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7)화 (167/181)
  • 167화 

    * * *

    “뭐야, 어디 갔다 왔어?”

    “오빠야말로 카눌레 오빠랑 무슨 얘기 했는데?”

    “그냥, 뭐…….”

    얼버무리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화는 잘 마친 모양이었다. 어딜 갔다 왔느냐는 물음에 억지로 둘러댈 필요는 없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카눌레와 헤어져 내가 연설하기로 되어 있는 야외 강당으로 직행했다. 시간이 촉박해서 나는 가는 길에 심호흡을 했는데, 도착하고 나니 애써 마음을 가다듬은 의미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성녀님. 뵙게 되어 정말 영광…….”

    “이쪽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부디 폐하께 좋은 말씀을…….”

    내가 학교 관계자들에게 신분을 밝히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갈레트는 정색하고 그들을 몇 번 저지했지만, 바로 얼마 전 성인이 된 그가 산전수전 다 겪은 귀족들을 제대로 통제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허허, 최연소 졸업생이신 갈레트 공의 소식에도 놀랐건만 이제 새로 나타나신 성녀님까지 쉬제트 가문의 일원이시라니, 백작 부부께서도 과연 신의 은총을 받은 모양입니다.”

    “쉬제트 백작가의 홍복이로군요!”

    “그뿐이겠습니까, 슈트루델 제국의 홍복이지요.”

    “하하, 맞는 말씀이십니다!”

    우리 빼고 저들끼리 행복해 보이는 대화가 이어졌다. 나와 갈레트가 시선을 교환하고 한숨을 삼켰다.

    “거기이이! 크레페 님께 무슨 실례입니까!”

    이럴 때만큼은 믿음직하기 그지없는 키슈가 돌아왔다. 그녀는 몰려든 사람들을 압도하는 산만함으로 순식간에 상황을 진정시킨 후, 브라우니를 안지 않은 손으로 내 어깨를 단단히 잡았다.

    “제가 단상 바로 밑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써 오신 연설문을 읽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아셨죠?”

    “네, 고마워요.”

    희미하게 남은 무대공포증 때문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안긴 브라우니의 등을 쓰다듬으며 숨을 고르고, 마지막으로 키슈와 갈레트에게 눈짓을 한 후 단상에 올랐다.

    “후우…….”

    연설할 내용을 적은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그 소리가 더욱 긴장을 부추겨 나는 잠깐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슈트루델에 나타난 소문의 성녀를 보려고 주의를 집중했고, 나는 소리가 완전히 잦아든 것을 느낀 후에 눈을 떴다.

    찬찬히 아래에 늘어선 사람들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은 금방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워낙 많고 햇빛이 강해 면면을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키슈는 파타슈를 발견했는지 점프하며 손을 흔들었지만.

    저런 게 사랑인가.

    반농담처럼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은 내가 접어놨던 연설문을 펼쳤다. 그 순간 종이 한 장이 내 손을 벗어나 휘날렸다.

    “앗.”

    내가 작게 입술을 달싹인 그때였다. 별안간 종이가 공중에 멈추더니 마술이라도 부린 듯 내 손으로 돌아왔다.

    “오오!”

    “마법인가?”

    “성녀님이시라 신의 힘을 제 손발처럼 사용하시나 봐!”

    신심이 깊고 설레발치기를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이 이것이 성녀의 기적이라면서 바람잡이 짓을 했다.

    내가 아직 어린 나이이기도 하고, 당연히 내가 마법을 사용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도 마법을 사용한 건 내가 아니었기에, 정작 기적을 일으킨 나는 얼떨한 얼굴로 객석을 두리번거렸다.

    이 기운은 설마…….

    설마설마하며, 나는 줄 맞춰 선 학생들 대신 외부인이 모여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선명히 구별되는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아펠? 아냐, 닮은 사람이겠지. 아펠이 여기에 왜 있겠어?

    나는 자문자답하며 소맷부리로 눈을 문질렀다. 그러나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분명 아펠이었다.

    저런 존재감의 미남이 또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확신하자 옆에 서 있는 노기사도 영락없이 황실 기사단의 단장 글레이즈로 보였다.

    아니, 대체 어떻게 나온 거지? 태자 책봉식도 얼마 안 남았는데…….

    “저, 크레페 님? 무슨 일 있으세요?”

    키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 여기는 단상 위, 성녀의 첫 공식 행사 자리였다.

    마른침을 삼켜 억지로 마음을 다잡고 준비해 온 연설문을 읽으려던 순간이었다. 키슈에게 안겨 있던 브라우니가 갑자기 품에서 뛰어내렸다.

    “아앗!”

    키슈의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브라우니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는 녀석이 내게 올 것을 예상해 얼결에 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녀석이 향한 곳은 내가 있는 단상이 아니라 객석, 정확히는 아펠 쪽이었다.

    “마, 망아지?”

    “인형 아니야?”

    “움직이잖아!”

    아차.

    당황한 것도 잠시, 짧은 순간 내 머리가 맹렬히 회전했다. 여기서 잘못 보이면 후폭풍이 휘몰아칠 게 분명했다.

    ‘데뷔탕트 이전에 성녀의 권위를 보일 수 있을 만한 연설 자리도 준비했습니다…….’

    얼마 전에 들었던 글레이즈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사람들이 놀라 굳어 있던 그때, 나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사이비 교주처럼 외쳤다.

    “예, 이것이 바로 신의 기적인 것입니다!”

    “와아아아!”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과 함께 브라우니가 대스타로 떠올랐다.

    * * *

    “우와, 봤어?”

    “너무 귀엽다, 인형인 줄 알았어.”

    “신수 페가수스라니! 역시 제국에 신의 가호가…….”

    일련의 사태 후 브라우니는 나보다 주목받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내게 쏟아지던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차라 다행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제대로 연설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기가 쪽 빨릴 수가 있나.

    나는 단상 바로 아래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 성녀의 권위라는 게 잘 드러났으면 좋으련만.

    “괜찮아?”

    “으응…….”

    갈레트의 걱정 어린 질문에 대답한 내가 부산스러운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야외 강당에 있던 연단이 치워지고 곧 대련이 펼쳐질 연무장으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키슈가 후다닥 달려가자 그녀의 빨간 머리를 알아본 인파가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 가운데에는 브라우니를 품에 안은 아펠이 서 있었는데, 브라우니는 그에게 얌전히 안겨 코를 킁킁대며 아펠의 냄새를 맡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휴, 죄송합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런대.”

    키슈가 브라우니의 콧잔등을 톡 치고 멋쩍은 표정으로 아펠에게 사과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나는 브라우니가 돌발 행동을 한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아펠이 차고 있는 팔찌엔 브라우니와 내 마나 패턴이 저장되어 있었고 브라우니는 그것을 감지할 능력이 있었으니까. 녀석이 아펠에게 호기심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페가수스인가요? 전설로 내려오는 것보다 훨씬 귀여운 모습이네요.”

    아펠은 빙긋 웃으며 키슈에게 브라우니를 돌려주었다. 브라우니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펠을 주시하고 있었다.

    꼬리가 살랑거리는 것을 보니 아펠에 대한 인상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다만.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신수를 안아볼 기회를 얻다니 제가 영광이죠.”

    아펠이 키슈의 사과를 넉살 좋게 받아쳤다.

    신수가 어쩌고 영광이 어쩌고 하는 녀석이 사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펜리르를 애완용 강아지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나는 내심 실소했다.

    그사이 브라우니를 안은 키슈는 금방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키슈와 인사를 마친 아펠이 내게 다가왔다.

    “성녀님, 오랜만입니다.”

    “예에…….”

    지친 채 의자에 늘어져 있던 내가 팔을 휘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레트는 나와 아펠의 눈치를 보며 인사를 막아야 할까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괜찮아, 친구야.”

    “친구?”

    갈레트는 브라우니가 스테이크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곤 고개를 기울였다. 마탑을 나가는 일이 거의 없던 내게 또래의 친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플럼 바클라와라고 합니다.”

    아펠이 자기소개를 했다. 내게 존대를 썼을 때, 아니 이런 인파에 섞여 있을 때 예상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외출한 모양이었다.

    “근데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질문 중간에 글레이즈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그의 눈치를 보느라 잠깐 말이 끊겼다. 아무래도 이 예기치 못한 외출로 인해 아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길까 봐 불만인 듯했다.

    “커스터드 축제에 가게 될 것 같다고 했잖아. 모처럼이니 나도 와봤지.”

    - 아니, 아무래도 커스터드 축제에 가게 될 것 같아서.

    그건 갈레트와의 대화에서 했던 말이었다.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다 듣고 있었구나.

    내가 뿌린 씨앗이라고 생각하니 화를 내기도 뭐하고, 날 쏘아보는 글레이즈를 쏘아보는 갈레트라는 먹이사슬도 신경이 쓰여서 난 그냥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야! 너, 너! 네가 정말 그… 그거냐?”

    키슈에게(정확히는 브라우니에게)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크바스가 다가왔다. 차마 성녀라는 단어를 못 꺼내는 걸 보니 카눌레와 같은 현실 부정 단계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성녀님이십니다. 말을 조심해 주시지요.”

    갈레트가 내 호위 기사라도 된 듯 크바스를 나무랐다. 그의 눈빛은 엄하다기보다 우쭐대는 듯했는데, 물론 크바스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저런 꼬꼬마가 무슨 성녀라는 거야! 우리 집에도 하늘 나는 망아지는 열 마리쯤 있거든?”

    그가 어린애들도 안 할 것 같은 말을 허세랍시고 쏘아대고는 아차, 하며 한 손으로 뒤통수를 덮고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쯤 되면 끼어들어야 할 사람이 없다.

    “젤라토 오빠는요?”

    “아, 여동생 보러 갔다 온댔어.”

    순순히 대답한 크바스가 뒤늦게 민망함을 느낀 듯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그가 한풀 꺾인 투로 턱짓했다.

    “…이쪽 꼬맹이는?”

    “플럼 바클라와라고 합니다만, 저 역시 아직 소개를 듣지 못한 것 같군요.”

    “크바스 데 오크로시카다. 바클라와는 어디 붙은 지방이야?”

    “크흠!”

    내가 크게 헛기침을 해 주의를 환기시켰다. 크바스를 위한 짓이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듯했다.

    “오크로시카 후작가라면, 혹 이번에 황실 기사단에 입단이 결정된…….”

    글레이즈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크바스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우쭐대며 턱을 치켜올렸다.

    “여기 기사님께서 내 소문을 들은 모양이군! 예,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떠오르는 신예 크바스란 말이죠!”

    “…….”

    하얗게 센 글레이즈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다시금 말하건대 그는 현 황제의 오른팔이자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크바스를 못 알아보다니, 아무래도 황실 기사단 입단 절차에는 면접이 없었던 모양이다.

    미래의 상사에게 찍힌 크바스에게 잠시 위로의 묵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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