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키슈가 브라우니를 데려올 때는 대부분 파타슈와 함께였다.
설마 내일이 축제인데 파타슈를 데려온 건가?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문을 열자마자 키슈의 어깨 너머를 보려고 까치발을 했다.
“아, 파타슈는 두고 저만 왔어요. 걔는 내일 준비로 바쁘잖아요.”
“저도 바쁜데요…….”
설마 몰라서 하는 말인 것 같지는 않고, 혹시 급한 용건이라도 생겼나 싶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키슈는 웃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알죠! 크레페 님도 참! 아니, 성녀님도 참!”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좋은 일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평소보다 하이 텐션인 그녀를 따라가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키슈가 별안간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보여드릴 게 있어요!”
그녀의 기세에 놀라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
키슈는 내 반응에 아랑곳 않고 손을 뻗어 브라우니를 데려가더니,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비어 있는 티 테이블에 녀석을 내려놓았다.
“앉아!”
그녀의 단호한 명령에 브라우니가 강아지처럼 뒷다리를 접고 철퍼덕 앉았다.
“엎드려!”
브라우니가 납작하게 엎드렸다.
“손!”
브라우니가 키슈의 손에 앞발을 올렸다.
키슈가 의기양양해하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이게 왜요?”
“후후, 아직 모르시겠어요?”
“브라우니가 알고 보니 말이 아니라 개였다고요?”
“파하핫! 농담도!”
호탕하게 웃은 키슈가 브라우니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짐짓 진지한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았다.
“커져!”
“삐!”
브라우니가 신난다는 듯 발을 잠깐 구르고 테이블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바닥에 닿은 녀석의 발굽은 순식간에 큼지막해져 있었다.
내 키만큼 거대한 브라우니.
녀석의 장성한 모습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지금껏 봤던 것과 달랐다.
나나 파타슈의 도움 없이 혼자 거대화했다니!
“어때요?”
놀란 내 표정을 본 키슈가 어깨를 펴고 우쭐해하며 물었다.
“대단하군.”
문 너머에 어느샌가 피오르가 와 있었다. 그는 키슈의 방문 소식을 알고 있었던 듯 태연히 걸어와 브라우니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브라우니의 신경은 온통 내게 쏠려 있었다. 녀석이 거대화한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듯 내게 이마를 문댔다. 그 덩치에 떠밀려 비틀거리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그래, 착하다.”
역시 덩치만 컸지 어린애라니까.
나는 신기함 반 기특함 반으로 브라우니의 머리와 어깨를 툭툭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오랜만에 만난 브라우니와 감동의 해후를 즐기던 그때, 피오르가 혀를 차고 말했다.
“하지만 문도 안 닫고 거대화를 시키다니 너무 조심성 없잖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왔으면 어쩔 뻔했냐.”
“아, 그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제 발표해도 괜찮댔거든.”
키슈가 빙긋 웃으며 날 쳐다보았다.
“그래서 데려온 거예요. 내일 크레페 님이, 아니 성녀님이 성녀라는 걸 증명하는 데 이 녀석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리고, 이왕이면 내일 저랑 같이 출발하면 좋잖아요?”
키슈의 세심함이 고마웠지만,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
“키슈 님이랑 같이요?”
“왜, 성녀로 참석하는 첫 공식 행사잖아요! 수행원이 많으면 좋죠!”
키슈가 해맑게 웃었다.
“아니…….”
나는 말을 흐리고 피오르의 눈치를 보았다. 키슈가 너무 해맑아서 뭐라 하기가 난감했다.
그녀는 원래부터 공적인 자리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마법 서약까지 한 인재라는 것과 별개로, 키슈가 공식 행사에 나설 때마다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저번 생에 키슈를 처음 만난 커스터드 학교 연설 자리에서도 그랬지, 아마.
“네가 못 미더워서 그러는 거잖아.”
피오르가 어련하다는 듯 키슈에게 눈치를 줬다. 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순간 긴장이 풀렸지만 상황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뭐?! 크레페 님, 아니 성녀님이 그러실 리 없잖아! 나랑 얼마나 오래 있었는데. 게다가 난 크레페 님, 아니 성녀님을 옛날부터 며느릿감으로 찜해놨단 말이야. 나중엔 한 가족이 될 사람한테 그런 이간질은…….”
“저, 잠시만요. 무슨 말씀이시죠?”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에 내가 슬그머니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키슈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모르셨어요? 성녀도 결혼은 가능하잖아요. 마법 서약과 달리 성녀는 비자발적인 거고, 디몬 님의 종이라고 해도 사랑할 자유까지 박탈당할 수는 없으니까.”
사랑할 자유라니, 낯부끄럽지만 키슈다운 어휘 선택이군.
“아니, 그거 말고요. 일단 파타슈는 저한테 아무 감정도 없거든요.”
“게다가 성녀님께는 이미 다른 남자가 있고.”
“뭐얏?! 어떤 놈이야!”
키슈가 피오르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하지만 놀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저, 저, 저, 저한테 다른 나, 남자가 있다고요?”
“…제가 진짜 모를 줄 알았습니까?”
혀까지 깨물 뻔했지만 피오르는 한심하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감히 성녀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 보이다니! 하고 경을 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플럼이 차고 있던 팔찌, 제가 성녀님께 드린 거잖습니까. 어쩐지 바로 쓰지도 않더니 설마 프러포즈용으로 준비한 예물이었을 줄은.”
어디까지 진담인지 모를 말에 나는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었다.
“지, 진짜예요?”
키슈가 토끼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나와 피오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삐유우.”
브라우니가 아무도 제게 관심이 없자 금방 거대화를 풀고 내 품에 파고들었다.
“그, 그래, 브라우…니?”
기회다, 싶어 내가 브라우니를 품에 안고 딴청을 피우려는데 별안간 팔뚝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뭔가 싶어 살피자 브라우니의 꼬리가 젖어 있었다.
스튜 냄새?
나는 책상에 올려놓았던 스튜 그릇이 넘어져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책상 위는 거대화한 녀석의 꼬리가 닿기 딱 좋은 높이였다.
“뭐야, 플럼이 누군데?”
브라우니를 연구하느라 마탑에 올 일이 거의 없던 키슈가 피오르에게 재차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피오르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하긴,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들여보낸 인물에 대한 정보를 더 알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플럼이 누군데에에!”
키슈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피오르의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브라우니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자 방 안 가득 맛있는 냄새가 퍼졌다.
나는 이 사태를 어디부터 풀어가야 할지 막막한 기분에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개판이군.
* * *
“괜찮잖아! 수행원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키슈가 했던 말과 똑같은 핑계로 갈레트가 따라붙었다. 꾸역꾸역 과제를 완수한 후였기에 피오르도 그를 막아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며칠 밤을 새운 듯 초췌한 몰골의 갈레트를 차마 내칠 수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번 연설에는 나와 갈레트, 키슈(와 브라우니)가 함께하기로 했다.
일이 많아 마탑을 비울 수 없던 피오르는 제발 이번엔 아무 사고 치지 말라며 키슈에게 몇 번이나 당부를 하고 공간 이동 포트를 작동시켰다.
“그럼 전 파타슈랑 카눌레 님 대기실을 알아보고 올게요.”
커스터드에 도착하자마자 키슈가 씩씩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생기 반만큼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네에…….”
내가 메슥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대답하자 키슈가 아차 싶은 듯 내 어깨를 잠깐 도닥여 준 다음 자리를 비웠다.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도 공간 이동용 포트와 리시버가 있긴 했지만 학생이 아닌 외부인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다.
별수 없이 마탑의 포트로, 피오르와 키슈의 마나를 써서 이동한 나는 아직도 마나 혼합에 의한 멀미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갈레트가 나를 부축해 근처 벤치에 앉혀 주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 메슥거리던 속이 진정되자 그제야 주변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운동장과 야외 강당, 술렁이는 인파와 익숙한 건물까지.
와, 이게 얼마 만이야.
“이제 좀 괜찮아?”
“응? 으응.”
괜찮다는 대답을 들은 갈레트가 그제야 허리를 펴고 섰다. 내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보니, 그 역시 이곳에 온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갈레트가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뭐라 거들어주려던 그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게, 왜 벌써 돌아왔냐? 마탑에서 잘렸어?”
예의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말투. 직접 대면하는 것은 오랜만이었지만 그 말과 목소리만 들어도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대놓고 불쾌함을 내색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곧 환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바스의 옆에 선 젤라토가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젤라토 오빠!”
“아, 크레페! 아니, 쉬제트 영애라고 불러야 하는구나.”
“헤헤, 아니에요. 오빠 친구분이신데 그냥 크레페라고 하셔도 돼요.”
“그럴까?”
젤라토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자 갈레트가 들으라는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무튼 별걸 다 견제하는구만.
“쉬제트 영애? 아, 옛날에 본 그 도토리군. 엄청 컸네. 주로 세로보단 가로가.”
잠시 조용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크바스가 시비를 걸었다. 나를 이용해 갈레트를 도발하겠다는, 뻔히 보이는 개수작이었다.
하지만 젤라토는 내가 거기 발끈할 거라고 생각한 듯 먼저 끼어들어 덧붙였다.
“자기랑 똑같이 입학해 놓고 갈레트가 먼저 졸업해서 삐친 거야.”
“삐쳐?”
크바스가 부리부리하게 뜬 눈을 치켜떴다. 젤라토 덕분에 화살이 그쪽으로 향하긴 했지만 갈레트의 표정에는 아직 불쾌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내가 손을 뻗어 갈레트를 저지하고 크바스에게 물었다.
“덩치… 아니, 크바스 님은 황실 기사단 지망이시죠?”
“지망이라기보단 입단 확정이지. 왜, 다시 보이냐?”
“그럼 황족분들께 잘 보여야겠네요?”
“그렇지?”
크바스가 이상함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 서 있던 갈레트가 웃음을 참느라 이상해진 얼굴로 기침하는 척 고개를 돌렸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젤라토가 다시 중재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들었어? 오늘 연설을 맡은 게 슈트루델에 나타난 성녀라던데. 아마 그분도 황족과 연이 깊을 거야. 너 잘 보여야겠다.”
“푸후훕!”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한 갈레트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뭐, 뭐야?”
이쯤 되자 크바스도 뭔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언제 알려줘야 할까 고민하는 못된 누나가 된 기분으로, 은근한 미소를 띠고 크바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크레페 님! 아니, 성녀님! 아니, 크레페 님!”
그때 혼란스러운 호명과 함께 키슈가 돌아왔다. 크바스가 눈을 껌뻑이며 나와 키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방금 뭐라고?”
“글쎄?”
갈레트가 시치미를 뚝 떼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 뻔뻔한 태도에 풋, 웃음을 터뜨린 내가 갈레트의 팔을 당겨 키슈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원래 이런 건 이때다, 하는 순간에 밝혀야 하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