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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1)화 (161/181)
  • 161화 

    “이게 대체…….”

    몽블랑이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나는 대답 대신 단상 위에 선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계단 위 단상 높이에 그의 키까지 더해지니 내 목이 금세 뻐근해졌다.

    곧 황제가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몽블랑이 몸가짐을 바로 하고 섰다. 황제는 내 앞까지 내려와 멈췄다.

    “디몬 님의 종, 밀리람 슈트루델이 성녀님을 뵙습니다.”

    극진한 예를 갖춘 인사말과 함께 황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글레이즈가 제 주군의 행동에 경악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뻘 되는 노기사가 허둥지둥하는 걸 보는 내 맘도 그리 편치는 않았다. 내가 민망하게 헛기침을 했다.

    “끄흠, 일어나셔도 갠찮슴니다.”

    “슈트루델 제국에 광영을.”

    마탑 소속인 피오르, 키슈, 몽블랑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끝으로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글레이즈 경과 몽블랑 후작은 당혹스러웠겠군. 보는 입장에선 둘의 놀라는 모습이 꽤나 재밌었지만 말이야.”

    황제가 우스갯소리 하듯 말하고는 기사를 불렀다. 글레이즈가 얼떨한 표정으로 다가오더니 황제의 명에 따라 그의 어깨에서 망토를 풀었다.

    화려한 망토가 벗겨진 황제는 팔을 크게 돌려 몸을 풀고는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말했다.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 *

    나와 몽블랑이 입장한 거대한 성문 외에도, 알현실로 통하는 문은 단상의 오른쪽과 왼쪽에 하나씩 더 있었다.

    황제는 기사들이 나간 왼쪽 문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다가갔다. 무거운 철문처럼 보였던 그것은 황제의 손이 닿자마자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우와…….”

    마치 별세계 같은 곳이었다. 흰 대리석 바닥을 제외하고는 온통 유리로 만들어진 듯 밖이 훤히 내다보였고, 벽과 천장은 하나로 이어져 돔처럼 둥그런 모양이었다.

    게다가 투명한 벽 너머 보이는 광경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광원 렌즈를 쓴 무성 영화 같기도 하고, 드론이나 공중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과 여기가 1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방 전체에 공간 왜곡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성녀님께도 놀라운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황제가 웃음을 삼키고 자리에 앉았다.

    하긴 성녀라고 온갖 무게를 잡던 내가 막 상경한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게 우스울 만도 했다.

    나는 조금 민망해져 그의 표정을 못 본 척, 그의 맞은편으로 갔다.

    이곳에 준비된 원탁은 예닐곱 명쯤 앉을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구석구석에 자리한 조각상과 장식장, 왜곡된 풍경까지 더해 이곳은 마치 거대한 스노볼의 내부처럼 보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현실감이 안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후작도 앉지.”

    “…….”

    의자 바로 옆에 서서 몽블랑을 올려다보자, 그가 말없이 나를 들어 자리에 앉혀주곤 내 옆자리에 앉았다.

    황제가 의외의 것이라도 목격한 듯 눈을 깜빡거리다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저명한 몽블랑 후작께서 보모가 다 됐군.”

    “…폐하, 황상의 위엄 앞에 외람되오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경, 문을.”

    지시를 받은 글레이즈가 알현실로 통하는 문을 닫고 바닥에 단단히 섰다.

    “묻게나.”

    허락이 내려진 후에도 몽블랑의 눈빛에는 다소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그는 나와 황제를 번갈아 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녀님과 면식이 있으신 겁니까?”

    “짐보다 대답에 적합하신 분이 있겠군.”

    황제가 그리 말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까지 말하면 좋을지 모르니 내가 직접 설명하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크레페 님?”

    몽블랑이 답을 구하듯 내 이름을 불렀다.

    황제마저 극존칭을 쓰는 내게 이름을 부르다니.

    상황이 조금 우습긴 했지만 몽블랑의 충격이 이해 가지 않는 바도 아니었기에 나는 웃음을 꾹 참고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지난밤, 팔미에 황비님을 만나 뵈었씀니다.”

    “황비님을… 아니, 어제 말입니까?”

    “황궁까지 연결댄 비밀 통로를 사용했찌요. 저한테 봉인 마법은 안 똥하니까요.”

    어떻게 비밀 통로의 존재를 알았느냐, 황궁 길은 또 어떻게 알고 별궁에 간 거냐, 그런 질문은 성녀인 내게 별 의심 거리가 안 될 것이다.

    몽블랑도 그리 생각한 듯 석연치 않은 부분을 무시하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황비님께… 성녀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까? 하지만 그리 쉽게 믿어주셨을 리가…….”

    “팔미에 황비님께선 저를 믿을 수밖에 없었쓸 거예요.”

    “예?”

    내가 몽블랑을 보다 말고 황제에게 눈을 돌렸다.

    “글레이즈 경은 갠찮다고 하셨찌요?”

    “예. 긴 시간 동안 함께한 황실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 글레이즈 경은 괜찮습니다.

    노기사를 당황하게 했던 황제의 존대는 물론 내게 들으라 한 소리였다.

    다시금 확인한 내가 입술을 뗐다.

    “황비님께 말씀드렸써요. 제가, 아펠 슈트루델이 황제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따구.”

    철커덕.

    서슬 퍼런 쇳소리는 이곳의 유일한 기사, 글레이즈의 갑옷에서 난 소리였다.

    그는 노기로 일렁이는 눈빛을 하고는 황제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당장 내 목을 베겠다는 듯 무게중심을 낮추고 검 손잡이를 잡았다.

    “경, 진정하게. 성녀님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으니.”

    “…….”

    황제가 태연히 손을 젓자 글레이즈가 검에서 손을 뗐다.

    “운명과 예지의 신을 모시는 성녀께 무엇을 숨길 수 있겠는가.”

    황제의 입가에 쓴웃음이 감돌았다.

    몽블랑은 떨리는 눈빛을 애써 다잡고 나를 쳐다보았다. 성녀라고는 해도 그런 사정까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몽블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다시 황제를 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황비님께 전한 말에 대해선 이미 들으신 줄 암미다. 저는 폐하께 한 가지 청을 드리러 왔씀니다.”

    예고 없던 발언에 황제가 턱을 치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펠 슈트루델 황자를 마탑에 들여보내 주쎼요. 그리하시면 제가 황자님의 후견인이 되어 그분을 황위에 올리겠씁니다.”

    “…….”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황제가 동그랗게 뜬 눈을 껌뻑거렸다.

    “하… 하, 크하하핫!”

    별안간 황제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탁자를 내리치며 단정히 넘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질 정도로 격하게 웃더니, 한참 후엔 눈가에 맺힌 눈물까지 닦아내며 말했다.

    “경, 들었는가? 성녀님께서 황자의 후견인을 자처하시다니, 나 밀리람 슈트루델로는 황자의 뒷배로 부족하다 생각하신 모양이로군!”

    “폐하.”

    “농이 지나치지 않습니까, 성녀님. 슈트루델 제국의 유일한 황자입니다. 대체 누가 그 정통성을 의심한단 말입니까?”

    제 권위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로 들렸는지, 황제는 내 요청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분노가 아니라 웃음기가 어린 얼굴이었다.

    내가 어려 보여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따라 웃는 대신 더욱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아펠 본인이 알게 되는 걸 막을 쑨 없겠찌요. 한 명이 알면 둘이 알 것이고, 그때엔 슈트루델에 전쟁이 일어날 껍니다.”

    “…….”

    그리 말하자 황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가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이제 깨달은 듯했다.

    밀리람 슈트루델. 그 역시 전란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니었다.

    “생각하고 계신 방안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가 웃음기 가신 표정으로 물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마탑에 새로운 연구생이 들어왔다.

    나이는 내 또래에 은발과 푸른 눈을 가진, 플럼 바클라와가.

    * * *

    “누가 보면 마탑이 아니라 탁아소인 줄 알겠어.”

    피오르가 쯧, 혀를 차더니 아차 싶은 듯 우릴 내려다보았다.

    “아, 두 분을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이미 늦었어요.

    나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고 반눈을 뜬 채 피오르를 올려다보았다.

    “크흠, 아무튼 이만하면 됐겠군요. 말씀드렸듯 이 도서관을 기준으로 서쪽이 연구동, 동쪽이 기숙사입니다. 식당은 오면서 보셨지요?”

    어색하게 헛기침한 피오르가 조금 남은 마탑 안내를 말로 대충 때워버리고, 알아서 대화하고 있으라며 우리를 도서관에 남겨둔 채 훌쩍 떠나버렸다.

    피오르가 바쁜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오늘 막 마탑에 들어온 아이까지 이런 취급이라니, 나는 내심 당황했다.

    물론 피오르도 아펠, 아니 플럼이 황자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런 거겠지만.

    마탑에서 그 정보를 아는 사람은 알현실에서 긴밀히 이야기를 나눴던 나와 몽블랑뿐이었다.

    피오르가 플럼에 대해 들은 것이라곤 ‘눈여겨볼 만한 재능이 있으니 또래인 성녀를 가르치는 김에 이 아이도 가르쳐 달라’는 지시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 아펠이 황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무리 어린애가 질색인 피오르라도 마탑 예산을 올려달라는 뜻으로 뇌물용 사탕 같은 걸 바치지 않았을까?

    “이러면 후회할 텐데…….”

    나는 피오르의 미래를 내다본 사람처럼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어쩌면 이런 것도 성녀로서의 예지력이려나.

    “푸훗.”

    싱거운 생각에 혼자 웃음을 터뜨리자 어색하게 서 있던 아펠이 몸을 움찔했다. 내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무것또 아냐.”

    “…정말 마탑에 있썼구나.”

    아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밤에 한 번 스쳐 간 것뿐이었지만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에 그도 날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위험성을 감지하고 빠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시간대면 으레 그렇듯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연구동이나 강의실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기에 도서관엔 책을 대출하러 온 몇몇 사람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고 아펠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린아이인 우리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을 뒤로하고 도서관 2층 구석으로 들어간 내가 쉿, 소리를 내고 소곤거렸다.

    “우리가 만났떤 건 비밀이야.”

    “그래.”

    “크흠, 내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찌만, 암튼 마법 공부는 우리 둘이 젤 많이 하게 될 꺼야. 네 수업은 거의 다 내가 한다구 생각해.”

    “…….”

    또래 아이가 수업을 해준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아펠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설마 나를 무시하는 건가?

    정말인지 아닌지 확신하기도 전에 아펠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내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페…….”

    아, 플럼이라고 불렀어야 했는데.

    뒤늦게 말을 멈췄다.

    하지만 나를 슬쩍 돌아본 아펠은 눈썹만 잠깐 찌푸리곤 고개를 저었다.

    “됐어. 네 얘기는 어머니께 들었쓰니까.”

    내가 성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황자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고 혹독한 취급을 받을 일은 없다니 다행이었다.

    “너는 뭐라고 부르면 돼?”

    그의 얼굴은 책장 그림자로 가려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낯빛이 어두운 것을 빼면 표정을 읽기가 조금 어려웠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크레페라고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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