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몽블랑 후작가에 머물 때부터 피오르는 틈만 나면 저런 질문을 꺼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어보려는 것 같긴 했지만 은근히 초조함이 드러나는 태도를 보니 절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배우지 않고도 이 정도라니 분명 재능이 있으신 겁니다. 조금만 열심히 하시면 제가 하는 연구 쪽에서도 금방 두각을 드러내실… 아, 아니, 성녀님을 제 조수처럼 다루겠다는 소린 아니고요.”
피오르가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빠르게 부정했다.
키슈만큼 드러나진 않았지만 피오르도 마법에 관련된 거라면 꽤나 욕심이 있었다. 특히나 제자 양성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애써 웃음을 삼켰다.
“저보다 조은 사람이 있쓸 거예요. 우리 오빠두 공부 엄쩡 잘하구요.”
“…누구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같은 요새에 있었지만 피오르는 생각이 안 난다는 듯 물었다. 그의 무심함에 새삼 놀랄 것도 없이 곧바로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저랑 머리 색 똑같았떤 남자애요. 커스터드 학꾜 최연소 입학!”
“아아…….”
기억이 난 건지 그런 척만 한 건지, 피오르는 몽블랑의 눈치를 슬쩍 보고 ‘성녀님의 추천이라면야…….’ 하며 애매한 반응을 내비쳤다.
내가 관심 없는 일을 오빠한테 떠넘긴 것처럼 보였으려나?
그런 생각이 뒤늦게 들긴 했으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피오르 쪽에서 갈레트를 제 직속 제자로 삼고 싶어 안달할 것이다.
미래가 훤히 보이는 기분에 나는 대답을 대신해 히죽 웃어 보였다.
“다른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고 와도 괜찮으신 겁니까?”
오빠 이야기가 나온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몽블랑이 물었다. 그도 알고 있는 것이다. 오빠가 얼마나 날 아끼는지, 그리고 내가 당분간 집에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도.
“엄마가 잘 말씀해 주실 껀데요, 머.”
“수플레 님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은…….”
“절때 안 해요.”
나는 몽블랑의 말을 끊어 먹듯이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 역시 자신의 위험을 오빠들에게 털어놓진 않을 것이다.
지난 생에서도 그랬으니까.
예전 일을 떠올린 내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몽블랑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었고, 피오르도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느낀 듯 우리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가로질러 멘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렸다. 소지품이라곤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 몇 통과 『내 인생 공략집』이라고 이름 붙인 공책 한 권이 전부였다.
가만히 창밖을 쳐다보았다. 푸르른 하늘 아래 황금 같은 밀밭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마차 바퀴 덜컹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내가 좀 더 강해져야지.
* * *
황제에게 성녀가 나타났음을 알린다.
문장에서 느껴지다시피 중대한 사안이긴 했지만, 아무리 한 나라의 후작이라 해도 다짜고짜 알현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나와 피오르가 황궁 앞에서 마차를 멈추고 기다리는 동안, 몽블랑은 혼자 궁 안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가 우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 같더군요.”
“네.”
나는 토 달지 않고 머리를 주억거렸다. 약속 없이 찾아가면 옆집 아저씨도 만나기 힘든 세상이었다.
몽블랑이 피오르에게 물었다.
“외성에 머물 곳을 찾아볼까?”
“마탑을 두고?”
“서약은…….”
“성녀님한테 마탑 서약이 문제겠냐.”
피오르가 우스갯소리를 들었다는 듯 받아치자 몽블랑은 반론하지 못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데나 갠찮으니까 뭣 쫌 먹게 해주세요…….”
반나절도 넘게 쫄쫄 굶은 터라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 몽블랑이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피오르의 등을 떠밀었다.
“마탑이 빠르겠군.”
감자를 갈아 만든 수프에 조금 남아 있던 식은 빵, 육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바짝 마른 베이컨과 그나마 방금 만든 티가 나는 스크램블에그.
우리 집이나 몽블랑의 저택에서 먹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소박한 메뉴였지만 고생 끝에 먹는 식사라서인지 맛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어머, 벌써 다 드셨어요? 그 많던 게 다 어디로 들어갔대요?”
마법사 한 명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을 걸었다. 그릇에 묻은 것까지 핥아 먹을 기세로 수프를 마시던 내가 그릇을 내려놓고 소맷부리로 입가를 닦았다.
“느즌 시간에 대접해 주셔서 감사함니다.”
내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미 식사 때도 지난 시간이었기에 식당에는 우리 셋과 눈앞의 마법사 한 명뿐이었다. 우리를 위해 요리까지 해다 주다니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아이구,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보다 아가씨께서는…….”
마법사가 피오르와 몽블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느 분의 양녀신가요?”
“끄흠.”
“잠깐 얘기 좀 하지.”
멀쩡히 살아계시는 부모님이 없어질 위기였다. 내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하자 피오르가 재빨리 일어나 마법사를 데리고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말을 어떻게 둘러대려는 건지, 궁금증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향한 그때였다.
“제가 쓰던 방을 안내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직 비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곧장 몽블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피오르 쪽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몽블랑이 쓰던 방은 내가 지난 생에 쓰던 것과 똑같은 곳이었다.
황제와의 알현까지 며칠이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당연히 익숙한 방이 머물기에도 좋았기에, 나는 이 방이 마음에 든다고 열심히 어필해 여기 머물게 되었다.
“저와 피오르는 아마 연구동 지하에 있을 겁니다. 연구동은…….”
“오면서 봐쓰니까 갠차나요.”
아는 설명을 다시 들을 필요는 없었다.
웃으며 대답하자 몽블랑은 조금 미심쩍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연락할 일이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 누구에게든 저의 이름을 말하면 알 거라며 일러주고 몸을 돌렸다.
“휴우…….”
긴장을 늦출 수 없었기에 더욱 길게 느껴진 하루였다.
나는 긴 숨을 내쉬며 방을 둘러본 후 창가로 다가갔다. 덧문 사이에 살짝 낀 먼지를 툭툭 털고 문을 열자 바로 앞에 황궁이 보였다.
“와, 엄청 오랜만인 거 같네!”
몽블랑을 기다리던 정문에서도 황궁이 보이긴 했지만 이 방에서 바라보는 풍경과는 달랐다.
1년 남짓이지만 여기서 지냈던 적도 있고.
나는 새삼스레 감회에 젖어 가방을 정리하는 것도 잊고 풍경 감상에 빠졌다.
잠시 후, 피오르가 내 잠옷을 갖다 주며 마탑에서 주의할 점 등을 알려주었고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를 돌려보냈다.
당연히 피오르가 걱정할 건 없었다.
“내가 멀 할지는 이미 정해졌쓰니까.”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도록 털 슬리퍼를 단단히 신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중간중간 졸음에 못 이겨 잠들어 버릴 뻔한 고비가 있긴 했지만, 다행히 아까 마차에서 눈을 충분히 붙인 덕에 깊은 잠에 빠지지는 않았다.
“조아.”
문밖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모두 사라진 시간, 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
작은 찰칵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렸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내가 향한 곳은 마탑 중앙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서늘한 밤공기나 적막한 분위기 같은 게, 내가 이곳에서 비밀 지하실을 발견한 날과 꼭 닮아 있었다.
비록 그때와 달리 아펠은 내 곁에 없었지만.
그러나 혼자라는 사실에 무서워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도리질을 쳐서 긴장한 표정을 풀었다. 언제 사람이 찾아올지 몰랐으니까.
“…….”
나는 도서관 구석에 놓인 책장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먼지가 살짝 들러붙은 책장 다리를 더듬자 손끝에 이질적인 촉감이 느껴졌다.
찾았다, 마법진.
더 망설일 것 없이 마나를 불어 넣자 작은 마법진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곧 바닥이 움직이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무릎에 붙은 먼지를 털고 계단 앞에 섰다. 여전히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였지만 목적지를 알고 있는 나는 전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으윽.”
아니, 내가 이 감촉을 어떻게 잊고 있었지.
난간을 잡고 벽을 더듬는 손은 물론 얼굴에까지 거미줄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소름 끼치는 감촉에 놀란 나는 계단이 끝나자마자 남은 통로를 거의 달리듯 지나왔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벌레가 어둠보다 더 무서워서.
아직은 아펠도 모르는 비밀 통로이니만큼 최근에 이 길을 지나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게 분명했다.
여기로 드나드는 사람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할 테니 나한텐 좋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찝찝한 기분을 덜 수는 없었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오자마자 몸서리치듯 사지를 흔들어댔다. 한참 관객 없는 막춤을 선보인 내가 이내 숨을 가다듬고 몸가짐을 바로 했다.
“…하지만 지쨔 가깝꾸나, 황궁.”
새삼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 생에서도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이곳을 오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펠을 포함한 황가 인물들의 안위가 슬쩍 걱정될 정도였다.
“나한텐 조으니까 넘어가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가볍게 일축한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먼지까지 대충 털어내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건물이라 인기척은 없었지만 이곳에서 다른 건물로 넘어갈 때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내 목적지인 별궁이라든가.
그래도 그곳은 여기서 가까우니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별궁은 황궁에서 내가 제일 오래 머물던 곳이기도 하고, 여기서 별궁으로 가는 길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으니 안 들킬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예전보다 키가 작아진 만큼 수풀 속에 숨기도 쉽고. 지금처럼!
부스럭.
먼지를 털고 나온 보람도 없이 머리칼에 엉겨 붙은 나뭇잎을 몇 개 떼어내고, 나는 주변 상황을 살폈다. 방금 막 내 앞을 지나간 기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이 완전히 안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면 되겠다.’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수풀 속에 다시금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기사가 코너를 돌았다.
시간 간격을 두기 위해 좀 더 기다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저린 다리를 움직여 방향을 바꾸려던 그때.
“너 누구야?”
등 뒤에서 마치 암살자처럼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선 채 굳어버렸다.
달빛이 만든 그림자가 수풀과 잔디에 얼룩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귀에 설지만 한없이 익숙한 목소리, 분명 이전 생의 첫 만남에서도 들었던 질문.
나는 등에 총이 겨누어진 사람처럼 천천히 돌아섰다. 꼭 나만 한 키의 어린아이. 밤바람에 은빛 파도처럼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사파이어색의 눈동자.
1년이나 빨리 만났구나, 아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