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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2)화 (162/181)
  • 162화 

    혹시 꿈에서 내 이름을 들은 적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 대답이 굼뜨게 나왔다. 하지만 아펠은 별 감흥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크레페. 아버님께서 날 어지간히 귀찮게 여기신 모양인데, 폐를 끼쳐 미안하게 됐써.”

    “응?”

    무슨 말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진 않았다.

    “마법사가 되면 결혼 못 한다며. 아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을 후계로 삼으려고 나를 여기 보내신 거겠찌. 분명 어머니도…….”

    “무슨 소리야!”

    단박에 말을 자르고 아펠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놀란 듯 그의 파란 눈이 동그래졌다.

    보석같이 투명한 눈동자, 늑대를 닮은 은회색의 머리카락, 아이답지 않은 어두운 눈빛.

    그건 이전의 삶에서 느낀 아펠의 첫인상이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줬어야 했다.

    “두 분 다 널 정말 조아하셔. 그분들은 그냥, 그냥 널 어떻게 대해야 할찌 몰라 어려워하시는 것뿐이야.”

    가까이에서 본 아펠의 눈빛에는 옅은 체념과 불안, 경계심과 당혹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어떻게 아느냐며 내 손을 바로 떨쳐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왜?”

    왜 어려워하냐는 반문에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유를 몰라서가 아니었다.

    황비는 아펠이 마법을 배우길 반대했다. 혹시라도 그가 신탁의 서를 발견해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게 될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또한 황제가 아펠을 멀리했던 이유는, 황비가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아펠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

    황제는 그녀가 직접 그 이유를 말해 주길 믿고 기다렸지만 황비는 끝내 비밀을 고백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게 되지.

    디몬의 인생 서고에서 본 그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런 얘기는 내가 밝힐 게 아니었다.

    아펠은 아직 아이였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그럼에도 ‘부모님은 널 사랑하고 있다’는 낯선 사람의 말을 믿고 싶어서 잡힌 손을 빼내지도 못하는, 아주 어린 아이.

    “너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네가 상처받을까 바.”

    짧게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 사실을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진작 그에게 알려줬더라면 지난 미래가 달라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아?”

    아펠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뒤로한 채, 나는 생긋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원래 성녀는 다 아는 거야.”

    【 성녀의 데뷔탕트 일정 】

    데뷔탕트란 무엇인가.

    귀족(주로 여성)이 사교계에 진출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 정식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지난 삶에서 나는 마땅히 데뷔탕트라 할 만한 것을 치르지 않았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갈레트마저 잃을까 두려워 사교계에 의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를 피한 채 기숙사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글레이즈 경,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건 제 의견이 아니라 그분의 고견이십니다.”

    글레이즈가 그분이라고 높일 사람은 물론 황제일 것이다. 나는 난감함에 입술을 씹으며 내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열다섯 살, 분명 보통의 귀족 여성이라면 데뷔탕트를 치러야 할 나이가 맞긴 했다.

    하지만 내 꼴을 좀 봐라. 마탑에서 10년 가까이 머무르며 한껏 후줄근해진 옷차림과 특식이 나올 때마다 양껏 먹어 복스럽게 부푼 배.

    이대로 마탑을 나가면 날 귀족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성녀님께서…….”

    글레이즈가 그 호칭을 꺼내곤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아직 내가 성녀라는 사실은 극비였으니 말실수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마탑 내부의 응접실에 우리 이야기를 엿들을 만한 사람이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아요?”

    “성녀님께 굳이 전달하지 않았을 뿐, 그분께선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신 상태입니다.”

    “모든 준비라 하심은…….”

    “이미 슈트루델에 성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아마 3일 안에 성녀의 이름이 공표될 겁니다.”

    나는 놀라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대로의 흐름이었다.

    그동안 내가 성녀라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여섯 살짜리가 하는 말을 타국에서 얼마나 믿어줄 것인지가 의문이었고, 내가 진짜 성녀임을 증명한다 하더라도 내 존재를 찜찜하게 여긴 타국에서 날 암살의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었다.

    성녀가 슈트루델에 나타나 그 나라에서만 머문다면 주변국들의 위신이 떨어질 테니까.

    여섯 살이 아무리 똑똑해 봤자 자기 호신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에 황제도 나도 존재를 숨기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데뷔탕트를 기점으로 내 권위를 과시해야 한다는 건가…….

    생각에 잠긴 채 입을 다물자 글레이즈는 내가 납득했다고 생각한 듯 말을 이었다.

    “더불어 데뷔탕트 이전에 성녀의 권위를 보일 수 있을 만한 연설 자리도 준비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그곳에서 아군이 될 만한 또래 귀족들과 친분을 쌓는 것도 좋겠군요.”

    “…….”

    앞으로의 할 일을 정리하던 논리 회로에 과부하가 걸렸다. 내가 슬그머니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멈췄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데뷔탕트 준비에 연설 준비에 귀족들과 사바사바할 준비까지 함께 하라는 거죠?”

    글레이즈가 주름진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사바사바가 뭡니까?”

    “뭐든 간에요! 저도 마탑에서 나름 바쁘다고요! 일을 이렇게 한꺼번에 주시면… 아니, 한 번에 전달해 주셨지만 실제 일정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거죠?”

    내가 한 줄기 희망을 붙들고 간절히 물었다.

    “며칠 정도의 간격은 있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이미 확정된 사항이니 그리 알고 준비해 주시기를 당부드리는 바입니다만.”

    “…며칠 간격이라고요?”

    “연설은 오늘부터 열흘 후, 데뷔탕트는 그로부터 보름 후입니다.”

    아무래도 거부권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추가 설명을 들어봤자 빡빡한 일정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게 될 뿐이었기에 나는 입술을 곱씹고 찬찬히 손을 꼽았다.

    슈트루델에 성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이미 암암리에 퍼져 있다고 했고, 그게 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게 사흘 후, 그로부터 일주일 후가 연설, 그 보름 후가 내 데뷔…….

    “잠깐만요.”

    아무래도 날짜가 이상한 것 같아 내가 확인차 물었다.

    “데뷔탕트가 열흘 하고도 보름 후라고요?”

    “예.”

    그날은…….

    “아펠 황자의 태자 책봉식 날이잖아요!”

    * * *

    신성 제국의 책봉식이니 성직자가 참관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내 데뷔탕트를 겸한 자리에서 성녀라는 사람이 뒤로 쏙 빠져 박수나 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꼼짝없이 내가 제례를 통째로 외우고 주도하게 된 것이다.

    으으, 한가할 때도 있었는데 왜 일은 항상 한꺼번에 터지는 걸까.

    머피의 법칙 같은 상황이 막막한 나머지, 없던 편두통이 생길 것 같았지만 아무튼 뭐라도 해야 했다.

    나는 빈 공책을 꺼내 황태자 책봉식의 의례를 기억나는 대로 써 내려갔다. 연설문도 준비해야 했지만 어디에서 연설하는지 아직 듣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것부터 손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일부터 나는 더욱 바빠질 예정이었으니까.

    왜냐하면 내일은…….

    “똑똑.”

    내 상념을 깨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목소리로 알아챘지만 방문자는 아펠이었다. 밤손님처럼 기척을 죽인 채, 한 손에는 작은 종이 상자를 들고, 행색은 몰래 황궁을 빠져 나온 게 분명한 잠옷 차림.

    “이렇게 오지 말라니까…….”

    반사적으로 퉁명스러운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앞에 서 있는 건 아펠이었지만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위화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아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나와 같이 여섯 살에 마탑에 들어왔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자가 9년씩이나 궁을 비우고 마탑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아펠은 2년여의 시간 동안 나와 함께 마탑에 머물다가 어느 정도 마법을 배운 후에는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때엔 아펠 혼자 공간 이동 포트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이후로는 지난 생과 비슷하게 아펠 혼자서도 마탑을 자주 오가곤 했는데, 그때와 달리 그가 머랭을 발견한 건 최근의 일이었다.

    잠깐, 머랭?

    거기까지 도달하고 나니 이 낯선 느낌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투명 마법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뭐야, 내가 보여? 놀래주고 싶었는데.”

    장난기 남은 눈으로 아펠이 손가락을 튕겼다. 흐릿하던 그림자가 선명해지며 동시에 그의 존재감이 확연해졌다.

    “저번에 투명한 강아지를 발견했다고 했지? 마나 패턴을 분석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진으로 재구성해 봤어.”

    “…….”

    아펠과 머랭의 첫 만남은 본래 디몬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나는 아펠이 머랭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게 썩 달갑지 않았다.

    물론 오래 준비한 만큼 또다시 디몬에게 놀아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말이다.

    “으이그, 비밀 통로 대신 포트로 오라고 했잖아. 창문만 열면 되는데.”

    나는 보란 듯이 입술을 비죽이고 그를 방에 들였다.

    “그건 들키기 쉽잖아.”

    “거긴 아무나 들어가면 안 된다니까? 봉인 마법이 괜히 걸려 있는 줄 알아?”

    “뭐 어때, 네가 준 팔찌 덕에 나도 봉인 마법을 무시할 수 있게 됐고, 어차피 황족을 위해 마련된 통로잖아.”

    뻔뻔하게 대꾸한 아펠이 내 책상 위에 가져온 종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왼쪽 손목에 채워진 팔찌는 물론 내가 예전에 건네줬던 금속 팔찌였다.

    피오르에게 부탁해 브라우니의 마나 패턴을 담은 것.

    지난 생에도 그랬듯 저 팔찌를 착용하면 그의 말마따나 봉인 마법은 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내가 황잔데 내가 쓰는 게 뭐.”

    내 마음도 모르고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내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제 곧 태자가 되면 더하겠네.”

    “후후, 네가 축성해 주는 거지?”

    아펠이 부정하지 않고 장난스레 웃었다.

    “…….”

    지금껏 내 기억 속에 있던 열다섯 살의 아펠은, 내가 커스터드 귀족 학교를 통해 변방으로 수련회를 떠났을 때 본 모습이었다.

    그는 갑작스레 나타나 내 목숨을 구했고 근처에 몰려든 수많은 몬스터들을 없앴다. 나는 피가 비처럼 쏟아지던 하늘과 그 밑에 서 있던 아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없애버릴 듯 형형하게 빛나던 눈동자와 피가 튀는 건 싫다던 중얼거림, 어린애 장난처럼 아무렇지 않게 괴물의 목숨을 끊던 그의 모습.

    그러나 지금의 아펠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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