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3)화 (173/181)

173화 

피오르에게도 이번 플럼의 등장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펠은 아직 성인도 아니었고 태자로 책봉되기도 전이었다. 나와 같은 나이인 그가 공식 석상에 나타난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고 말이다.

“하… 이게 대체…….”

역시나 피오르가 혼란스러운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부황께서 제 신심을 위해 저를 마탑에 보내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 피오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플럼에게는 호랑이 선생님이었지만 아펠에게까지 그렇게 대하기엔 신분의 벽이 높았다. 피오르가 빠르게 정신을 추스르고는 서툰 손길로 키슈를 위로했다.

아직도 안 믿긴다는 듯 아펠을 힐끔거리는 눈빛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아펠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봉식의 주인공인 그가 입장했다는 건 이 자리에 참석하겠다고 알린 이들이 모두 모였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책봉식에 입회한 두 마법사도, 아펠이 날 편히 부른 것을 두고 수군거리는 귀족들도 그리 쉽게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아빠는… 수군거리는 게 아니라 입을 쩍 벌리고 있군.

괜히 더 민망해지는 기분에 무릎을 굽히고 바닥에 있던 머랭을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뽀송한 털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내 마음도 조금 진정이 됐다.

그동안 머랭은 키슈의 품에 안긴 브라우니에게 호기심이 생긴 듯 코를 킁킁거리며 녀석의 냄새를 맡으려 했다. 그건 브라우니도 마찬가지였는데, 키슈의 눈물로 범벅이 된 손수건이 연신 녀석의 정수리를 간질였기 때문에 제대로 집중하진 못했다.

“그만!”

내 옆에 선 아펠이 웅성거리는 귀족들을 향해 큰 소리를 냈다.

내가 올려다보자 아펠은 내가 놀라기라도 했을까 어깨를 잠시 보듬어 주고는 곧 피오르를 향해 바르게 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제가 황태자로서 어머니를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군요. 잠시 본분을 잊은 것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피오르가 예를 갖추며 대답하자 키슈도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이 조용해진 후, 때가 됐음을 깨달은 내가 머랭을 내려놓았다. 녀석이 아펠의 발치에 앉았다.

나는 아펠과 눈인사를 나누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황제가 나를 맞아 일어섰다.

그래, 책봉식이 먼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많은 귀족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바니유 공작과 젤라토, 아빠와 몽블랑, 뢰드그뢰드, 아펠까지.

“축성하겠습니다.”

짧은 선언과 동시에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뒤이어 피오르가 단상에 올라 내 어깨에 묶인 벨벳을 풀어주었다.

보석은 없지만 화려한 드레스가 온전히 드러나며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를 기다렸다가 귀걸이에 손을 가져갔다.

나를 중심으로 마법진이 떠올랐다. 홀을 다 채울 만한 크기에, 사람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다.

“역시 성녀로군요.”

“어린 나이에 신의 힘을 이리 능숙히 사용하시다니…….”

“무리하지는 마라.”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히도록 피오르가 작게 속삭이고는 내 옆에 서서 엄숙히 호명했다.

“아펠 슈트루델.”

단상 밑에 있던 아펠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를 따라다니던 머랭은 내 마법진에 발을 들여놓기가 꺼려지는 듯 경계 바깥에서 멈췄기에, 아펠은 홀로 걸어 내 앞에 당도한 후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슈트루델에 광영을.”

그 말이 끝나자 절차에 따라 시종이 망토와 약식 왕관을 가지고 왔다. 피오르가 아펠의 어깨에 망토를 달고 뒤로 물러났다.

아펠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제례용 검을 풀어 내게 정중히 내밀었다. 나는 그것으로 아펠의 어깨와 머리 위를 가리킨 후 왕관이 있던 쟁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 대신 왕관을 두 손으로 들었다.

이제 이것을 아펠의 머리에 올리면 책봉식은 끝이었다.

한마디 말도 필요 없는 단순한 마무리였지만, 나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와 곧바로 눈을 맞췄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왕관을 씌우며 입을 열었다.

“혈통보다 중요한 것은 신의 축복이요, 제국의 광영이라. 그는 자신을 마음으로 낳은 아비 밀리람 슈트루델의 적자로서 슈트루델의 이름을 빛낼 것입니다.”

“…예?”

제일 가까이에 있던 피오르가 얼빠진 얼굴로 반문했다. 귀족들이 뒤늦게 내 말뜻을 이해하곤 당혹스러운 듯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크레페, 지금 그게 무슨……!”

아빠가 존댓말도 잊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나마 말을 맺기 전에 얼마나 위험한 질문인지 자각하고 입술을 다물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말을 들은 황제와 아펠의 무반응이.

“신의 축복을 받은 이로서 제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다.”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꿋꿋이 의례를 마친 아펠이 똑바로 섰다.

그는 손수 망토를 벗어내고는 당당히 귀족들을 향해 돌아섰다. 저들끼리 웅성거리던 자들이 아펠의 존재감에 압도된 듯 입을 다물었다.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바니유 공작이 그들을 대표해 조심스레 질문했다.

“혈통보다 중요한 것은 신의 축복이요, 제국의 광영이라. 성녀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대답은 황제나 아펠이 아닌 귀족들 사이에서 나왔다. 바니유 공작이 목소리를 향해 몸을 돌리자, 그 주변에 있던 이들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가운데에 있던 자는 몽블랑이었다.

“후작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예.”

당황스러울 만큼 깔끔한 인정에 다시금 파문이 일었다. 황제가 손을 뻗어 주의를 모았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혹감이 컸으리라 생각하네. 그러나 짐의 결정도, 신의 축복도 거두어질 만한 것이 아니오.”

“신의 축복이라 하셨습니까?”

뢰드그뢰드가 기다렸다는 듯 꼬투리를 잡으며 자기주장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가 말을 잇는 동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외교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길게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내가 진짜 성녀임을 증명할 수 없으니 아펠의 정통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나는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대신 키슈에게 눈짓을 했다. 급변하는 상황에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던 키슈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팔에 힘을 풀었다.

“쀼!”

자유를 허락받은 브라우니가 펄쩍 뛰어내리더니 금세 공중에 떠올랐다. 신의 선택을 어찌 증명할 수 있냐며 종교 철학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던 뢰드그뢰드가 순간 놀라 말을 멈췄다.

“브라우니?”

“삐잇.”

브라우니는 내가 제 이름을 부르자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이 내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자 순식간에 몸집이 커져 보통 말만 해졌다.

“세상에!”

“역시 신수라…….”

“허억!”

그러나 귀족들이 놀랄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펠을 따라다니던 작은 강아지가 흰 늑대, 펜리르로 변했기 때문이다.

브라우니가 망설임 없이 마법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본 머랭도 용기를 낸 것이었다.

아펠이 가만히 손을 내밀자 머랭이 익숙하게 그의 발치를 맴돌았다. 그러나 강아지 때와 달리 녀석의 꼬리는 목도리만큼 두툼했고 몸집도 거대했기에, 단순히 귀엽게만 보였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아펠의 카리스마 발산에 한몫 거드는 늑대 같았다.

“페가수스와 펜리르. 두 신수가 성녀님과 태자 전하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이상의 증명이 필요할까요?”

피오르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뢰드그뢰드가 끈질기게 반론하러 나섰다. 그러자 갑자기 내 쪽을 향해 불길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 불길은 마법진을 통과하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주변은 몽블랑이 냉기로 막아주었다.

당연히 이 불길을 일으킨 사람은 키슈였다.

“마법 서약을 한 키슈 로렌입니다. 신의 이름을 걸고 제 언행에 거짓이 없음을 맹세합니다.”

“키슈 로렌!”

마법 서약을 한 키슈는 그 자체로 유명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값이 아니더라도 이미 귀족들의 눈빛은 바뀌어 있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내 마법 실력부터 시작해 신수의 출현, 게다가 마나가 비켜 가는 신비로운 현상까지.

그에 쐐기를 박듯 아펠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피식 웃으며 내 마나를 거두었다. 그러나 마법진은 금색에서 회백색으로 바뀌었을 뿐 크기는 그대로, 아니, 훨씬 거대해져 있었다.

마법진의 변화에 불안한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며 틀린 그림 찾기를 하던 귀족들은 금세 그 마법진이 시작된 곳이 아펠의 손끝임을 깨달았다.

“저, 전하께서도 마법을……!”

“우리 발밑에도 있어요!”

“이 정도 크기라면 황궁 전체를 덮을 정도 아닙니까?!”

마법진의 크기는 시전자의 실력을 나타내는 직관적인 기준이기도 했다. 이 순간 마법진이 불꽃을 터뜨리든 케이크를 터뜨리든 귀족들의 충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원래는 내가 줬던 팔찌를 이용해 ‘아펠에게도 마법이 안 통합니다!’ 하고 어필하려 했지만…….

뭐, 상관없겠지.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이미 그 자체로 신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증명이니까.

“필요하다면 제 실력으로 신성성을 입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펠의 말투는 협박조였지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나는 옅은 미소를 띠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와 대화할 때 듣긴 했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도 흔들림 없이 대처하는 아펠이 새삼 대견했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움에 무례를 범했습니다. 신성 제국의 귀족으로서 폐하의 결정에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제국에 광영을.”

“제, 제국에 광영을.”

바니유 공작이 말문을 떼자 귀족들이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수긍하며 호응했다. 예를 표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뢰드그뢰드도 섞여 있었다. 비록 표정은 곱지 않았지만.

* * *

“지시대로 준비하긴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까지 성녀임을 증명하는 데 수고를 들여야 하나, 싶었지요. 성녀님의 큰 뜻인 줄도 모르고.”

피오르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런 사정이 있었다니… 심지어 저희에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이게 뭡니까.”

“하하… 죄송해요.”

멋쩍게 사과하자 피오르도 그 이상 추궁하지는 못했다. 아펠이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이 사안이 얼마나 민감한 것인지는 자신이 더 잘 알 테니까.

“에휴, 성녀님께 뭐라 할 수는 없으니 오늘은 몽블랑이나 잡아야겠습니다.”

실컷 뭐라 해놓고, 피오르는 휘적휘적 걸어 몽블랑이 있는 발코니로 향했다. 커튼이 들쳐질 때 보니 이미 키슈가 몽블랑의 멱살을 짤짤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된 건가…….’

나는 처음보다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사교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귀족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바빠 보였다.

당연히도 그들의 시선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브라우니와 머랭은 물론이고 황제와 아펠, 발코니 밖에 나간 몽블랑 일행, 중립 귀족 중에서 제일 세력이 강한 바니유 공작과 내 아빠인 쉬제트 백작에게까지.

그러나 내게 직접적으로 말을 거는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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