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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0)화 (170/181)
  • 170화 

    나는 갈레트의 가족애가 생각보다 두터웠다는 사실에 감동해야 할지, 과연 피가 물보다 진하구나 하며 놀라야 할지, 파타슈를 생각보다 싫어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야 할지 갈등했다.

    피오르에게서 받은 과제만도 산더미였을 텐데, 그런 마법진을 조사하고 만들 시간은 또 어디 있었던 건지…….

    “실례합니다. 문제가 생겼다면 제가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이 상황에 새로운 인물이 끼어들었다. 분란이 생길 만한 일은 사양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반가운 얼굴이었기에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성녀님. 과연 신의 총애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미인이시군요.”

    “예에…….”

    닭살 돋는 말투는 그리 반갑지 않았지만.

    어색하게 대답하자 크렘이 초면에 실례했다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이곳을 지키던 기사에게 얘기를 듣고 커스터드 자작가의 일원으로서 상황을 보러 들른 모양이었다.

    “…됐어요, 이제. 전 관객석에 있을게요.”

    보는 눈이 늘자 파타슈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가 될성부른 마검사로 첫발을 뗄 기회를 두 번이나 잃었음을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졌다.

    “아, 그럼 나도.”

    키슈가 재빨리 대답하고는 브라우니를 갈레트에게 넘긴 후 파타슈를 따라 나갔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빈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있고 무대와 가까운 관계자석은 남은 대회를 보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크렘도 경계를 선 기사와 몇 마디 나누고는 관계자석 하나를 차지했다. 나를 보며 싱긋 웃길래 나도 얼떨떨하게 마주 웃어주었는데, 솔직히 방금 전에 그의 약혼녀에게 파혼을 부추긴 사람으로서 그의 환대가 조금 불편했다.

    “크흠.”

    그때 갈레트가 헛기침을 하고는 나와 크렘 사이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 * *

    파타슈와 크렘의 난입으로, 나는 이번 대결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에클레어와 카눌레가 맞붙는 준결승전이었다.

    뒤늦게 결과가 궁금해져 무대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으려니 크렘이 짧게 말해주었다.

    “바니유 영애가 승리한 모양이로군요.”

    “오오.”

    참지 못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번 삶에서는 분명 카눌레가 에클레어를 이기고 크바스와 결선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때 에클레어는 마구 사용 금지 추첨 때문에 졌다면서 씩씩거렸는데, 아무래도 이번 추첨에선 그녀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왔던 모양이었다.

    “아, 커스터드 영식께도 축하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약혼녀분이시죠?”

    내가 그리 말하자 크렘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아직 공식 발표를 하진 않았는데… 알고 계셨던 겁니까?”

    “…예에. 성녀니까요.”

    곧 둘이 파혼을 하게 될 거라는 것도 알죠.

    만능 변명을 꺼낸 나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고 아무것도 없는 무대를 쳐다보았다. 크렘이 신기하다는 듯 날 보는 눈빛이 느껴지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와 크렘 사이에 앉은 갈레트 덕분에 더 이상의 대화는 피할 수 있었다.

    “쯧.”

    곧 카눌레가 이쪽에 다가왔다. 관계자석을 지키던 기사는 카눌레가 나와 같은 쉬제트 가문의 사람인 것을 아는 듯 그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오빠 왔어? 아깝다, 그치?”

    대결을 마치고 온 카눌레에게 친근히 말을 붙였다. 하지만 카눌레는 방금 막 지고 온 것이 분한 모양인지 내게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목에 묶여 있던 손수건을 풀어 쥐고 갈레트에게 내밀었다. 괜한 오기가 생겨서 나는 카눌레 옆에 다가가 다시금 말을 붙였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준결승 진출도 대단한 거잖아. 마법 물품 사용 추첨만 불가였어도…….”

    “놀리냐?”

    카눌레의 매서운 대답이 돌아왔다. 당황한 내가 그를 토닥이던 손을 멈추자 크렘이 헛기침을 하고 끼어들었다.

    “추첨 결과는 마구 사용 불가였습니다. 두 분은 순수 검 실력으로 겨루셨고요.”

    “…에?”

    입 밖으로 얼떨한 의문이 새어 나온 그때 심판이 외쳤다.

    “결승, 에클레르 오 바니유 대(對) 크바스 데 오크로시카의 시합이 있겠습니다.”

    심판의 목소리를 따라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무대 위에는 전투태세를 갖춘 크바스와 에클레어가 서 있었다. 금세 심판의 팔이 내리그어졌다.

    “대전, 개시!”

    시합이 시작되자 곧바로 에클레어가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크바스는 예상했다는 듯 검을 들어 그녀의 공격을 막았으나 에클레어는 한 치의 물러남도 없었다.

    곧이어 내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맹공이 이어졌다.

    황실 기사단에 입단이 확정된 크바스의 승리를 점치고 있던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공격은 눈으로 좇기 힘든 속도였지만, 그 와중에 크바스가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와, 세상에!”

    놀란 건 비단 나 하나뿐이 아니었다는 듯 갈레트가 어린아이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본 나는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려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한 번도 크바스를 이긴 적이… 아니, 크바스와 제대로 대적한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마탑에 있는 동안 받은 편지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갈레트와 크바스가 앙숙이 된 이유는 각자 자신의 영역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갈레트는 시험 때마다 크바스의 점수를 보며 놀려댔고, 반대로 크바스는 검술 수업 때마다 갈레트를 대련 상대로 지목해 상처가 안 남을 정도로 골려먹었다.

    그게 분했던 갈레트는 엄마에게 검을 가르쳐 달라며 매달렸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라며 아빠에게 갈레트의 검술 교육을 일임, 그 후 아빠는 갈레트에게 무려 반년여에 걸친 특훈을 해주었다고 한다.

    슬프게도, 그러고도 갈레트는 크바스 앞에서 방울토마토처럼 굴러다니는 신세였다고 했던가.

    갈레트가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하고 씩씩거리며 월반 시험 준비를 한 게 그때였단다.

    엄마의 편지에 따르면, 상심한 갈레트를 붙잡은 아빠가 각자의 개성과 특기와 적재적소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반나절 동안 늘어놓은 적도 있다던데, 어쩌면 그것도 갈레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세월이 있었기 때문인지 갈레트는 크바스가 밀리는 듯하자 엄청나게 들떠 보였다.

    물론 나도 크바스의 잘난 체하는 모습은 꼴 보기 싫었기에 내심 고소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통쾌함보다는 놀라움이 짙었다.

    에클레어의 출전을 부추기긴 했지만 내심 크바스를 상대하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 나는 에클레어와 크바스의 대련을 눈앞에서 봤었으니까.

    - 너 황실 기사단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니냐?

    오래전 카눌레에게서 들었던 말이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물론 그것은 시간으로 봐도 5년 후, 심지어 에클레어가 나 때문에 한쪽 눈을 잃은 후의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크바스가 상처를 입고 마무리된 대련이었으나 그때의 기억은 워낙 큰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앗!”

    어쩌면 에클레어가 이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그때, 크바스가 뒤로 뻗은 왼발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의 검이 펜싱을 할 때처럼 한 점을 향해 내질러졌다. 아무리 대련용 검이라고 해도 저런 공격을 맨몸에 맞으면 그대로 몸이 꿰뚫려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에클레어는 몸을 낮추고 텀블링하듯 뛰어올랐다. 마구(魔具)의 힘인지 매처럼 날아오른 그녀의 위로 흰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흑발이 꼭 매의 깃털 같구나, 생각한 그때 에클레어의 묵직한 공격이 내리꽂혔다.

    “큭!”

    크바스가 급히 검을 거두어 막고 반격을 위해 몸을 비튼 순간이었다.

    “그만! 판정에 들어가겠습니다!”

    심판의 목소리가 조용한 장내에 울려 퍼졌다.

    “…….”

    크바스가 얼굴을 찌푸리고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 순간, 관객들이 그제야 멈췄던 숨을 마시며 환호했다.

    “우… 우와아아!”

    “대, 대단하네.”

    갈레트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얼떨하긴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체감되지도 않을 정도의 혼전이라니.

    “…쳇.”

    카눌레의 혀 차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에클레어가 자세를 가다듬고 무대 끝으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녀를 쫓아 단상 가까이 다가갔다. 걸음걸이를 보니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했지만 그녀의 머리나 얼굴은 피와 땀으로 얼룩이 져 있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에클레어의 상처를 살피려던 순간이었다.

    “에클레르 오 바니유의 판정승을 선언합니다!”

    심판의 판정승 선언에 잠시 멍해 있던 에클레어가 후련하다는 듯한 얼굴로 환히 웃었다.

    “우아아아아!”

    “멋있었다!”

    그 얼굴에 화답하듯 관객석이 다시금 들썩였다.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근방을 덮어 바로 옆 사람의 말도 못 알아들을 정도였기에, 나도 손을 모아 입 옆에 대고 무대를 향해 외쳤다.

    “언니 멋져!”

    성녀의 체면도 잊고 팬클럽 일원처럼 열심히 응원을 보낸 내가 상기된 얼굴로 뒤를 돌았다. 크렘은 표정 관리도 잊은 듯 멍한 얼굴로 에클레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그의 앞에 다가가 씩씩하게 말했다.

    “에클레어… 아니, 바니유 영애께 축하한다고 꼭 전해주세요!”

    꼭 내가 우승한 것처럼 뿌듯한 마음에 나는 콧바람을 훅 내뿜었다.

    “예… 예. 물론이죠.”

    크렘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 책봉식과 데뷔탕트, 그리고…… 】

    내가 성녀로서 연설하게 된 것, 아펠이 축제까지 찾아온 것, 에클레어가 우승한 것.

    이것은 모두 나의 지난 경험과 달라진 사건들이었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황비의 서거로 인한 결승전 중지가 없었다는 것도 큰 변화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미래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축제가 끝나고 불과 열흘 후, 황비가 서거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진 것이다.

    갈레트나 엄마의 죽음과 달리 팔미에 황비의 사인은 병사였다. 나는 황제와 여러 번 만나 황비의 병에 관해 설명했지만, 결국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외과적 처치의 부재로 그녀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꽃 가져왔어요!”

    키슈가 방문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밝은 말투와 달리 품에 안긴 것은 장례를 상징하는 검은 백합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곤 옷차림을 마저 정리했다.

    풍성한 프릴이 달린 흰색 드레스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그 위에 암회색 벨벳으로 된 천을 두른 후 허리와 어깨를 가로질러 묶으면 끝.

    하지만 성직자에게 걸맞은 매듭법은 따로 있었기에 키슈가 수고해 주기로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연설도 잘하셨잖아요.”

    키슈는 내가 말이 없는 게 긴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본래 아펠의 황태자 책봉식은 나흘 후에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비의 장례식 때문에 귀족들이 보다 빨리 모였고, 내가 주관해야 하는 책봉식도 오늘로 당겨졌다.

    물론 지금의 상황이 긴장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펠이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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