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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3)화 (163/181)

163화 

내가 근 10년간 그의 곁에 머물며 친구로서 위안을 줬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펠이 부모와 오해를 풀고 그만한 애정을 받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이제야 평범한 열다섯 살짜리 소년 같았다.

가만히 아펠을 마주 보던 내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응. 그래야지.”

역시 지금이 좋다.

“하지만 나, 오늘은 너랑 못 놀아줘. 갑자기 일이 몰렸거든.”

“내 책봉식 때문에?”

아펠이 내 공책에 빼곡하게 적힌 의례 순서를 본 듯 되물었다.

“그래도 보름도 훨씬 넘게 남았잖아. 오늘 밤만이라도 좀 쉬면 어때?”

아펠이 은근히 권하며 의자를 빼주었다.

내가 픽 웃고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자리에 앉자 그도 제 몫의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챙겨 온 종이 상자를 자연스레 펼쳤다.

남의 방에 찾아온 것치고는 꽤나 천연덕스러운 행동이었다. 물론 그가 나를 위해 과자나 디저트를 가져온 게 처음이 아니라 그렇겠지만.

아마 내가 오동통해진 원인의 7할 정도는 아펠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나머지 3할은 운동 안 한 나 때문이겠고.

“…….”

하지만 가난한 마탑에서 나올 리 없는 고급 디저트를 내가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꿀꺽, 저절로 군침이 넘어갔다.

포장이랑 크기로 예상하긴 했지만, 오늘은 조각 케이크구나.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초콜릿 아이싱과 달콤한 향기, 브라우니만큼 진한 갈색 빵 사이에 촉촉하게 스며든 잼, 거기에 끼얹어진 휘핑크림까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돌려보내려던 나는 결국 그 자태를 거절하지 못하고 동봉된 포크를 들었다.

홀린 듯 디저트를 입에 넣자 머리가 띵할 정도로 단 초코케이크 사이로 풍부한 과일 향이 느껴졌다.

케이크 사이에 발린 잼 때문이구나. 살구잼인가?

그렇다면…….

“자허토르테!”

“킥킥, 대단해. 모르는 디저트가 없네.”

퀴즈 쇼 참가자처럼 외치자 곧바로 정답 선언이 돌아왔다. 대답해 줄 여유도 없이 접시 바닥에 흘러내린 휘핑크림을 조금 떠먹었다.

자허토르테의 다디단 맛과 무가당 휘핑크림의 고소한 맛은 매우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바쁜 일정도 잊게 하는 황홀함의 극치라고나 할까…….

“아니, 잊으면 안 되지!”

“응?”

아펠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겨우 정신을 다잡은 내가 포크를 내려놓고 한층 진지하게 말했다.

“나 진짜 바빠. 내일부턴 또 다른 일이 생기거든. 마탑에 새로운 사람이 올 거야.”

“새로운 사람?”

“응, 갈레트 드 루아 쉬제트. 우리 오빠야.”

어렵기로 유명한 커스터드 귀족 학교를 최연소 입학하고, 월반하여 최연소 졸업 기록까지 세운 인물. 졸업 논문으로 쓴 「학문으로서의 마법」은 이미 타국에도 알려졌다고 들었다.

내일은 바로 갈레트가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마탑에 입성하는 날이었다.

아마 내일이 되면 나는 껌처럼 들러붙은 갈레트 때문에 제대로 업무에 집중하지도 못할 게 뻔했다.

기념일이나 휴일에는 나도 저택에 돌아갔고 평소에 편지도 부지런히 주고받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갈레트가 아니었으니까.

아까 글레이즈와의 대화에서 ‘나도 나름의 사정으로 바쁘다’고 했던 것은 결코 허세도 거짓도 아니었단 말이지.

“갈레트라면…….”

“역시 너도 들었구나? 하긴, 우리 오빠가 벌써부터 학계에서 꽤나 소문이 자자하다고 하더라구.”

아펠이 중얼거린 말에 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크흠.”

괜히 멋쩍어진 내가 헛기침을 했다. 밀려 올라간 광대뼈를 꾹 눌러 진정시키고 나니 그제야 아펠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

아펠은 어딘가 걸리는 것이 있는 것처럼, 아니면 희미한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왜 그러느냐 묻자 아펠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가 말을 흐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펠은 꼭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내 손등에 제 손을 포개고, 목소리를 낮췄다.

“있잖아, 크레페. 나 요즘 이상한 꿈을 꾸고 있거든.”

“응?”

갑자기 웬 꿈 얘긴가 싶어 되물은 그때였다.

쾅쾅!

“크레페!”

노크라고 하기엔 거센 두드림과 함께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놀란 나는 합, 입을 다물고 토끼 눈으로 문을 돌아보았다.

뒤이어 아펠을 쳐다보자 그가 잠깐 집중하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진이 금방 발밑에 떠오르며 그의 존재감이 미묘하게 흐릿해졌다.

곧 아펠이 나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를 받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크레페에에!”

문 앞에 서 있던 갈레트가 곧바로 나를 껴안았다. 의외의 사태에 나는 그를 반겨주지도 못하고 벙찐 얼굴로 물었다.

“내, 내일 오는 거 아니었어?”

“수속 끝나자마자 왔지! 하나뿐인 동생이랑 생이별했으니, 최대한 빨리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거든!”

“으응.”

하나뿐인 동생이라니. 카눌레의 존재가 순식간에 없어진 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아마 이쯤 되면 카눌레 본인도 별 감흥이 없을 것이다.

내가 얼떨함을 떨치지 못하고 그를 밀어내자 곧 피오르가 갈레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왔다.

“아직 안 자고 있었다니 다행이군. 어떻게든 너랑 인사를 먼저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길래 안내해 줬다.”

“네에…….”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설명이었다.

“뭐, 갈레트가 쓸 방도 알려줬으니 적당히 얘기하고 자도록. 내일도 아침부터 바쁠 테니.”

내가 납득하는 듯하자 피오르는 그 정도 말만 덧붙이곤 금방 탑을 내려갔다. 내가 성녀라는 게 밝혀지기까지 며칠 남지 않았으니 언행을 조심하려는 듯했다.

그때는 피오르도 내가 성녀라는 사실을 증언해 줘야 할 텐데, 그럼 지금까지 날 편히 대한 그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여기가 네 방이야? 편지에서 읽고 상상한 그대로네.”

갈레트는 조금 들뜬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기대하던 재회에 마탑 생활 첫날이기까지 하니 설레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 마음에 호응해 주기엔 내 입장이 조금 난처했다. 갈레트에게만 안 보일 뿐, 두 눈을 똑바로 뜬 아펠이 의자에 앉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으, 불편해. 게다가 난 방금 전까지 오빠가 얼마나 똑똑한지 자랑하고 있었는데, 이러면 말짱 도루묵인 거 아냐?

“크흠,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내일 얘기할까? 나도 일이 많아서.”

어쩐지 민망해지는 기분에 나는 갈레트를 돌려보낼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갈레트와 아펠을 둘 다 돌려보내고 내 할 일이나 하는 게 제일 현명한 방법일 것 같았다.

하지만 방금 막 들어온 갈레트는 순순히 물러나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왜 이렇게 날 내보내려고 그래? 혹시 다른 사람이랑 얘기 중이었어?”

갈레트는 계산이 빠르고 수식에 능통했지만 마나 감응력은 아펠이나 파타슈와 달리 범인(凡人)의 범주에 속했다.

그렇기에 투명화 마법을 쓰고 있는 아펠의 기척을 그가 알아챘을 리는 없었지만, 찔리는 곳이 있는 나는 말을 더듬으며 반문했다.

“으, 응? 무슨 소리야?”

갈레트의 시선이 내 책상 위를 향했다.

아펠이 가져다준 케이크와 방금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남은 포크.

마탑에서 디저트가 얼마나 드문지 편지로 한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상하게 보일 만했다.

내가 후다닥 그의 앞을 가로막고 둘러댔다.

“저건 몽블랑 후작님이 몰래 보내주신 거야! 사실 오빠랑 나눠 먹기 싫어서…….”

급히 얼버무리려다 오랜만에 본 갈레트에게 미안한 얘기를 해버렸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우물거리며 말을 흐렸다. 하지만 디저트에 관심이 없는 갈레트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고 되물었다.

“의자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야 하나엔 아펠이 앉아 있으니까.

“원래 그래.”

내가 뻔뻔하게 말하자 갈레트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의자 정리하기도 귀찮아?”

그렇게 생각해 주니 다행이었다. 내가 긍정이나 부정 대신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자 갈레트가 다시금 말했다.

“아무튼 얘기 좀 하자. 나도 부모님께 들은 게 있어서 할 말이 많아. 케이크는 네가 다 먹어도 되니까.”

“으, 응.”

아무래도 안부 전달 외에 다른 용건도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바로 돌려보내기 힘들다는 걸 깨달은 내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나는 아펠이 앉은 의자를 손짓하곤 갈레트 몰래 그를 툭 쳤다. 가만히 기척을 숨기고 있던 아펠이 삐친 듯 입술을 비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따 달래줘야겠다.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펠이 침대에 앉은 것과 거의 동시에 갈레트가 의자에 앉았다.

“음? 방금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어?”

갈레트가 제 등 뒤에 있는 침대를 돌아보며 물었다.

“모르겠는데!”

서둘러 답한 내가 갈레트 옆자리에 앉아 화제를 돌렸다.

“부모님께 얘길 들었다고?”

“응.”

그러자 갈레트도 주의를 돌려 내게 집중했다. ‘들은 게 있어서 할 말이 많다’던 것에서 짐작했지만 꽤나 무거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엄마가 암살당할 뻔했다며?”

역시나.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갈레트의 어깨 너머로,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린 아펠의 모습이 보였다.

“…알리고 싶진 않았는데.”

입 안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못 들은 건지 못 들은 척인지, 갈레트는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엄마가 중태에 빠졌다는 헛소문을 낸 후 나는 황제와의 대담에서 내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고 협조를 부탁했다. 그의 도움만 받으면 뢰드그뢰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애초부터 뢰드그뢰드의 목적은 아빠가 변방을 떠나도록 하는 데 있었으니까.

왕당파 귀족인 아빠는 황제의 명을 받고 쉬제트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이후 뢰드그뢰드의 명성이 올라가고, 아빠가 세운 업적마저 일부 가로채 간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으으, 떠올리기만 해도 괘씸하네.

아무튼 엄마가 암살당할 뻔했다는 사실은 갈레트와 카눌레에겐 비밀이었고, 그건 엄마와 아빠, 나까지 셋이 합의한 내용이었다.

적어도 오빠들이 성인이 될 때까진 걱정 끼치지 말자고.

그래, 성인이 될 때까진.

그 말을 되새기며 픽 웃었다.

얼마 전 나는 저택에 돌아가 갈레트의 졸업도 축하할 겸 그의 생일 축하 연회에 참석했다. 갈레트의 스무 번째 생일, 성인식을 겸한 행사였다.

“스무 살이 딱 되자마자 얘기해 주신 거야?”

아마 내가 마탑으로 돌아온 직후에 털어놓은 모양이었다. 10년 가까이 숨겼으니 며칠 정도는 더 숨길 수도 있었을 텐데, 융통성 없는 진행을 보니 아무래도 아빠의 독단인 듯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우스운 건 나뿐이었나 보다.

“크레페, 너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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