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8)화 (168/181)
  • 168화 

    “됐으니까 그만 좀 하시라고요!”

    키슈의 사자후와 함께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물러났다. 겨우 인파를 빠져나온 키슈가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아휴, 겨우 나왔네. 아무튼 이 사람들이 말야, 정도가 없어요, 정도가!”

    “하하…….”

    아무리 그래도 저명한 커스터드 귀족 학교의 관계자들인데 다 들으라는 듯한 투덜거림이라니.

    오랜만에 키슈의 불같은 성격을 체감한 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음? 이분들은 크레페 님이 아는 사람들이에요?”

    한창 통성명할 때 외따로 떨어져 있던 키슈가 물었다.

    “아, 여기는 크바스 님, 갈레트 오빠랑 동창이었어요. 그리고 이쪽은 아… 아니, 플럼 바클라와라고 해요. 마탑에서 만났는데…….”

    먼저 나서서 그들을 소개하던 내가 별안간 싸한 기분을 느끼고 말을 흐렸다. 아니나 다를까, 키슈가 갑자기 콧잔등을 찡긋하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플럼?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키슈의 품에 안긴 브라우니가 고개를 쭉 빼고 다시금 아펠의 냄새를 킁킁거렸다. 그리고 녀석의 주둥이가 그의 팔찌를 향한 순간, 키슈가 플럼의 이름을 기억해 내는 데 성공했다.

    “아앗! 크레페 님이 프러포즈했다는 남자!”

    “뭣?! 우리 동생한테 뭘 해? 이 자식이 죽고 싶어서……!”

    갈레트의 언행이 일찍이 본 적 없을 정도로 거칠어졌다. 내가 진땀을 흘리며 갈레트를 막아섰다.

    “무슨 소리야! 프러포즈를 받은 게 아니라 내가 했다니깐!”

    “…….”

    “…….”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단순 실수라 하기에는 너무 치명적인 말을 한 기분이었다. 알게 모르게 이쪽을 흘끗거리고 있던 사람들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크바스가 웃음을 참느라 일그러진 표정으로 갈레트의 어깨를 잡았다.

    “학교는 졸업했어도 동생한테 집착하는 건 졸업 못 했구나. 참된 오빠의 도리로 미리 결혼식을 준비해 주는 게 어떠냐.”

    “겨, 결혼, 식……?”

    갈레트는 평소와 달리 말대꾸를 하지도 못하고 부들거렸다. 아무래도 폭풍 전야의 느낌이 들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팔에 아펠의 몸이 닿자, 그가 먼저 내 손을 잡았다.

    “갈까?”

    “으, 응?”

    아펠이 대답 대신 싱긋 웃더니 별안간 내 귓가에 손을 올렸다. 내가 몸을 움찔한 사이 그가 내 귀걸이를 붙잡고 입술을 달싹였다.

    순간 우리 발밑에 마법진이 떠올랐다.

    뭘 하려는 거지?

    “쉿.”

    아펠이 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끌며 다른 손으로는 검지를 제 입술에 대고는, 내 팔을 휙 당겨 인파 속에 몸을 숨겼다.

    “크, 크레페!”

    “뭐야, 얘네 어디 갔어?”

    얼떨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자 우리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내 귀걸이에 각인된 마나 패턴을 사용해 나한테까지 투명화 마법을 사용한 게 분명했다.

    “하하, 가끔은 이런 것도 좋잖아?”

    아펠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당황해 있던 나도 그의 미소에 휩쓸려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플럼 님!”

    저까지 놓고 가시면 어쩝니까, 하는 노기사의 외침을 뒤로하고 우리는 후다닥 멀어졌다.

    * * *

    북적이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우리는 인적이 드문드문한 샛길에 들어 멈췄다. 어차피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는 상태였기에 우릴 쫓는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힘들게 달릴 필요도 없었다.

    뭐, 너무 늦기 전에만 합류하면 되겠지.

    아펠이 내 손을 놓자 그림자가 돌아왔다. 마법이 풀린 것을 확인하고 주변을 살피자 보건실과 도서관이 보였다.

    덧붙여 보건실의 바로 뒤 건물은 예전 생의 내가 지내던 여자 기숙사였다. 오랜만에 접한 풍경에 감회가 새로워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아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만 빠져나온 게 걱정돼?”

    “응? 아, 아냐. 그냥…….”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대충 얼버무리자 아펠이 피식 웃고 지나간 화제를 꺼냈다.

    “그보다 아까 얘기는…….”

    - 무슨 소리야! 프러포즈를 받은 게 아니라 내가 했다니깐!

    ‘아까 얘기’라는 소리에 방금 전의 말실수가 퍼뜩 떠올랐다. 내가 뛸 듯이 놀라 먼저 사과했다.

    “미안! 그게, 오, 오해가 있던 거거든?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애써 외면하려 했던 얘깃거리에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내가 쩔쩔매는 모습이 우스웠는지 아펠이 풉, 웃음을 터뜨렸다.

    “오해가 아닌 게 더 좋은데.”

    “으, 응?”

    무슨 뜻이지?

    두 번쯤 꼬인 듯한 대답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 근처에서 큰 소리가 났다.

    “싫다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아펠을 당기고 나무 뒤에 함께 숨었다.

    보건실 건물에서 에클레어와 젤라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에 들은 큰 소리는 에클레어의 목소리로, 무슨 사정인지 젤라토는 그녀를 밖으로 끌어내는 중이었다.

    “싸우는 거 아냐?”

    “저 둘이? 아냐, 에클레어 언니가 젤라토 오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는 사람이야?”

    “응, 바니유 공작가의… 아.”

    아펠의 물음에 대답하다 말고 멈칫했다. 그의 말투에 은근히 묻어 나오는 의아한 기색을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으응. 남자 쪽이 갈레트 오빠랑 친구거든. 그니까 당연히 상대는 동생이겠지. 왜, 아까 덩치 큰 사람이 그랬잖아. 젤라토가 자기 여동생을 보러 갔다고.”

    “…….”

    아펠은 말없이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긴 내가 에클레어를 바로 알아본 게 이상하게 느껴질 법은 했다. 저 둘은 닮은 데가 없는 남매였으니까.

    그래도 내 말에 모순되는 건 없겠지, 싶어 나는 다시 그들 남매를 바라보았다.

    “흠, 보건실에서 나온 걸 보니 동생이 아픈가?”

    아니, 그럼 젤라토가 에클레어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끌고 들어가야지. 게다가 체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언니가 보건실에 갔다니, 그것도 이상하다.

    이번 생에선 인사 한 번 나눈 적 없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혹시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싶어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때 아펠이 다시 물었다.

    “저기가 보건실인 줄은 어떻게 알았는데?”

    “…….”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알아본 것도 모자라 처음 와본 학교의 구조까지 훤히 꿰뚫어 보다니.

    내 신분이 확실하지 않았다면 당장 수상한 인물이라고 신문을 당해도 할 말이 없었다.

    뜨끔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아무 의도 없는 질문이었다는 듯, 아펠은 도리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냐. 내가 이상한 걸 물어봤다. 그것도 성녀라서 아는 거지?”

    ‘원래 성녀는 다 아는 거야.’라는 말은 내가 여차할 때마다 쓰는 만능 변명이었다. 선수 치듯 말한 아펠이 내 실수를 눈감아 주겠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뭐, 그런 감상도 내가 찔리는 데가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만.

    “아프다고!”

    그때, 에클레어가 표독스럽게 눈초리를 치키고 다시금 큰 소리를 쳤다. 그 앞에 있는 것이 나였다면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을 테지만 젤라토는 의젓했다.

    “에클레어, 치유 마법사도 이상이 없다고 말했잖아. 핑계 대지 마.”

    그들의 대화에 내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가 제 오빠에게 저리 소리 지르는 것도 처음 봤지만, 젤라토가 에클레어에게 저만치 단호하게 말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뭔가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이 대회에서 1등이라도 하면 뭐가 달라져? 아니면 차라리 파혼을 할까?”

    파혼?!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귀가 쫑긋 솟았다. 놀라서 몸을 들썩이자 그 인기척을 느낀 듯 에클레어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나는 뒤늦게 나무 뒤로 머리를 쏙 넣었지만 아무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 같았다.

    “…갈게.”

    그녀가 젤라토의 팔을 뿌리치고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젤라토는 날 발견하지 못하고 혼자 한숨을 내쉬고는 무겁게 발걸음을 돌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이지.

    순식간에 휘몰아치고 사라진 폭풍을 목도한 기분이라 그저 얼떨떨했다.

    갑자기 파혼이라니, 그렇다면 에클레어는…….

    “크레페?”

    “으, 응?”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던 내게 아펠이 말을 붙였다.

    “나, 너한테 줄 게 있어.”

    “줄 거?”

    아무 예고나 전조도 없던 일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아펠이 품에서 꺼낸 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장신구였다.

    백금과 순금, 두 겹으로 늘어뜨린 줄에 아펠의 눈동자와 닮은 파란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가 번갈아 매달린 팔찌, 중간에 박힌 청보랏빛 보석까지.

    이, 이건 설마.

    차마 의미를 묻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던 중 아펠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이거 주러 들른 거야. 허락을 받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는데, 그래도 책봉식 전에 주고 싶었거든.”

    “허락? 무슨?”

    갑작스러운 사태에 뇌의 연산 속도가 한계치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정확한 의미를 물어보자 별안간 아펠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자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이 스쳤다.

    “그건 아직 비밀. 원래 이런 건 이때다, 하는 순간에 밝혀야 되잖아?”

    아펠이 눈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

    혹시 내가 저 말 할 때도 어디서 듣고 있었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도 모자라 진짜 청혼이라도 하듯 달콤한 표정이라니.

    이런 식으로 헷갈릴 만한 발언을 하는 게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이 정도면 내가 장난치지 말라면서 화를 내도 황족 모독죄는커녕 무죄 판결이 날 것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너무 잘생겨서 화가 안 난다.

    나 자신의 얼빠 기질에 질려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펠이 키득거리고는 손수 팔찌를 내게 채워주었다.

    “플럼 님! 어디십니까!”

    그때 글레이즈가 아펠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아, 잠깐 들른 거랬지.

    아무래도 책봉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 아펠도 나만큼 바쁜 일정을 소화 중인 모양이었다. 헤어짐을 직감한 내가 그에게서 받은 팔찌를 매만지며 퉁명스레 말했다.

    “너 진짜, 맨날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다가 훌쩍 사라지고… 너무한 거 아냐? 네가 조금만 못생겼어 봐, 나한테 뒤통수 세 번은 맞았을걸?”

    “아하하, 내가 세계관 공식 미남이라 다행이네.”

    “그, 그럼. 그렇고말고.”

    민망하긴 했지만 그런 티를 내면 지는 거다. 저 말을 먼저 한 게 나였으니까.

    부정하지 않는 나를 보고 아펠이 장난스럽게 웃은 후 글레이즈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멀거니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근데, 내가 이번 삶에서도 저 말을 했던가?

    “크레페에에!”

    긴가민가한 기분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갈레트가 나를 찾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상황을 보니 그가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듯 보였다. 조기 졸업생인 그를 알아본 친구들이 자꾸 말을 걸어서.

    오빠가 저 정도니, 대스타 브라우니를 안은 키슈는 말할 것도 없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눈앞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일행과 합류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잠깐만, 내가 지금 바빠서… 으으, 크레페에에! 뭐라고 안 할 테니 나와봐아아!”

    미안, 금방 갈게, 오빠.

    속으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린 내가 보건실로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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