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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6)화 (166/181)

166화 

“아휴, 무슨 얘기 중이셨길래 이렇게 급해요?”

우리에게 휩쓸려 덩달아 달린 키슈가 숨을 고르고 물었다.

“그보다 키슈 님, 계속 헷갈릴 거면 그냥 크레페 님이라고만 불러주세요.”

“하핫, 그럴까요?”

키슈가 멋쩍게 웃었다. 저 표정을 보니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노렸던 건가, 하는 찜찜한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무튼 카눌레 님이 대기 중인 천막은 저거래요. 저는 파타슈를 보러 갈 건데…….”

키슈가 손가락을 뻗어 천막을 하나 가리키고는 내 눈치를 보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오빠랑 있을 테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편히 다녀오세요.”

연설까지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기에 카눌레와 파타슈 둘 모두와 얘기하기는 촉박했다. 내가 그렇게 운을 떼자 키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에,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봬요!”

그녀가 제 품에 안긴 브라우니의 앞발을 들어 흔드는 시늉을 하고는 함께 멀어졌다.

* * *

대기실을 겸한 천막은 내가 연설할 야외 강당 뒤쪽, 제2 연무장에 늘어서 있었다. 그중 키슈가 알려준 천막 앞에 멈춰선 나는 긴장되는 마음에 갈레트에게 말을 붙였다.

“대회에서 카눌레 오빠를 보는 건 처음인데, 잘하겠지?”

“알아서 하겠지.”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대답한 갈레트가 앞장섰다.

“카눌레, 우리 들어간다.”

“어어.”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대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허락을 받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헝겊으로 검을 닦고 있던 카눌레가 우리를 확인하고는 얼떨떨한 얼굴로 행동을 멈췄다.

“뭐야, 둘이 여길 왜…….”

역시 우리가 누군지도 모르고 들어오라고 했던 거였나.

나는 조금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왜냐니, 오늘 내가 온다는 얘기 못 들었어? 내가 성녀잖아.”

“크악!”

별안간 귀신 이야기라도 들은 듯 카눌레가 몸서리를 한 번 쳤다. 놀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연신 눈을 피했다.

“아니, 알고는 있었는데… 으, 젠장,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아니, 됐다. 어릴 때부터 괴짜인 줄은 알았다만. 설마… 아니다.”

너무 횡설수설이라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아무튼 내가 성녀라는 사실이 그의 발작 버튼을 눌렀다는 건 알겠다.

내적 갈등과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지는 태도를 보니 이 화제를 이어가는 건 무리가 있을 것 같았기에 나는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보다 1회전 상대는 누구야?”

“쯧, 어차피 이길 텐데 상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야.”

카눌레가 언짢아하는 말투로 대회용 가검을 마저 손질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얼굴에는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는 척 뻔뻔스레 시치미를 떼고 가방에서 편지 한 장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나, 에이미한테서 편지 받았는데.”

웬 편지 얘기냐는 듯 카눌레가 날 쳐다보았다. 내가 거두절미하고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요즘 카눌레 도련님께선 축제를 맞아 검술에 열중하고 계세요. 1회전에서 파타슈 님을 상대하게 됐다고, 절대 지기 싫으니까 특훈을 해달라면서 백작님께 먼저 요청했다나 봐요.”

“야!”

카눌레가 갑작스레 고함을 지르며 편지를 가로챘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모습에 아무 반응도 않고, 나는 가방에서 두 번째 편지를 꺼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무튼 허구한 날 아빠한테 두들겨 맞고 침대에서 끙끙거리는 게 보기 불쌍할 지경이지 뭐야. 한두 번 진다고 해서 보기 부끄러울 것도 없는데, 파타슈가 그렇게 얄미운가?”

거기에서 다시 카눌레에게 편지를 빼앗겼다.

“이건 또 누구야!”

“엄마다, 이 불효자식아.”

갈레트가 손날을 세워 카눌레의 머리를 내리쳤다. 다급히 편지의 발신인을 찾아보던 카눌레가 윽,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조금 아프다고 그의 더러운 성질머리가 고쳐질 리는 만무했다.

“야, 너, 이런 건 왜 가져왔어!”

“히히.”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웃음.

내 반응을 본 카눌레가 울컥 얼굴을 구겼다.

“으이그, 적당히 좀 해라. 진짜 겁나서 그래?”

갈레트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뒤에 붙은 질문에 카눌레는 내게 화내려던 것도 잊고 대답했다.

“하, 하, 하. 내가 설마 1학년 상대로 지겠냐?”

음, 웃는 얼굴이 굳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기엔 카눌레가 너무 불쌍하니 참기로 할까.

놀리는 게 너무 심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저번 생에서도 카눌레는 파타슈에게 질까 봐 꽤나 걱정하고 있었다. 학교에선 거의 남처럼 지내던 내게 먼저 와서 파타슈의 마나에 대응할 방법을 물어봤을 정도로 말이다.

“크레페, 잠깐 나랑 카눌레 둘이 얘기 좀 할게.”

“응?”

잠깐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놀라 되물었다.

“형이?”

카눌레도 의심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응. 부탁해.”

“아, 알았어. 이 앞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얘기하고 나와.”

갈레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는 얼떨떨하게 천막을 나갔다.

하지만 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야?

나는 짐작 가는 바가 없어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단순한 착각은 아니었던 듯, 조금 먼 곳에 보이는 보건실 건물 코너에서 누군가 날 보다 말고 슥 몸을 감췄다.

꼭 나를 염탐하는 것처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에 집중했다.

성녀의 이름이 알려졌으니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를 향한 주목도가 올라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을 아는 건 몇 명 되지 않았다. 물론 내가 어릴 때부터 마탑에서 두문불출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은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같은 사람이 같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파타슈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에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

분명 낯설었지만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인상착의이기도 했다.

“…누구지?”

알 듯 모를 듯 한 느낌이었다. 내가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쭉 내밀자 그가 어색하게 눈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니 감시나 미행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 같진 않았다.

나이도 나보다 겨우 두세 살쯤 연상인 것 같고.

나는 기시감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대를 확인하러 걸음을 뗐다. 그는 내가 가까워져도 태연한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제게 직접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저기…….”

“예, 예?”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날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의 금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나는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애초에 내가 기시감을 느낄 만한 바움쿠헨인이 몇이나 되겠는가.

나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한 발을 뒤로 물린 채 살짝 무릎을 굽혔다 폈다.

“린처 토르테 메드 플뢰데 님, 처음 뵙겠습니다.”

엄마를 암살하려 했던 바움쿠헨의 후작 뢰드그뢰드.

그의 친아들인 린처는 지난 생에서 커스터드에 입학하지 않았다. 때문에 내가 그와 만난 것은 성인이 된 후였다. 내가 아직 어린 그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쉬제트 영애.”

린처가 부정하지 못하고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바움쿠헨이 아닌 슈트루델의 예절로, 이곳의 귀족인 나를 존중하는 표현이었다.

“제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아뇨, 그저 성녀가 공표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에 맞지 않는 호기심이 생긴 것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

나는 그 사과에 대해 어떤 반응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저를 질책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례했습니다. 그럼…….”

“플뢰데 후작님께서 제 감시를 지시하시던가요?”

“…….”

직설적인 질문에 린처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긍정이라는 걸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저번 생에서 린처가 뢰드그뢰드에게 입학 허락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최연소 합격자’라는 타이틀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합격자의 입학 포기라니, 커스터드의 명성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랬던 린처가 이번엔 갈레트와 같은 나이에 입학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최연소 합격자가 되었다. 우리 아빠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진 뢰드그뢰드가 갈레트와 비교하며 그를 얼마나 들볶았을지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이제 갈레트는 최연소 졸업자이자 마법사가 된 상태였다. 아마 린처가 그만큼의 업적을 이루기는 불가능하리라.

이쯤 되면 린처는 이미 눈 밖에 난 자식이었다. 그에게 남은 가치는 학교에서 갈레트나 카눌레의 동향을 파악해 후작에게 보고하는 것뿐일 것이다.

날 감시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겠지.

하지만 주변을 왕래하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그는 끝내 확답하지 않았다. 대신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영애께서 저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성녀이시기 때문입니까?”

나는 통성명도 없이 린처의 이름을 부른 것도 모자라 부친이 그에게 무엇을 지시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놀라움보다 무슨 이유에선지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성녀라서?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디몬의 서고에는 물론 린처의 소예언서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것을 읽기 전에도, 나는 린처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너무 낮추지 마세요. 린처 님은 미련하지도, 둔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도 타인의 타고난 능력을 문젯거리 취급할 수는 없는 법이죠. 저는 그저 린처 님께서 너무 늦기 전에 그 사실을 깨달으셨으면 합니다.”

평소 뢰드그뢰드와 자신의 관계를 아는 듯이 말하자 린처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나는 그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입을 열었다.

“내 자식 같은 존재야, 너희가 불행하길 바란 적은 없단다.”

“…예?”

갑작스레 달라진 말투를 듣고 당황한 듯 린처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은 후, 오래전 들었던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증명할 방법이 이뿐이라니 나 역시 아쉽구나. 이제 네가 원하던 이야기를 써보아라. 그리고, 그간의 일은 한낮 꿈을 꾼 듯 잊거라.”

말을 마친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따가운 햇빛과 사람들의 분주함이 새롭게 느껴졌다.

내게 그 말을 해줬을 때 디몬은 이미 알고 있던 거겠지.

린처가 나와 닮았다는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이었는지도.

나는 햇살을 받아 따스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린처를 향해 웃어주었다.

“운명과 예지의 신 앞에 무엇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예에…….”

그가 애써 마주 웃었다. 표정을 보니 그에겐 내 말의 의미가 아리송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크레페! 어디 갔어!”

때맞춰 갈레트가 날 찾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을 끌면 걱정을 살 게 뻔했기에, 나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금방 걸음을 돌렸다.

“플뢰데 후작님께 다음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로테 그뤼체, 정말 맛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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