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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1)화 (171/181)
  • 171화 

    “아휴, 역시 이 옷이 훨씬 잘 어울리네요. 피오르 그 녀석은 영 센스가 없다니까요? 제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인지, 키슈는 평소처럼 배시시 웃고는 가져온 꽃을 옷 매듭 사이와 머리카락 사이에 꽂아 장식했다.

    키슈가 날 꾸며주겠다고 처음 제안했을 때는 무슨 생각인가 했는데, 이제 보면 그간 일 때문에 바빠 꾸미지 못했던 한을 나를 통해 풀려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럼 팔찌로는 이걸…….”

    본가의 에이미를 떠올리느라 조금 반응이 늦었다. 키슈가 내 소매를 걷자마자 나는 슬쩍 손을 뺐다.

    “팔찌는 괜찮아요.”

    “뭐예요? 이거 원래 하고 계셨어요?”

    봤구나.

    “플럼한테 선물받았어요.”

    나는 당황한 내색을 감추기 위해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어쩌면 이게 국보 ‘펜리르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크흠, 장례엔 안 어울릴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긴소매니까…….”

    나는 말을 흐리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팔찌에 대해 조금 고민스럽긴 했지만, 아무래도 아펠 역시 책봉식 전에 이걸 주고 싶어서 학교까지 온 거라 했으니 나도 착용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키슈에게 말한 대로, 예복을 챙겨 입고 나면 소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테니까.

    그러자 키슈가 울상을 짓고 중얼거렸다.

    “크레페 님 같은 며느리… 갖고 싶었는데…….”

    …아직 포기 안 했구나.

    내 예상과 다른 주제로 심란해하는 그녀를 보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 피오르가 문을 두드렸다.

    “다 했으면 가자!”

    * * *

    “조심히 다녀와!”

    “삐!”

    갈레트는 내가 걱정되는 듯 끝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인사에, 키슈의 품에 안긴 브라우니가 날 대신하듯 답했다.

    “괜찮아, 금방 갔다 올게.”

    내가 브라우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갈레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웃어주었다. 그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이었지만 어차피 날 따라 황궁에 갈 수는 없었다.

    이름이 조금 알려져 있다고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갈레트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백작가의 장자일 뿐이었으니까.

    이제 막 마탑에 들어온 입장이니 성직자 자격으로 입장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말이다.

    그런 이유로 나와 함께 마탑을 나온 건 키슈와 피오르 두 명뿐이었다.

    마탑 입구에는 마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큼지막한 황동으로 만들어진 페가수스 문양이 마차 문 위에 붙어 있었다.

    익숙한 쉬제트 가문의 문장을 보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차 옆에 자리를 잡고 있던 마르크가 각 잡힌 자세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 인사했다.

    “크레페 님이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압니다. 그냥 폼 한번 잡아보고 싶어서요.”

    평소처럼 능청스러운 대꾸를 듣자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여기까지 온 것에 비하면 짧은 동행일 텐데, 흔쾌히 함께해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마르크가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피오르와 키슈, 키슈에게 안긴 브라우니까지 탑승하고 나자 문이 닫혔다.

    * * *

    마탑에서 담 하나만 넘으면 황궁이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성녀인데 마차 한 대, 호위 기사 한 명도 없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차는 황궁의 담을 따라 빙 둘러 가다 정문 앞에 멈췄다. 나는 마르크에게 한 말마따나 짧은 동행을 끝내고 일행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나를 발견한 사람들은 모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문만 무성한 성녀를 실제로 봐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어두운 의상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내 차림새가 유독 눈에 띄어서일 수도 있겠다.

    흰옷과 호박색 귀걸이와 화려한 팔찌.

    각각 벨벳 천이나 머리카락, 소매로 상당 부분 가려지긴 했지만 이 자리에서는 다소 튈 수밖에 없는 조합이었다.

    “저게 신수 페가수스……!”

    아, 브라우니도 튀겠구나.

    이름 모를 귀족이 입 밖에 낸 탄성을 못 들은 척하고 시종의 안내를 따라갔다.

    모임 장소는 황비가 머물던 별궁, 그중에서도 황비가 즐겨 사용했다던 사교장이었다. 가는 길이 어딘가 익숙하다 했더니 지난 생에서 아펠을 따라 들어왔던 기억이 났다.

    “성녀님께서 입장하십니다!”

    나를 이곳에 안내해 준 시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엄숙하지만 조용하진 않던 곳이 찬물을 맞은 듯 고요해졌다.

    내가 한 걸음씩 발을 내딛자 주변에 투명한 장벽이라도 있는 듯 자연스레 사람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경계와 호기심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내 존재에 아직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외부인까지 모인 커스터드 축제 때보다 적은 인원수였지만 압박감은 그 이상이었다.

    하긴 당연하려나.

    학교는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구태여 나를 보러 올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황궁에 머물던 사람들, 특히나 타국에서 온 귀족들은 어쩌면 황비를 향한 애도보다 나를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을지도…….

    “태연히 행동하십시오.”

    긴장감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을 눈치챈 듯 피오르가 작게 속삭였다. 내가 몸가짐을 바로 하며 고개를 끄덕인 그때 누군가 인파를 헤치고 한 걸음 다가왔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성녀는 누군가의 인정으로 만들어지는 자리가 아니니까요.”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암청색 재킷, 가슴 주머니에 꽂은 검은 백합과 어깨에 두른 흰 천, 신심을 증명하듯 그 위에 묶은 매듭.

    먼저 와 있었구나.

    “오랜만이에요, 몽블랑 후작님.”

    그는 냉랭해 보이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온화한 미소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러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검은 백합을 가슴에서 빼낸 후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디몬 님의 종, 몽블랑 몬테 비안코가 성녀님을 뵙습니다.”

    장례를 의미하는 꽃을 빼낸 것은 숨을 거둔 황비보다 나를 더 극진히 대하겠다는, 예우를 갖춘 인사였다. 그게 신호탄이 된 듯 사람들이 하나둘 몸을 숙였다.

    ‘운명은 그리 쉽게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지. 바꾸려면 근본을, 가능한 한 큰 것을 바꿔야 해.’

    스치듯 아펠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성녀로 사람들 앞에 나서다니, 지난 생의 나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파도타기 하듯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자세를 낮추었을 때였다. 피오르가 그들을 대표하듯 선창했다.

    “지혜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주소서.”

    “슈트루델에 광영을.”

    슈트루델의 귀족들이 허리를 펴고 섰다.

    “대륙에 광영을.”

    뢰드그뢰드를 포함한 타국의 귀족들이 몸을 일으켰다.

    “신의 이름 앞에 평화를.”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내던 이들 사이에 유독 도드라지는 인물이 있었다. 슈트루델 제국의 현 황제이자 아펠의 아버지, 밀리람 슈트루델이었다.

    “제국의 심장, 금상폐하를 뵙습니다.”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들고 살짝 무릎을 굽히자 황제는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줄지어 인사하려 했던 귀족들이 몸가짐을 바로 하고 가만히 묵례했다.

    “어찌 알림도 없이 행차하셨습니까…….”

    황제 없이 귀족들의 행동을 이끌던 피오르가 당황한 듯 말을 흐렸다.

    내가 처음 알현했을 때와 달리 황제의 차림새는 망토도 없이 간결했다. 고고하면서도 날카로웠던 인상은 그때보다 야위어 조금은 초췌해 보일 정도였는데, 아무래도 황비의 서거가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황제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까워지기도 전에 사람들이 먼저 길을 내주었다.

    “괜찮네. 주인공은 짐이 아니니까.”

    몽블랑 앞에 멈춰 선 황제는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백합을 도로 가슴 주머니에 꽂아주었다.

    “송구합니다.”

    몽블랑이 짧게 말하며 예를 갖췄다. 황제는 씁쓸한 눈빛으로 단상 위에 놓인 관을 잠시 쳐다보았으나 다행히 다른 이를 탓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그가 자신을 다잡듯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는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슬픈 날이지만 기쁜 날이기도 하지. 신께서 슈트루델의 황태자 책봉식을 눈앞에 두고 성녀를 내려주시다니 말이야. 근국인 바움쿠헨의 황제께선 꽤나 배가 아프겠어.”

    황제가 뢰드그뢰드를 딱 집어 눈짓했다.

    대륙에서 제일 강한 나라를 꼽자면 슈트루델이었으나 땅덩이의 크기만 놓고 보면 바움쿠헨도 그 못지않게 넓었다. 사사건건 슈트루델 제국에 시비를 걸던 바움쿠헨 입장에선 슈트루델에 나타난 성녀라는 존재가 눈엣가시였을 테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움쿠헨에서는 황비의 서거에 대한 형식적인 애도문 하나 보내놓았을 뿐, 본래 슈트루델과의 외교 업무를 맡고 있던 뢰드그뢰드 외의 다른 사람은 이 자리에 참석도 하지 않은 채였다.

    “짓궂은 말씀 거두어주시지요. 저희 황제 폐하께서도 슈트루델 황제 폐하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뢰드그뢰드가 잠시 날 곁눈질하곤 말을 이었다.

    “저희 폐하께서도 신심이 깊으십니다. 바움쿠헨에서도 성녀님을 환대하고 싶은 마음에 그 준비로 바빠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신 것뿐입니다. 물론 진짜 성녀임이 증명됐을 때의 이야기입니다만…….”

    “얼마 전,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서 신수가 등장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아, 작은 망아지가 공중을 날아다녔다는 이야기 말입니까? 그 정도로 성녀임을 증명했다 할 수는 없겠지요. 막말로 마법이나 금술을 이용해 평범한 말을 소형화하거나 허공에 띄웠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금술이라는 말에 작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황제의 앞이었으니만큼 빠르게 사그라지긴 했으나 ‘성녀’라는 게 실존하는지에 대해선 그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한 듯 보였다.

    “이런, 제가 소란을 일으켰군요. 실언에 사죄드립니다.”

    실언이라고 해봤자 고의였음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언사였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크흠.”

    짧은 헛기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나는 살포시 웃으며 뢰드그뢰드를 향해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바움쿠헨의 황제께서 그리 신심이 깊으시다니, 바움쿠헨을 신의 이름으로 다스려달라 간청해야겠군요.”

    내가 진짜 성녀라는 게 증명되면 바로 바움쿠헨의 통치에 개입하겠다는 뜻이었다. 뢰드그뢰드가 섣불리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바움쿠헨의 황제께서도 이미 신의 이름 아래 나라를 다스리고 있겠지.”

    슈트루델 황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정도로 넘어가 주겠다는 그의 태도에 별수 없이 뢰드그뢰드도 한 걸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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