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황제는 마저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올랐다.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손끝으로 한 번 쓸고, 단상 한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귀족들도 긴장을 풀고 사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펠을 기다리는 동안 나도 멀뚱히 서 있긴 어색했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내 수행원으로 동행한 키슈와 피오르는 이미 곁에 없었다.
아까 뢰드그뢰드가 마법이나 금술을 사용해 어쩌고 하는 부분에서 벌써 키슈의 입술이 씰룩이고 있었다. 피오르는 거기서 욕설이 쏟아지기 전에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문밖으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조금 오래 걸리려나?
내심 머쓱하게 입맛을 다시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죠. 아니, 누가 들으면 생판 남인 줄 알겠어요.”
나는 야속하다는 투로 말하며 아빠의 팔을 툭 쳤다.
왕당파 백작에 내 가족이고, 심지어 마탑에서 멀지도 않은 곳에서 지내던 아빠였기에 당연히 이곳에서 만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에도 그렇게 쓰여 있었고.
다만 나를 이렇게까지 공적으로 대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나까지 조금 어색해지긴 했지만, 아빠의 고지식한 태도가 하루 이틀 있던 일도 아니니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도 사적인 자리에서마저 존대하진 않으니까.
“귀찮다더니 수염 깎으셨네요? 엄마가 좋아하시겠어요.”
“…….”
아빠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그제야 아빠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쪽에 주의가 쏠려 있는데 엄마 이야기를 꺼내기가 부담스러운 거구나.
우리는 만에 하나라도 뢰드그뢰드의 견제가 남아 있을 것을 걱정해 오랫동안 엄마가 위중하다는 소문을 묵인하고 있었다.
뢰드그뢰드가 이 자리에 있기도 했고, 나 어색하다고 계속 아빠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기에 나도 적당히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황비의 장례를 치르기 직전에 가족끼리 시시덕거리고 있는 모습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을 테니까.
“몽블랑 후작님과도 오랜만에 만나시는 거죠? 말씀 나누세요.”
내 말에 그럴까요, 하며 아빠가 멀어진 그때였다.
“성녀님께 인사 올립니다.”
타이밍을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를 따라 뒤돌아본 내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뷔슈 드 노엘 바니유 공작님.”
사실 나도 진작 그를 알아보았지만 먼저 말을 걸 명분이 없어 모르는 척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바니유 공작보다는 그 뒤에 선 얼굴이 더 반갑기도 했다.
“젤라토 님은 얼마 전에 뵈었지요?”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성녀님이시라는 것도 모르고…….”
“별말씀을요. 진짜 저한테 사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당연히 크바스 얘기였지만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럼에도 젤라토는 누구 얘기를 하는 건지 대번에 알아듣고 피식 웃었다.
바니유 공작이 목을 가다듬고 다시 인사했다.
“크흠, 중차대한 자리라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아무래도 제 뒤를 이으려면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시켜야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성인이 된 지 오래인 젤라토였지만 제 아빠에게는 영락없이 아이 취급을 받고 있었다.
젤라토가 민망해하는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하하, 그래. 너도 할 말이 있어서 오겠다고 했지?”
공작이 젤라토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나를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양해를 구하고 물러난 그는 금세 다른 귀족들에게 둘러싸였고, 젤라토는 공작이 다른 귀족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에클레어에게 약혼을 취소하고 검의 길을 걸으라며 격려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대해 성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 들렀습니다.”
나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후에 에클레어가 파혼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러잖아도 뒷일이 어떻게 됐나 싶어 신경 쓰였는데 그 가족에게 감사 인사를 듣다니, 무엇에 더 놀라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아, 아뇨. 제가 멋대로 한 말에 감사라니요.”
“저 역시 그 아이에게는 검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다만 에클레어가 워낙 고집이 세서 듣질 않았지요.”
젤라토가 씁쓸하게 웃었다.
에클레어의 고집이야 나도 알고 있었다. 지난 생에 나를 믿었기에 벌어진 사건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눈을 다쳤어도 그녀는 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이 있었고, 그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지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내가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에클레어는 기사의 꿈을 포기하고 평생 자신을 억누르며 엄격히 살아갔을 테다.
“사실 에클레어는 검술 대회에 참가 신청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리 접수를 해준 거죠. 애초부터 지망하던 기사를 포기하고 결혼 생각을 하던 에클레어가 마음에 걸려서요.”
보건실 앞에서도 그것 때문에 싸웠겠구나.
나는 말을 받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클레어는 어릴 때부터 젤라토를 따랐고 둘의 관계도 끈끈했다. 젤라토는 에클레어가 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에클레어는 제 각오를 무시하는 젤라토가 못마땅했으리라. 왜 멋대로 그랬냐고 한바탕 화낸 뒤에는 아프다는 핑계로 보건실에 처박혀 기권할 생각이었겠지.
“그럼 약혼은…….”
작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이런 자리에서 귀족 영애의 파혼에 대한 말을 꺼내기는 조심스러웠지만 젤라토는 웃으며 답해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커스터드가와는 파혼하는 대신 결혼을 미루기로 합의했답니다. 에클레어도 멀리 파견되지 않고 근무조건이 잘 맞는 기사단을 알아보기로 했고요.”
파혼하는 대신 결혼을 미뤄?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커스터드 검술 대회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에클레어를 멍하니 바라보던 크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반한 거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크렘과 에클레어는 지난 생에서도 운명의 상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둘이 이어지지 않았던 건 에클레어의 오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내가 크렘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아무튼, 오늘은 에클레어의 가족으로서 성녀님께 감사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저희를 대신해 그 아이를 설득해 주신 것에 대해서요.”
“…….”
나는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젤라토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겸손한 대답이나 사양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바니유 영애… 아니, 에클레어 언니에게 전해주세요. 무엇이 올바른지 알았다면 과거를 돌아보지 말라고.”
갑작스러운 말에 젤라토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때 단상 옆에 나 있는 문에서 시종의 외침이 들려왔다.
“아펠 슈트루델 황자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조용히 들어온 슈트루델의 밀리람 황제와 달리 아펠의 등장은 그야말로 주인공 같았다. 책봉식을 앞에 둔 입장이니 주인공이라는 비유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커스터드에서 만나고 겨우 열흘 정도 지났을 뿐인데, 단상 높이가 더해졌기 때문인지 아펠은 전보다 장성한 듯 보였다. 아니면 그 특유의 존재감 때문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그가 입은 옷이 기사 예복처럼 각 잡힌 디자인이라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걸을 때마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빛이 아펠의 회색 머리카락에 난반사했다. 은처럼 밝은 비단 상의와 암회색 바지, 제례용 검을 채운 검은색 벨트는 그의 곧은 자세와 어우러졌고, 사파이어처럼 파란 눈동자는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당연히 나는 사람들이 단상을 향해 하나둘 허리를 숙이던 그때까지도 아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크레페?”
아펠의 시선이 날 향하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성녀님은커녕 ‘님’ 자조차 붙이지 않은 편한 호칭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아니면 아펠이 실수한 거겠고!
나는 현실도피 하는 기분으로 손을 바르작거리며 주변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면 다들 어두운 옷을 입고 있는 가운데 나와 아펠만 밝은 옷이었다.
제대로 알은척하기엔 민망하고, 아예 모르는 척하기엔 마음에 걸렸기에 뒤늦게 약식으로만 인사했다. 어차피 성녀인 나는 허리를 숙이는 인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제국의 빛, 아펠 슈트루델 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아펠이 단상을 내려오더니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이제 보니 발치에는 흰색 강아지… 아니, 머랭도 함께였다.
아펠이 내 앞에 멈추자 머랭도 잘 훈련된 은여우처럼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아펠은 자연스레 내 손을 잡고 손이 위를 향하도록 한 후 춤을 신청할 때처럼 예우했다.
“와줘서 고마워, 크레페.”
그러나 정중한 태도와 달리 호칭은 그대로였다. 놀란 내가 손가락을 움찔했다.
물론 놀란 건 다른 이들도 매한가지였다.
특히나 지금 막 나갔다가 돌아온 피오르와 키슈가.
* * *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나는 별궁에서 아펠을 만나자마자 그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전 생의 내가 진작 네 고충을 알아주지 못해서, 도와주지 못해서, 네가 날 아껴준 만큼 내가 너를 아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때야 타이밍을 놓쳐 실행하지 못했지만, 지금 아펠의 모습은 제 엄마의 장례에 참석한 거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담담해 보였다. 위엄이 배어 나올 만큼 당당한 오라만 봐도, 내 위로가 필요치 않을 듯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보다 슬퍼 보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이럴 수가……! 크흑, 플럼이… 그 수수께끼의 인물이… 약혼자가… 흐흡, 이러면 내 꿈은! 내 며느리는!”
키슈는 학교에서 마주쳤던 플럼이 사실 아펠 슈트루델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꺼이꺼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말하는 것을 짜 맞춰보니 지금까지는 가문명도 들은 적 없는 플럼 바클라와가 나와 약혼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펠 슈트루델이라면 진짜 내 약혼자일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 건가?
“훌쩍, 크흐흑…….”
키슈가 제 손수건에 팽 코를 풀었다. 다행히 주변의 귀족들은 키슈와 황비가 각별한 사이였구나, 하며 납득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