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말을 재촉하지 않고 커튼 틈으로 보이는 관구를 바라보았다.

    팔미에 황비에게는 본래 연인이 있었으나 가족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얼마 후 상대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고 그녀는 마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밀리암 슈트루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때 아펠은 이미 그녀의 배 속에 있었다.

    황제는 슬하에 자식 하나 없이 황후를 잃고 후계자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정략혼 한 것이었다. 금세 아들을 낳은 팔미에에게 친절히 대해준 것은 당연했고 그들은 곧 서로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황비 역시 아펠이 황제의 친아들인 줄 알았다. 그녀는 그 당시를 가장 행복한 시절로 추억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자란 아펠에게서 과거 연인의 얼굴을 발견하기 전까지.

    팔미에 황비가 병적으로 마법을 싫어하고 황제를 멀리하게 된 게 그때였다. 그녀는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했고 아펠에게 불똥이 튈까 그에 대한 이야기를 황제에게 먼저 꺼내지도 못했다. 공허감을 잊기 위해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으며 그로 인한 병도 얻었다.

    이후 그녀는 점차 히스테릭하게 변해가고,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쇠약해져 숨을 거두게 된다.

    그것이 팔미에 황비의 지난 삶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을 되짚어 보던 그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몇 년 전 성녀님이 별궁에 다녀간 다음 날, 황비가 저를 붙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난간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황비에게 제 마음을 먼저 말할 것을 그랬지요. 그랬다면 조금 더 일찍, 더 오래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황제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한 번도 아펠이 태자 위를 차지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그것도 황비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젠가 황비가 자신에게 사실을 고백해 주길 바랐다. 그녀가 마음을 추스르면, 털어놓을 준비가 되면.

    “후우.”

    황제가 눈물을 보이는 대신 깊게 심호흡했다.

    그의 떨리는 숨소리가 조금 진정된 후에 내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올바른지 알았다면 과거를 돌아볼 필요는 없겠지요.”

    내용은 젤라토에게 전한 말과 비슷했다.

    가만히 날 바라보던 황제가 물었다.

    “…그건 신의 말씀입니까?”

    “아뇨.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말이에요.”

    내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젤라토는 중립 귀족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려고 무던히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몽블랑의 범죄가 사실일까, 갈레트나 내가 바라는 게 무얼까, 그렇게 사사로운 정에 휩쓸리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던 인물.

    그러나 그는 끝내 숨을 거두었고, 중독으로 죽어가면서 바니유 공작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이제 무엇이 올바른지 알았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자고.

    ‘얼마나 강인해야 자신의 죽음을 과거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젤라토의 소예언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본받고 싶다는 생각도.

    또한 그건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직접 아펠의 치부를 들추는 게 어찌 맘 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그 첫 단추까지 다 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미래를 바꾸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황비님은 행복하셨을 겁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족들 곁에서.”

    “…….”

    그때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황제의 시선을 받아내며, 나는 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문득 황제의 시선이 내 손에 닿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뒤늦게 소매를 내려 손목에 찬 펜리르의 심장을 가렸다. 그러나 황제는 그에 대한 일언반구 없이 피식 웃었다.

    내 말이 위안이 됐을까, 하며 어색하게 손을 내린 순간 커튼 밖에서 키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레페 님, 어디 계세요!”

    그 말에 나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가 내 곤란함을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나가보셔도 됩니다.”

    옅은 웃음기가 남아 있던 그의 얼굴은 아펠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 * *

    “어휴, 아직 끝이 아니잖아요. 다시 준비해야죠.”

    홀로 들어서자 키슈가 금세 날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녀는 책봉식을 하며 풀었던 벨벳을 다시 내 어깨와 허리에 두르고는, 바람에 흐트러졌던 내 머리카락도 정리해 주었다.

    “얘기는 끝났어요?”

    “네에, 뭐.”

    키슈가 대충 얼버무리며 웃었다. 내가 봐도 그들 사이의 대화는 어찌어찌 마무리된 모양으로,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차는 피오르 옆에서 몽블랑이 엉망이 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무슨 얘기가 오간 건지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에 피식 웃고 있는데 누군가 내 눈앞을 가로막았다.

    “아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바움쿠헨에서 온 뢰드그뢰드 메드 플뢰데 후작입니다. 이제야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

    뢰드그뢰드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인사를 끝냈다.

    그러나 그의 용건은 인사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간단히 답례하고 그를 비켜 가려 했지만 그는 옆걸음을 쳐서 다시금 내 앞을 막아섰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

    “크레페 님……?”

    내가 입을 다물고 뢰드그뢰드를 올려다보자 키슈가 곤란해하는 기색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나와 뢰드그뢰드 사이의 악연에 대해 모르고 있으니, 아마 이후의 의식이 늦어질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녀의 걱정을 불식시키려 가볍게 대답했다.

    “아아, 금방 마칠게요. 그동안 브라우니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에, 그럼…….”

    확실히 장례 의식을 치르는 동안 홀 안을 휘젓고 다닐 브라우니를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키슈도 그렇게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멀어지려는 그녀를 붙잡고 작게 덧붙였다.

    “그리고 아빠한테 걱정 말라고 전해주세요.”

    키슈가 고개를 갸웃하고 알았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잖아도 키슈의 뒤에서 아빠가 초조해하는 모습이 보이던 차였다. 뢰드그뢰드가 한 일을 알고 있으니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아무래도 검이 아닌 언어로 대적하기에는 아빠가 불리한 게 사실이었다.

    뢰드그뢰드는 처세술이나 대화법에 있어선 워낙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었기에 나는 가능한 한 그와 아빠가 마주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키슈가 아빠에게 말을 전하는 모습을 확인한 후, 뢰드그뢰드를 향해 바로 섰다.

    “후작님께서는 성녀라는 존재에 아직 의구심이 남은 모양이더군요. 린처 님께 제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하셨나요?”

    “…부족한 녀석이니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뿐입니다. 제가 원체 직접 본 것만 믿는 성정이라 말이지요.”

    축제 날 겪은 일을 입 밖에 내자 그의 기세가 조금 꺾였다. 하지만 아마 그에게 성녀의 진위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테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보다, 아펠 슈트루델 태자 전하에 대해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

    내가 가진 정보나 성녀라는 존재가 그의 야심에 미치는 영향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날 구실로 삼아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듯한 물음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튼 여러모로 두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인생 서고에서 소예언서를 몇 권이나 읽은 내게, 그는 더 이상 위협 요소가 아니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원래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상황에서는.

    “후작님께서는 바움쿠헨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하신 모양이더군요.”

    “그야 물론…….”

    “외교 업무 외에, 지시받지도 않은 몬스터 토벌을 한다며 저택을 비우실 정도니까요.”

    나는 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뢰드그뢰드가 미심쩍은 기색을 느낀 듯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정답이었다.

    “제 아버님이 최전방에서 물러나신 후에도 플뢰데 후작님께서 변방의 통치에 힘써주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유를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그게 제가 할 일이니까요. 비록 최전방을 지킬 임무는 없으나 제 영지가 변방 인근이니, 수시로 토벌을 나가는 것도 제 조국을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뢰드그뢰드는 안 좋은 생각을 애써 외면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그 미소는 뱀 같은 인상 때문에 더욱 야비하게만 보였다. 그리고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 세계관에서, 그는 인상 값을 충분히 하는 인물이었다.

    내가 이때다, 하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재차 질문했다.

    “금술을 연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요?”

    “…예?”

    그는 못 알아들었다는 듯 얼떨떨한 투로 반문했지만 얼굴은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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