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수첩이 펄럭이다가 떨어지고, 대신 거기 새겨져 있던 마법진만이 허공에 남았다. 곧 내 손끝에서 화려한 마법진이 피어났다.
“연산 완료!”
“피오르!”
“준비됐어!”
곧 위험이 닥칠 것을 눈치챈 듯, 하늘 위에 떠 있던 몬스터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내리꽂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지금.
“윽!”
쾅, 하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나는 바람에 휩쓸린 종이 인형처럼 뒤로 떠밀렸고, 바로 눈앞에 내 몸의 다섯 배는 족히 넘을 듯한 크기의 하피 사체가 떨어졌다.
몬스터 세 마리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추락했다. 나는 마지막 하피의 발에 깔릴 뻔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엄마가 검으로 막아주었다.
“하아… 하아…….”
나는 숨을 고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럴 여유는 부족했다. 엄마가 굳은 얼굴로 설명을 요구하듯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갑작스레 실례했습니다.”
피오르가 나를 대신해 설명했다.
“갖고 계셨던 저 수첩에는 몬스터들을 불러들이는 마법이 걸려 있었습니다. 지금은 역산으로 마법진을 파훼한 상태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럼 그냥 마법진만 파훼하면 되잖아요! 왜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아까 성녀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백작 부인께선 여기서 크게 다쳐야 한다고.”
여전히 기가 찬 듯한 엄마를 위해 피오르가 보충 설명을 추가했다. 그러자 영문 모를 말에 잠시 침묵하던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성녀님이요?”
크게 다쳐야 한다는 말보다 그 호칭이 더 신경 쓰인 모양이었다. 막 숨을 가다듬은 내가 슬쩍 손을 들고 말했다.
“서, 성녀임니다.”
* * *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뻔했지만 다행히 몬스터들이 더 나타나진 않았다.
무장을 갖춘 기사 몇몇이 뒤늦게 나타나 몬스터들의 사체를 수습했고, 엄마는 우리가 부탁한 대로 기절한 척 몽블랑의 등에 업혀 의무실로 향했다.
상황을 극비에 부치라고 엄하게 명령한 뒤, 몽블랑은 치유 마법을 쓸 테니 집중하는 동안 오빠들을 포함해 아무도 이곳에 들여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휴우.”
나는 의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엄마가 어색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비어 있는 침대 시트로 창문을 가린 피오르가 작업을 마치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엄마가 조용히 나를 쳐다보았다. 피오르와 몽블랑도 그녀를 따라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설명하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메드 플뢰데 후작은 제 영지 근처에서 국경을 지키는 아빠의 명성을 질투하여,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는 목적으로 엄마의 목숨을 노렸다.
아내가 목숨을 잃으면 그도 쉬제트 백작령으로 돌아가 영지 관리에 전념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갈레트와 아빠의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아무튼 뢰드그뢰드의 목적은 그랬다.
“그럼…….”
엄마가 어두운 얼굴로 말을 흐렸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다시금 얘기를 정리했다.
“엄마가 무사하다는 걸 알면 앞으로도 께속 이런 일이 일어날 꺼에요.”
“…….”
생각이 복잡해진 듯 엄마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럴싸한 방법을 생각해 두고 있었기에 먼저 입을 열었다.
“걱쩡 마세요. 머리를 크게 다쳐 의식 불명이라고 발표하면 대요.”
“플뢰데 후작이 믿을까?”
“몬스터 하나로는 못 믿었쓸지도요.”
검술에 능한 엄마가 몬스터 한 마리만으로 중태에 빠졌다는 말은 믿기 힘들 테니까.
마법진을 파훼하기 전에 굳이 몬스터를 몇 마리 더 유인한 이유를 밝히자 엄마는 살짝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차분히 물었다.
“그 말이 진짜라는 증거는 있니? 두 분도, 크레페를 어떻게 믿고 협조해 주신 거죠? 성녀라는 건 또 뭐고.”
“엄마.”
내가 엄마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약쏙했죠?”
짧은 되물음에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네가 성녀라는 거구나.”
“의심의 여지는 없습니다.”
피오르가 똑 부러지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몽블랑을 쳐다보자 그 역시 긍정했다.
현 마탑의 연구원과 서약을 한 마법사가 인정한 얘기다. 엄마는 반론하지 않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평범하진 않다고 생각했지. 다섯 살에 마법 수식을 풀었다는 것부터.”
“그, 그럼 작년의 그 연락이 진짜…….”
피오르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새삼 놀라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엄마가 그쪽을 향해 피식 웃고는 손 위에 올라온 내 손을 단단히 잡았다.
“크레페, 언제부터 알고 있었니?”
“확신한 건 얼마 안 됐써요.”
“얘기가 밖에 새어 나갈 가능성은?”
“저택 안에만 있쓰면 갠찮을 거예요.”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고용인을 줄여야 할까?”
도리도리.
몇 차례 문답이 진행되는 동안 엄마의 눈빛이 점점 진지해졌다. 내가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저택 사람들은 걱정하지 마쎄요. 페가수스가 있는 것또 비밀로 해줬는데.”
그렇게 말하자 엄마가 눈을 접어 웃고는 내 볼을 슬쩍 건드렸다.
“그래.”
엄마는 씩씩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럼 전 이제 급히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가면 되겠군요. 두 분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가요?”
“저랑 같이 가실 꺼예요.”
“우리 저택에?”
그들이 집에 올 일이 뭐가 있냐는 듯 엄마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내가 고개를 젓고 정정했다.
“황궁에요. 성녀로서 인사드려야죠.”
짐짓 눈을 치켜뜬 내가 당당히 웃어 보였다.
“폐하께 알현을 신청할 꺼예요.”
【 마탑 대신 가야 할 곳 】
엄마는 다시 몽블랑의 등에 업혀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카눌레는 크게 당황해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으나, 갈레트는 내심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내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 무슨 일은! 빨리 가서 마저 치료받아야지!”
“크레페 너는…….”
“일단 가!”
너는 같이 안 가냐는 말이 나오든, 너는 왜 안 놀라냐는 말이 나오든, 둘 다 내게는 곤란한 질문이었다.
나는 다급히 갈레트를 떠밀어 마차에 태웠다. 갈레트가 다시 물어보려는 듯 입술을 뗀 그때, 다행히 키슈가 먼저 펑펑 울음을 터뜨려 타이밍이 사라졌다.
“흐윽, 제가 따라 나갔어야 했는데! 이, 이 멍충이들만 딸려 보내서 죄송해요, 수플레 님!”
피오르가 잠깐 발끈하는 모습이 포착되긴 했지만 급박한 분위기를 깰 정도는 아니었다.
카눌레는 이 상황을 전혀 의심하지 못하고 있었고, 기사들은 굳은 얼굴이었으며, 키슈는 이미 상을 치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어쩌다 보니 허접한 깜짝 카메라를 진행하게 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 그래, 일단 가자.”
결국 아직 어린아이인 갈레트도 이 분위기에 휩쓸려 긴장한 모양이었다. 파타슈도 브라우니를 안은 채 초조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먼저 가, 빤리!”
나는 은근슬쩍 브라우니를 빼앗고 갈레트와 파타슈를 재촉했다.
그것을 목격한 키슈가 파타슈와 갈레트를 왼손 오른손에 하나씩 잡았다. 그러고는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억척스럽게 그들을 마차에 태운 후 몽블랑에게 내 안전을 부탁했다.
“빨리 와야 돼!”
“…….”
“네, 금방 가께요!”
차마 키슈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몽블랑을 대신해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멀어지는 마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 후, 남은 기사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몽블랑과 피오르를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
“갑씨다!”
“…목적지는 황궁이겠죠?”
몽블랑의 질문에, 나는 무슨 당연한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택에 도착하는 대로 엄마가 사정을 얘기해 줄 테니 그쪽 상황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갈레트와 카눌레의 반응이 어떨지는 조금 신경 쓰였지만.
아마 갈레트는 내가 집에도 안 들르고 황궁으로 향한 것에 단단히 삐칠 테고, 카눌레는 엄마가 중태에 빠졌다고 거짓말한 걸 괘씸하게 생각하겠지.
“수플레 님께 털어놓기가 망설여지진 않던가요?”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몽블랑이 문득 입을 열었다.
“머가요?”
“누군가가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말까지 거리낌 없이 하시더군요.”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구 약속했었쓰니까요.”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몽블랑은 아리송해하는 얼굴로 두 번째 질문을 꺼냈다.
“혹시 수플레 님께서 그 말을 믿지 않으셨다면 어쩔 생각이셨습니까?”
“그런 걱정은 안 했써요. 엄마는 다섯 살짜리가 마법 수식을 풀 쭐 안다고 해도 믿어주시거든요.”
나는 보일 듯 말 듯 하게 웃었다. 나에 대한 엄마의 신뢰와 애정은 따뜻했고 한편으로는 무거웠다.
아마 조금만 더 추궁당했다면 나는 내가 겪은 모든 일을 털어놓고 그녀의 허리에 매달려 엉엉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마라면 나한테 편히 쉬라고,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줬겠지.
행동도 선택도 못 하고 어물쩍하다가 불행해지는 삶의 반복은 이제 사양이었다.
“그래두 죄송하긴 해요. 아픈 척 조용히 있는 것또 쉽진 않을 테니까.”
암살을 피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애초에 암살할 가치가 없게끔 보이는 것이다.
루아 요새에서 엄마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이유가 수첩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별다른 조치 없이 몽블랑을 따라왔다.
함부로 운명을 바꾸려고 했다가 내가 모르는 방향으로 운이 틀어질까 봐 선택한 안전책이었다.
당장 내게는 타국의 귀족을 처벌할 만큼의 힘도 증거도 없다. 엄마는 뢰드그뢰드의 정보망을 피해 저택에서 몇 달, 어쩌면 몇 년 동안이나 은신해야 할지도 모른다.
착잡한 마음에 마차 밖 마을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수확의 계절이니만큼 민가 곳곳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못 먹었네.
“크흠.”
내 착잡함을 눈치챈 듯, 피오르가 헛기침을 하고는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럼 성녀님께서는 작년부터 마법을 쓸 줄 알았던 겁니까?”
“아뇨, 선생님도 보셨자나요. 제가 마나를 못 다루는 거. 그냥 마법 수식만 만들 쭐 알았던 거예요.”
“그렇습니까…….”
피오르가 말끝을 흐리며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내 기분을 살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그에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을까 싶어 기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을 듣자마자 피시식 웃음을 터뜨렸다.
“마탑에는 들어오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