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60)화 (160/181)
  • 160화 

    “안 들려? 너 가튼 어린애가 있쓸 곳이 아닐 텐데.”

    “푸훕.”

    참지 못한 웃음소리를 내자 아펠의 미간이 움찔했다. 표정을 숨기는 게 서툰지 볼은 살짝 부풀어 있었다.

    “머가 웃겨?”

    “미, 미안.”

    아펠이 저렇게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게 귀여워서 웃은 거였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하면 그의 심기에 거슬릴 것이 뻔했다.

    기분이 상한 그가 신고하면 나는 당장 잡혀갈 수도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고 살짝 뒤로 물러났다.

    “대답은?”

    “너는 왜 여기 있눈데? 너도 어린애자나!”

    “…….”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좋은 대화법이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거두절미하고 묻자 아펠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내가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에게 활로를 열어주었다.

    “아, 아랐다. 너두 길을 잘못 들었구나? 휴우, 마탑은 너무 넓따니까.”

    “…마탑? 거기서 온 거야?”

    “웅, 내 숙소는 쩌기야. 화장실 가려고 혼자 나왔따가 그만…….”

    한껏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하지만 아펠은 이미 내게 흥미가 식었다는 듯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마탑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아펠은 아직 마탑으로 통하는 포트를 발견하지 못한 거라고.

    하긴 황자인 그가 이 시간에 몰래 침소를 빠져나와 황궁의 수풀 속을 헤집고 다닐 이유가 또 뭐가 있겠는가.

    황비는 그가 마법을 배우는 것을 반대했고, 그는 순응하는 대신 마탑으로 숨어들 경로를 찾고 있었다. 오늘도 그러기 위해 나온 게 분명했다.

    “으으, 화장실! 나 먼저 아무 데나 드러가 보께!”

    “자, 잠깐……!”

    나는 대충 둘러대고 별궁 발코니 쪽 낮은 난간을 뛰어넘었다. 아펠은 당황했으나 황궁 안까지 따라 들어오진 못했다.

    당연하지. 아펠의 입장에선 이곳 사람에게 자신의 외출 목적을 들키는 게 최악의 일일 테니까.

    그리고 나도 건물 안에서까지 요령 좋게 사람들을 피해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숨는 대신 후다닥 발걸음을 재촉해 아펠을 피하곤 곧바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휴우…….”

    예기치 못한 재회에 놀라 가쁜 숨을 고르고 나자 서서히 어둠이 눈에 익었다.

    별궁에 제법 오래 머물렀지만 한 번도 들어온 적 없던 방.

    아무래도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치형으로 뚫린 벽 옆의 커다란 침대로 향했다. 그곳에는 핏기 없는 얼굴의 여자가 고요히 누워 있었다.

    생기나 인기척은 거의 없었다. 아주 집중해야만 이불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이불 밖에 드러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흐읍!”

    악몽이라도 꾼 듯 소스라치며 여자가 일어났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악마의 것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나와는 첫 대면이니 더 그랬겠지만, 나는 그녀가 다른 이들의 손길에도 똑같이 반응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누, 누구냐.”

    과호흡이 온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어린아이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당장 졸도했을지도 모를 만큼의 반응이었다.

    나는 그녀를 해칠 의도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뒤로 크게 물러나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처음 뵙께씁니다, 황비님. 마탑에서 찾아온 성녀,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라 합니다.”

    “…….”

    예의 바른 인사에도 경계를 풀지 않은 얼굴로, 그녀는 협탁에 손을 뻗어 마법등을 켰다. 등황색 빛에 그녀의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아펠의 방에 걸려 있던 그림에서 본, 짙은 갈색 머리의 여자.

    그녀는 내가 황제보다 먼저 만나야 했던 사람이었다.

    * * *

    황비와 대면한 다음 날인 오늘 아침, 몽블랑이 내게 찾아와 알현일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바로 오늘 오후였다.

    “적어도 3일에서 5일 정도를 예상했는데, 사안의 경중을 생각해도 무척 이른 편이긴 합니다.”

    “성녀의 등장에 폐하께서도 그만큼 신심이 두터워지신 거지! 드디어 마탑 예산이 올라갈 때가 된 것 아닐까?!”

    몽블랑의 진중한 말투 뒤로 피오르의 들뜬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이전 생에 어린아이였던 나를 마탑 수련생으로 받아준 이유도 기부금 때문이라고 했었지?

    …마탑의 자금난은 이때 이미 시작된 것이었나.

    “크흠, 아무튼 시간이 촉박해졌으니 미리 말을 맞춰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몽블랑이 피오르를 팔로 밀어 뒤로 보내고 말을 이었다.

    하긴, 몽블랑이 독단으로 성녀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나 내가 피오르와 협력해 마구를 만든 것, 페가수스에 대한 얘기까지, 얼마든지 나쁘게 해석될 수 있으니만큼 어느 정도 얘기를 맞춰놓는 게 좋을 테다.

    “그럼 나보단 둘이 할 말이 많을 테니 먼저 얘기하고 이따 알려줘. 난 마탑 일이 밀려서.”

    “그래.”

    피오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블랑의 대답에 이어 나도 눈인사를 건넸다. 어차피 알현실에 가기로 한 것도 나와 몽블랑 둘뿐이었다.

    우리는 빈 강의실에 남아 앞으로의 일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공부가 특기였던 만큼 그가 말해주는 내용을 금방금방 외웠기 때문에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몽블랑은 놀란 것 같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요.”

    “네, 실수 안 하께요.”

    안심하라는 의미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으며 고갯짓을 해 답하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말을 맞춰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알현 때까지 준비해야 할 얘기는 막 끝낸 참이었다. 잊은 게 있다는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자 몽블랑은 민망해하는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저도 오늘 아침에야 들었습니다만, 어제 크레페 님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피오르가 둘러댄 말이…….”

    “실례하겠습니다!”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별안간 마법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제 식당에서 본 얼굴이었는데, 책을 든 걸 보니 혼자 공부할 만한 빈 교실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 여기 계셨네요? 개인 과외 중이셨어요? 부녀지간에 보기 좋네요.”

    “에?”

    귀를 의심하게 하는 단어를 들은 내가 눈을 끔벅거렸다. 몽블랑이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는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요. …따님.”

    “…예, 아부지.”

    피오르가 나에 대해 어떻게 둘러대 놨는지 이제 와서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얌전히 대답하며 몽블랑 옆에 따라붙자 ‘오후까지만 참아 달라’는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 성녀는 다 알아 】

    내 몫의 드레스로 갈아입자마자 나는 목깃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 나이에 입어본 것 중에서 제일 불편한 옷이었다.

    물론 파티 때 종종 입었던 제복보다는 답답함이 덜했지만, 그것과는 다른 불편함이라고 할까.

    “금방 끝날 테니 괜찮을 겁니다. 돌아가면 피오르에게 치료하라고 하지요.”

    딱히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는 몽블랑의 말을 들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움직일 때마다 거칠거칠한 옷감이 피부에 쓸려 간지럽다가 따갑다가를 반복했다. 마찰을 피할 수 없는 손목과 목깃 부분은 참지 못하고 긁어버린 통에 생채기까지 났다.

    내 옆에 선 몽블랑도 같은 옷감으로 만들어진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귀족으로서가 아니라 성직자로서 알현하기 때문인 듯했다.

    희고 뻣뻣한 옷감에 금실로 수놓은 천을 겹치고 두르고 올려 열 개도 넘는 단추로 마무리한 정복이었다.

    이런 옷을 사복으로 입다니, 피오르가 새삼 대단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내심 혀를 내두르며 몽블랑과 함께 본궁으로 들어섰다.

    아펠의 방을 구경하며 본궁에 들어와 본 적은 있었지만 알현실에 가기는 처음이었다. 더불어 황제를 실제로 보는 것도.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알현실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휘황찬란한 조명과 키슈의 머리만큼 새빨간 카펫, 단상에 드리워진 휘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연회장을 방불케 하는 화려함이었다.

    그러나 그 카펫을 중심으로 양옆에 도열해 있는 기사와 휘장에 그려진 신수 펜리르의 위용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그 엄숙하고도 화려한 장식을 단순한 배경으로 만들 만큼 무거운 존재감을 가진 남자가 단상 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인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고원의 매와 비슷했다.

    체구는 건장했지만 얼굴은 말라 날카로워 보였고, 그림에서는 단순한 검회색 같던 머리카락은 매의 깃처럼 검은색과 은색이 섞여 있었다.

    그 앞에 선 나는 어쩌면 먹잇감으로 준비된 흰 양처럼 보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앞에 멈춘 뒤 허리를 꼿꼿이 세워 섰다.

    “디몬 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씀니다.”

    그 말을 꺼내자마자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알현 신청 이유는 기본적으로 기밀에 부쳐졌다. 아무것도 몰랐던 기사들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당황한 건 기사뿐이 아니었다. 몽블랑이 곧바로 내게 따라붙어 말했다.

    “크… 성녀님. 폐하의 허락 없이 입을 여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물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궁으로 출발하기 바로 직전에 몽블랑과 리허설까지 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황제만 올려다보았다. 태어나서 농담 한 번 들어본 적 없을 것 같던 그의 진중한 얼굴에 별안간 웃음이 퍼질 때까지.

    “하하하, 거 참 당돌하신 분 아닌가! 성녀의 진위를 확인받기도 전에 전언이라니.”

    황제가 입을 열자마자 웅성거리던 소리가 사라졌다. 대신 무장을 갖춘 기사들이 저마다 자세를 바로잡는 쇳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송구합니다.”

    몽블랑은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내 팔을 당겼다. 함께 뒤로 물러나자는 뜻인 듯했으나 황제가 먼저 팔을 뻗어 제지했다.

    “물러나 있게, 후작.”

    “…….”

    몽블랑이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났다.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는 황제는 마치 관객처럼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나를 굽어보았다. 황제라기보다는 양아치에 가까운 태도였으나 특유의 아우라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탁이 내린 겁니까?”

    신탁.

    신의 말씀이라는 엄숙한 단어를 꺼내는 것치고 황제의 얼굴엔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사기를 칠 테면 쳐보라는 듯한 태도에 나까지 덩달아 실소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폐하, 농은 그만하시찌요.”

    “…….”

    황제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셨다. 그가 허리를 세우고 단상 아래에 서 있던 기사에게 명령했다.

    “글레이즈 경, 기사들을 무르게.”

    “예.”

    글레이즈라 불린 노기사가 군말 없이 손짓했다. 수신호에 맞춰 기사들이 한 줄씩 알현실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글레이즈가 그들이 나간 문 앞에 섰다.

    “글레이즈 경은 괜찮습니다.”

    황제가 그리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글레이즈는 별안간 존대를 들어 당황한 듯했지만 곧 문단속을 하고 제자리로 돌아와 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