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 * *
커스터드 귀족 학교의 축제는 외부인뿐 아니라 내부인인 학생들에게도 큰 행사였다. 당연히 이런 날에 보건실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방금 전에 들어간 에클레어만 빼면.
“에클레르 오 바니유 님, 계신가요?”
유일하게 닫혀 있던 문에 노크를 하자 한 박자 늦은 반문이 돌아왔다.
“…누구시죠?”
성녀인데요, 하고 대답하면 수상해 보일 것 같아서 잠깐 머뭇거리자 문 너머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가 보낸 거면 돌아가세요.”
“아니니까 들어갈게요.”
가만히 있다간 말도 못 붙여보고 물러나야 할 것 같아서 강경책을 쓰기로 했다. 내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열자 침대 위에 환자처럼 앉아 있던 에클레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허락했던가요?”
곧바로 가시 돋친 질문이 날아왔다. 나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굳혔다.
이전 생에서는 누구보다도 날 믿어주던 그녀였다. 세 살이라는 나이 차가 있긴 했지만, 그녀는 나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때로는 오빠들보다 나를 더 아껴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없던 일이 되어버렸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고 하던가.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고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신께서 허락하셨으니 괜찮겠죠.”
“뭐라고요?”
사기꾼이라는 말만 안 꺼냈을 뿐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딱 수상한 인물을 향한 것이었다.
“저, 저 성녀입니다. 크레페… 아니,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요. 제 얘기 못 들으셨어요? 아까 연설도 했는데…….”
당황한 내가 뒤늦게 덧붙였다. 신께서 허락 어쩌고 했던 사이비 종교인처럼 보이지 않았기만을 바라자.
“…….”
에클레어가 고개를 45도 아래로 비스듬히 기울이고 곁눈질로 날 주시했다. 여전히 날 경계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는 보건실에 있느라 내가 연설하는 모습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후우…….”
어쩔 수 없군.
한숨과 심호흡을 섞어 마음을 가다듬은 내가 입을 열었다.
“바니유 영애, 어머니께서 바니유 공작님과 재혼하셨지요?”
짧은 확인 질문에 에클레어가 입술을 꾹 다물고 표독스런 눈빛을 했다. 나는 거기에 대응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신 후에도 공작님과 젤라토 님은 영애께 성심을 다해주신 모양이군요. 아마 영애께도 그로 인한 부채감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고… 아아, 커스터드에 들어오신 것도 젤라토 님을 위해서였네요?”
말하다 보니 정말 사기꾼이 된 기분이었지만 이미 물러날 곳은 없었다. 나는 신내림 받은 무당처럼 최대한 그럴싸하게 꾸며냈다.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에클레어가 짧게 물었다.
“취미로 뒷조사라도 했어요?”
“…크흠.”
의심도 많지.
나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하고 최대한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께서는 뭐든 알고 계신답니다.”
그러나 에클레어는 아무 대꾸도 않고 고개를 돌렸다. 무시하려는 건지 일단 인정은 해주겠다는 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방금 전처럼 대놓고 하악질하는 것보단 나았기에, 나는 조심스레 침대맡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으시나 봐요?”
직접적인 물음에 에클레어가 나를 흘끗 쳐다보았다.
“실은 아까 젤라토 님과 다투는 것을 봤거든요. 걱정되는 마음에 따라와 봤는데, 무슨 사정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직접 맞혀보지 그래요?”
“…….”
나도 모르게 멱살이라도 틀어쥘 뻔했다. 아마 성공하기 전에 내가 엎어치기 당할 확률이 더 높았겠지만.
원작의 ‘악역 영애’라는 호칭을 이런 식으로 실감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하하, 그럴까요?”
나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겉으로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래, 내가 맞히고 만다.
울컥하는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기록된 에클레어의 모습과 지난 생에서 친분을 쌓으며 입수한 정보, 디몬의 서고에서 읽은 『악역 영애지만 악역은 아닙니다』까지.
그녀의 발자취를 더듬는 데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나 에클레어의 소예언서는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지난 생에서 내가 크레페의 몸에 들어온 때를 기점으로 적혀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삶에서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답지 보듯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 아까 에클레어가 꺼낸 파혼 얘기만 해도 난 전혀 모르는…….
아니지, 원작에서 에클레어는 크렘이랑 결혼했었잖아!
워낙 스치듯 지나간 일이라 잊고 있었지만 막상 그 사실을 떠올리자 다른 단서들이 퍼즐 조각처럼 들어맞기 시작했다.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린 내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검의 길을 선택하면 바니유 공작가에 피해가 갈까 봐 걱정하시는 거군요.”
그러자 에클레어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놀란 표정을 보니 역시 내 추측이 정답인 모양이었다.
“검을 놓고 커스터드 자작가와 혼인을 하면 바니유 공작가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젤라토 님께선 반대하시는 것 같던데.”
“그럼 어떡해요!”
울컥해서 외친 에클레어가 입술을 깨물었다. 한풀 꺾인 기세로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저도 한참 고민한 거예요. 하지만 무가로 유명한 바니유 공작가에서 친아들을 밀어내고 수양딸이 기사가 된다니. 분명 오빠랑 아빠 둘 다 이상하게 보이겠죠. 그럴 바에야 제가 적당한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나아요.”
- 커스터드 자작가 정도면 봐줄 만은 하지. 사실 자작가라는 게 그리 좋은 직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학교 덕에 돈도 꽤 벌었을 테고 이름값도 있으니까.
이전 생에 들었던 에클레어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말이 힌트였던 셈이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나요?”
“…….”
내 질문을 들은 에클레어가 고개를 숙이고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한참 동안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내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성녀예요? 아니… 성녀님이신가요?”
내가 그렇다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클레어가 고개를 바로 들고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가 커스터드가와 파혼하고 검의 길을 선택하면,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네 책임입니다, 하고 말하는 듯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괘씸하다고만 여기기에는 그녀의 표정이 진지하고 애처로웠기에, 나는 싱긋 웃으며 “그럼요.” 하고 짧게 답했다.
성녀인 내가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응원뿐일 테니까.
* * *
- 나 사실 제대로 작위를 받아볼 생각은 없었는데 진짜 기사가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생각보다…….
에클레어의 들뜬 말투와 표정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녀는 공작 영애라는 지위를 뒤로하고 기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로 괴짜 취급까지 받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사실 에클레어와 크렘의 결혼 생활이 어떨지 나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전시(戰時) 상황도 아닌데 귀족 부인이 영지를 비울 수는 없었고, 당연히 에클레어의 기사 생활에도 걸림돌이 될 터였다.
내가 아는 건 단지, 에클레어가 검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뿐이다.
그래, 후회를 할 리가 없지.
- 난 네가 걱정이야. 옛날부터 뭐든 잘할 것처럼 얄밉게 굴던 주제에 툭 하면 울고, 여차하면 기절하고, 금방이라도 픽픽 쓰러질 것처럼 힘들어하고.
바닷바람에 휘날리던 에클레어의 흑발,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향하고 있던 초록빛 눈동자.
그 믿음에 조금은 보답이 된 걸까?
보건실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에클레어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가만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크바스와 젤라토에 이어 린처와 에클레어까지.
생각지도 못한 이들과의 만남은 그저 반갑다기보다, 어딘가 씁쓸하고 조금은 아련한 느낌이었다.
- 알림입니다. 다음은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와 파타슈 로렌의 대결이 있겠습니다.
“아이구,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알림이 들려오자 괜히 감상적이 되려는 마음을 도리질로 털어내고 나도 급히 보건실을 나갔다.
그러나 내가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단상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결이 벌써 끝난 건가? 혹시 사건이 생겨 미뤄졌다거나?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는 얼굴을 찾았다.
“파타슈우우! 고생했어어어!”
그리고 단상 바로 밑에 줄지어 있는 관계자 대기석에서 키슈를 발견했다. 브라우니를 동반한 나의 수행원 자격으로 이 자리를 차지한 듯했다.
정작 지금 하는 일은 수행원과 전혀 관계없어 보였지만.
“벌써 끝났어요? 갈레트 오빠는요?”
“앗, 크레페 님! 오셨어요?”
키슈가 나를 반기다 말고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갈레트 님은 아직 크레페 님을 찾는 중이신가 봐요. 저는 방송 듣고 바로 왔는데……. 아, 크레페 님도 여기 오실 것 같아서 온 거예요! 시합 보려고 딴 길로 샌 게 아니고!”
샜구나.
묻기도 전에 돌아온 해명에 금세 상황을 파악한 내가 다시 물었다.
“누가 이겼어요?”
“카…눌레 님이긴 한데…….”
무슨 사정인지 키슈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을 흐렸다.
“크레페 님이 도와준 거죠?!”
별안간 관계자석으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난입했다.
어라, 이 상황 왠지 익숙한데.
순간 표현하기 힘든 기시감이 뇌리를 스친 것과 동시에 일반석과 관계자석 사이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파타슈의 앞을 가로막았다.
“괘, 괜찮아요. 아는 사람이니까.”
학교 측 사람인가?
있는 줄도 몰랐던 기사에게 말하자 그가 부언하지 않고 물러났다. 파타슈가 곧바로 내 앞까지 다가와 섰다.
“손수건!”
“네?”
난데없는 스피드 퀴즈에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파타슈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무슨 일이시죠?”
그때 갈레트가 인파를 헤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정말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온 것은 아닐 테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갈레트는 곧바로 나를 제 뒤에 숨기고 파타슈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아니… 우쭐하는 표정인 것 같기도?
상황이 돌아가는 모습을 파악하기 위해, 나는 갈레트의 보호에서 슬쩍 벗어나 그들을 번갈아 보았다.
“설마…….”
파타슈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이를 으득 갈았다. 그리고 갈레트와 눈싸움이라도 하듯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키슈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내게 속삭였다.
“어쩐지, 아까 시합에서 파타슈가 마나를 한 번도 못 쓰고 졌거든요. 어떻게 된 건가 했는데…….”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난 생에 나는 손수건에 마법진을 그려 카눌레에게 선물했다. 파타슈의 마나 응집에 대처할 방도였는데, 실제로 그것 덕분에 대결은 카눌레의 낙승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 짓을 이번엔 갈레트 오빠가?
“아, 어쩐지 카눌레 오빠랑 둘이 할 얘기가 있다더니! 그때 전해준 거야?”
“검술 시합이잖아. 마나를 쓰는 건 반칙이니까.”
갈레트의 뻔뻔한 대꾸에 파타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