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4)화 (164/181)

164화 

갈레트는 덩달아 웃지도 않고 재차 대답을 구했다. 어떻게든 이 주제를 이끌어나가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서로 자기 할 말만 하게 될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기로 했다.

“몰라, 그냥 처음부터. 나는 성녀잖아.”

“…….”

하지만 그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갈레트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렇게 혼자 모든 걸 감당하려고 했어?”

갈레트가 날 볼 때 이만큼 진지한 얼굴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미소를 지운 내가 어색함 반, 긴장 반으로 그의 눈치를 보았다.

갈레트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아, 아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치키고 그가 원하는 대답을 꺼냈다.

“그때 오빠는 아직 어렸잖아. 내가 엄마를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가 안 되면, 오빠가 다 자기 책임이라고 느낄까 봐 그랬어.”

“…날 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내가 카눌레인 줄 알아?”

갈레트가 불퉁하게 말했다. 표정이 어릴 때와 똑같아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눌레 오빠는 잘 지내지?”

“잘 지내겠지.”

말하는 걸 보니 같은 학교 기숙사에 살면서도 서로 얼굴 볼 일이 잘 없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둘은 학년도 다르고 지망도 다르니 이상할 건 없지만…….

“그러고 보니 며칠 안 남았는데, 구경 갈 거야?”

“응?”

“커스터드에서 열리는 축제 말이야. 이번에 카눌레가 연회 내내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 기억나지? 이번에야말로 크바스 형을 이기겠다고… 아, 크바스는 기억나?”

갈레트가 말을 멈추고 물었다.

그의 기억에 나와 크바스가 만난 건 내가 마탑에 들어오기도 전, 단 한 번뿐일 것이다.

이번에 나는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고, 용건이 있어 저택에 들를 때도 외부인이 없는 날짜에 맞춰 가곤 했었으니까.

이번 갈레트의 성인식 때도 마찬가지였다. 연회는 호화로웠고 당연히 초대객도 많았다고 들었지만 내가 들른 날은 예외였다.

연회 둘째 날까지는 또래의 학교 친구들, 셋째 날 이후부터는 부모님의 지인들이 연회장을 채웠다고 했던가?

당연히 내 순번은 그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 연회 막바지 때였다.

“응, 기억나. 그 덩치 말하는 거지? 황실 기사단에 들어온대?”

“맞아, 그렇긴 한데…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어?”

설마 내가 알 줄은 몰랐다는 듯 갈레트의 표정이 얼떨해졌다. 크바스가 그렇게 유명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축제가 언젠데?”

내가 웃음기를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마 일정이 빡빡해서 직접 가기는 힘들겠지만, 일이 끝난 후에 카눌레의 소감 정도는 들어볼 생각이었다.

“열흘 정도 남았을걸.”

열흘?

‘연설은 오늘부터 열흘 후, 데뷔탕트는 그로부터 보름 후입니다.’

글레이즈의 말이 뇌리에 스쳤다.

‘연설 자리도 준비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그곳에서 아군이 될 만한 또래 귀족들과 친분을 쌓는 것도 좋겠군요.’

“…….”

“왜 그래?”

“아니, 아무래도 커스터드 축제에 가게 될 것 같아서.”

글레이즈가 왜 또래들과 친분 운운했는지 알겠다. 내 연설 자리라는 게 커스터드 귀족 학교의 축제 개회식이구나.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내가 해탈한 얼굴을 했다.

갈레트는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이내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그보다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이라고?”

잠깐, 그 얘기는 아까 끝난 거 아니었어?

튀어나올 뻔한 질문을 억누르고 마른침을 삼켰다.

알리고 싶진 않았다는 말은 비단 갈레트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펠에게도 내 상황을 알리고 싶지 않긴 매한가지였다.

또 나를 위해 손에 피를 묻힐까 봐.

갈레트의 어깨 너머로 아펠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아펠은 고개를 갸우뚱했을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화제가 한 번 바뀌었던 이후라 뢰드그뢰드 후작의 이름이 나온 이유가 뭔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크레페?”

“으, 응.”

갈레트가 날 더 이상하게 보기 전에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처리 방식이 어색해 보이겠지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고, 이대로 넘어갈 마음은 없으니까.”

“내가 도와줄 건?”

갈레트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아빠는 변방에서 돌아왔고 엄마도 멀쩡히 살아 있다. 갈레트의 어깨에는 책임도 부담도 없었고, 아빠와 갈등도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나는 정해진 운명을 차근차근 거스르고 있었다.

“오빤 그냥 건강하면 돼.”

내가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갈레트는 말없이 손을 들었다. 숨이 막히도록 날 껴안아도 이상하지 않을 타이밍에, 그의 손은 내 뺨으로 향했다.

“…또 시쟈기야?”

양 볼이 갈레트의 손아귀 사이에 끼인 채라 발음이 샜다. 부루퉁하게 말하자 갈레트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내 삶의 낙이라는 거 알잖아.”

못마땅한 기색으로 반눈을 뜨자 금방 손이 떨어졌다. 내가 얼얼한 뺨을 문지르는 동안 갈레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아직 내가 못 미더운 모양이니 별수 없지. 일이 많다는 것도 사실 같고.”

내용은 또 언제 본 건지, 그는 케이크 옆에 펼쳐진 내 공책을 눈짓한 후 문가로 향했다. 아무래도 내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짜 걱정할 거 없는데.

그렇게 말해봤자 곧이곧대로 들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나는 그냥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무튼 오느라 고생했어. 푹 쉬어, 알았지?”

그리 말하며 갈레트의 등을 두드리자, 그는 귀여운 강아지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내 어깨를 꽉 껴안고 아기 어를 때처럼 한참 우쭈쭈 소리를 낸 다음에야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안 들켰겠지?”

“아마.”

아펠이 짧게 대답하고 곧바로 물었다.

“뢰드그뢰드 후작 이야긴 뭐야?”

“…남의 프라이버시 캐묻지 말구 너도 돌아가.”

물어볼 만한 다른 얘깃거리도 많을 텐데 하필이면 뢰드그뢰드라니.

대충 얼버무릴 수도 없는 화제를 귀신처럼 집어낸 촉에 내심 놀랐지만, 그보다는 당장의 피곤함을 먼저 해결하고 싶었다.

나는 지친 얼굴로 아펠의 등을 떠밀었다. 그의 눈에도 내가 많이 바쁘고 피곤해 보였는지 아펠이 순순히 창가로 향했다.

“알았어, 돌아갈게.”

대답을 들은 내가 덧문을 열고 주변에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내가 괜찮다고 신호한 후에도 아펠은 곧바로 나가지 않았다.

“왜?”

아직 할 말이 남았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자 아펠은 갑자기 두 손을 들어 내 볼을 감쌌다. 드라마 같은 곳에선 이대로 키스신이라도 나왔겠지만, 그는 말없이 내 양 볼을 살짝 눌러보았다.

말랑.

“…얌마.”

“하하, 미안. 나도 해보고 싶었어.”

갈레트가 하는 걸 보고 배운 모양이었다.

휴, 아무튼 애들 앞에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니까.

“질투 나니까 너무 그러지 마.”

“응?”

딴생각을 하느라 제대로 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하지만 아펠은 설명 대신 고개를 젓고 창틀에 발을 올렸다.

나는 얼떨떨하게 손을 들어 그를 배웅했다. 공간 이동 포트가 있는 위층으로 훌쩍 올라간 아펠의 모습이 금세 사라졌다.

질투라니, 설마 오빠한테 질투했다는 건가?

뒤늦게 맥락을 이해하고 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에이, 설마!”

스스로 한 생각에 민망해져 고개를 세게 털었다.

이번 생에 나는 고백은커녕 펜리르의 팔찌를 선물받은 적도 없었다. 질투라고 해봤자 친구로서 질투했다는 말이겠지.

게다가 저번 삶을 떠올려 보면 애초부터 아펠의 호감은 나에 대한 예지몽을 꾼 게 원인이었고, 이번엔 그런 얘기도 못 들었…….

‘있잖아, 크레페. 나 요즘 이상한 꿈을 꾸고 있거든.’

그러고 보니 피오르가 오기 직전 아펠이 그런 말을 했는데.

무슨 꿈을 꿨는지 물어보려다가 타이밍을 놓쳤던 게 떠올랐다.

“…민망하니 그냥 넘어가는 걸로 하자.”

혼잣말로 중얼거린 내가 홧홧해진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 다시 찾은 커스터드 】

커스터드 귀족 학교의 축제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원망할 여유도 없이, 나는 방금 막 완성한 연설문을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똑똑.

“네에.”

노크 소리를 듣고 창문 너머를 보니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누군지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는 대답을 하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성녀님.”

“앗! 어서 오세요, 언니. 피오르 선생님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에서 식판을 받아 들었다.

그녀는 나를 빼면 마탑에서 제일 어린 마법사였다. 그래도 띠동갑이 넘는 나이차였지만, 아무튼 나는 그녀를 친언니처럼 따랐고 그녀 역시 날 귀여워해 주고 있었다.

가끔 특식으로 나오는 푸딩을 내게 양보해 줄 정도니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는 지금까지와 달랐다.

“어, 언니라니 부담스럽습니다. 부디 편히 불러주세요.”

내 호칭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다 먹으면 밖에 내놓을게요.”

“예, 이따 찾으러 오겠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나와 눈도 맞추지 못한 채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오랫동안 날 몽블랑의 양녀로 알고 있었을 테니 그들도 충격이 크긴 할 거다. 하지만 불과 열흘 전까지는 같이 시시덕거리던 사이였는데, 이건 내 예상보다 정도가 심했다.

‘마법사가 성직자라 그런가? 아니면 황제가 직접 성녀라고 공표해서? 아직 시간이 충분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다소 착잡한 마음으로 책상에 식판을 내려놓고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 창문을 통해 식당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했다.

아마 오빠도 지금쯤 밥을 먹고 있겠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갈레트를 떠올리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비록 과제를 다 끝낼 때까지 날 보러 오는 것을 금지당한 처지긴 했지만 말이다.

갈레트가 나를 너무 애 취급 하면서 달라붙으면 성녀의 권위가 떨어질 거라고 했던가.

피오르의 말을 떠올리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고 보면 마법사들이 날 너무 불편해하는 것 같으니 당분간 방에서 식사하는 게 어떻겠냐고 권한 것도 피오르였지.

야속하긴 해도 냉정히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말해준 덕분에 연설문을 완성한 걸지도 모르고.

이런저런 딴생각을 하며 스튜를 열심히 퍼먹고 있던 그때, 위층에 누군가 이동 마법을 사용해 도착한 것이 느껴졌다. 아펠의 마나는 아니었다.

혼자만의 식사가 무료하기도 했고 이동 마법이 쉽지 않은 만큼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어차피 보이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삐유?”

“…설마.”

설마, 하면서도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녀석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브라우니?”

“삐익!”

대답 같은 콧소리와 함께 창문으로 인형 같은 망아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얼떨떨하게 녀석을 품에 안자, 곧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우당탕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 저 왔어요오.”

“키슈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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