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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57)화 (157/181)
  • 157화 

    지난 생 마지막, 치유 마법 한정이긴 했지만 나는 이 귀걸이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갈레트보단 내게 더 필요한 물건이 되리라는 내 예상도 들어맞은 셈이었다.

    물론 내게 갈레트만큼의 머리가 없다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아마 갈레트였다면 메이플 시럽 001 버전으로도 충분히 마법을 쓸 수 있었겠지?

    “…정말 괜찮겠습니까?”

    잠시 말이 없던 피오르가 물었다.

    “머가요?”

    “내일이… 크흠, 위험하다면서요.”

    그가 파타슈를 흘끗 곁눈질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파타슈는 피곤한 듯 미동 없이 엎드려 있었지만 그럼에도 피오르가 편히 얘기를 꺼내기엔 불편했던 모양이다.

    우리 엄마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는 그 이야기를 피오르와 몽블랑에게만 전해둔 상태였다. 파타슈야 아직 어린애였고, 키슈는…….

    사실 조금 못 미더워서.

    “괜차나요. 그러려고 왔는데.”

    “이곳에 수련하러 왔다는 뜻입니까? 그런 거라면 마탑이 더 좋은 곳이었을 텐데.”

    내 말뜻을 적당히 이해한 피오르가 부언했다. 나는 갸우뚱하는 피오르를 보며 피식 웃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한 후 다시 의자에서 내려왔다.

    “다 쉬었써요. 이번엔 꼭 성공해야지!”

    나는 씩씩하게 발을 구르고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래, 성공해야지.

    그러려고 시간을 거슬러 온 거니까.

    * * *

    언젠가 언급했듯 루아 요새는 쉬제트 백작령 남동쪽에 있었다.

    피오르는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기절하기 싫었던 내 반대로 인해 함께 마차를 타기로 했다.

    청명한 날씨의 가을바람에선 상쾌한 냄새가 났다. 나는 승마할 때처럼 편한 바지와 허벅지까지 덮는 상의를 입고 자연스레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피오르와 키슈네가 한 대, 나와 몽블랑이 한 대를 쓰기로 했다.

    아침 해가 구름에 가리는 걸 가만히 보다 보니 몸이 조금씩 느른해졌다. 하품이 막 터져 나오려던 찰나 몽블랑이 입을 열었다.

    “절 탓하지 않으시는군요.”

    “하암……?”

    참지 못하고 하품을 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몽블랑이 어색한 표정을 다잡고 다시 말했다.

    “제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묵인한 게 화나진 않습니까?”

    “후작님은 그냥 체념한 것뿐이에요.”

    이번 생에서 지난 일에 대해 말씨름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몽블랑 역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루아 요새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했기에 나는 낯선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계속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드릉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분명 내 코에서 난 소리였다.

    “…….”

    민망한 마음에 눈치를 보니 몽블랑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나는 슬쩍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익숙한 방벽을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아, 다 왔…….”

    “크레페에에에!”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어린애 하나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몽블랑의 사병들이 막아섰다가 상대를 확인하고 길을 터주었다.

    “마차를 세워라.”

    몽블랑이 지시하자 갈레트는 기다렸다는 듯 창문 옆에서 강아지처럼 폴짝거렸다.

    “뭐야, 편지에선 이런 얘기 없었잖아! 내가 너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치사하게 엄마랑만 얘기하고, 이렇게 갑자기……!”

    “오, 오빠, 학교는?”

    “우리 동생이 오는 날인데 학교가 문제야?”

    “문제다!”

    카눌레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내 심정을 대변했다.

    난장판 같은 상황에서 몽블랑의 사병이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갈레트가 들러붙었다.

    “윽.”

    카눌레가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엄마가 다가와 몽블랑에게 예를 표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폐를 끼쳤군요.”

    “별말씀을요.”

    “엄마, 혼자 오라구 했자나요!”

    나는 들러붙은 갈레트를 뿌리치는 데 실패하고 그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발을 움직였다. 힘들게 엄마에게 다가가 그녀의 옷자락을 당기자 갈레트가 무슨 섭섭한 말을 하냐며 내게 볼을 비비댔다.

    “그러려고 했는데… 나도 설마 갈레트가 학교까지 빠질 줄은 몰랐어.”

    엄마가 민망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간다는 말이 귀에 들어가면 갈레트도 따라 나오겠다고 방방 뛸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나는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에만 조심스럽게 적어 방문 소식을 전달했다.

    이제 보니 그 정도로 갈레트를 따돌릴 수는 없었던 것 같지만.

    “피이익!”

    그 순간 우리가 선 길목 양옆으로 펼쳐진 숲 쪽에서 매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몬스터 소리 같기도 한 괴성이 들렸다.

    “일단 드러가서 얘기해요! 얘기할 게 많이 남았거든요.”

    내가 엄마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 * *

    “마탑 연구원인 피오르입니다.”

    “아, 피오르 님. 처음 뵙겠습니다. 수플레 슈 살레 루아입니다. 쉬제트 백작 부인이라고 불러주세요.”

    엄마가 피오르와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고 우리를 쭉 둘러보았다.

    우리 삼 남매에 키슈, 파타슈, 브라우니, 피오르, 몽블랑까지.

    평소 이렇게 많은 손님을 받을 리 없는 작은 요새였기에 접대실은 조금 좁게 느껴졌다.

    엄마는 아이들로 바글바글한 소파를 둘러보다가 앉을 자리도 찾지 못하고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을 맞기엔 많이 부족해서.”

    “저야말로 갑자기 찾아와서 면목 없습니다.”

    “수플레 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잠깐 밖을 걸으며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키슈, 네가 여기에서 다른 분들을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피오르의 대답에 이어 몽블랑이 권유했다.

    “몬스터의 습격에 대비한 요새라 함부로 나가기에는…….”

    엄마는 난색을 표하며 에둘러 거절했다.

    내가 루아 요새에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서 엄마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핑계를 댔기 때문이었다.

    아마 엄마는 그냥 나를 데리고 바로 저택에 돌아갈 생각이었겠지.

    그러나 예정과 달리 피오르라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고, 다소 위험한 요새에서 아이를 네 명이나 보살피게 된 상황이었다. 신경 쓸 요소가 많아진 만큼 엄마도 쉽게 요청을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몽블랑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엄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살폈다.

    “괜찮으니 다녀오세요.”

    잠시 베이비시터가 된 키슈가 웃으며 답했다. 엄마가 감사 인사를 하고는 몽블랑, 피오르와 함께 접대실을 나갔다.

    “그 귀걸이는 뭐야?”

    “옷도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른들 수가 줄자 기다렸다는 듯 갈레트와 카눌레가 내게 말을 붙였다.

    “귀걸이는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거. 옷은 후작님이 맞춰주셨써.”

    “아주 살림을 털어 왔구나.”

    카눌레가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혀를 찼다.

    “선생님?”

    갈레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같이 있떤 피오르 선생님.”

    간단히 답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얼마 안 있어 1층 문으로 엄마가 나왔다.

    나는 파타슈에게 짧게 눈짓한 후 바로 몸을 틀어 책상 서랍을 뒤져보았다.

    “크레페 님!”

    “뭐, 뭐 하는 거야?”

    키슈와 카눌레가 당황해 외쳤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없고, 아니고, 아니야. 역시 엄마가 갖고 있겠구나.

    빠르게 수첩의 소재를 파악한 내가 집무실을 뛰쳐나가려 방향을 틀었다.

    “어디 가시려구요?”

    키슈가 짐짓 엄격한 얼굴로 문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슬금슬금 게걸음을 쳐 파타슈의 품에 안긴 브라우니의 등 위에 손을 올렸다.

    “삐?”

    내 손바닥 아래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게 보여서인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서인지 파타슈가 으악, 소리를 내며 자리를 피했다.

    금방 브라우니의 모습이 일반 말처럼 거대해지며 소파가 뒤로 밀렸다.

    갈레트와 카눌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이, 내가 키슈를 가리키며 외쳤다.

    “브라우니, 막아!”

    “푸릉!”

    대답처럼 투레질한 브라우니가 나와 키슈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집무실을 뛰쳐나왔다.

    으휴, 갈레트랑 카눌레만 없었어도 이런 식으로 탈출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 * *

    “크레페?”

    내 모습을 발견한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 몽블랑이 중요한 사안이라고 운을 뗐기 때문인지 그들 곁에 다른 기사는 없었다. 나는 후다닥 그들을 떠밀어 요새의 성문 밖으로 향했다.

    “뭐 하는 거야, 얌전히 올라가 있어.”

    “급한 일이에요!”

    “괜찮습니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몽블랑이 내 말을 거들자 엄마는 당황한 듯했다. 그가 설명하는 대신 요새의 관문을 지키던 기사에게 물었다.

    “열어주시겠습니까?”

    요청을 받은 기사가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 문이 열렸다.

    하지만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엄마는 기사들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조금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엄마, 쪼금만 더…….”

    내가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기자 엄마는 더 이상 이 상황에 끌려갈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히 내 손을 뿌리쳤다.

    “후작님, 일대의 몬스터 토벌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더 멀어졌다간 두 분은 물론이거니와 제 딸까지 위험해질 겁니다.”

    “끼이익!”

    엄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초조해진 내가 숲을 돌아보려 하자 엄마가 내 어깨를 꽉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괜찮아, 크레페. 내가 지켜줄 테니까.”

    “…….”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내 눈빛이 흔들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다시 요새 안으로 들어가려 방향을 틀었다.

    “수플레 님, 제가 선물해 드린 수첩, 갖고 계십니까?”

    “…예. 크레페가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서.”

    몽블랑과 엄마의 문답을 들은 내가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낌새를 눈치챈 피오르가 마나를 퍼뜨렸고, 나는 곧바로 엄마의 품에서 수첩을 찾아냈다.

    “왜…….”

    엄마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쉬익―

    몬스터의 날갯짓에 바람이 일어 머리칼이 휘날렸다.

    “윽.”

    엄마가 외마디 신음과 함께 날 껴안았다. 하지만 하피처럼 생긴 몬스터는 곧바로 우리를 공격하는 대신 한차례 위로 솟아올랐다.

    엄마는 바람이 잦아들자마자 상황을 살피고 내 팔을 세게 끌어당겼다.

    “어서 돌아가자. 여긴 위험해!”

    “엄마.”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끌려가지 않도록 버텼다. 엄마가 당황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곧바로 검을 뽑아 몬스터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엄마를 저지한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엄마는 여기서 크게 다쪄야 해요.”

    “뭐?”

    “위험합니다.”

    몽블랑이 한 걸음 다가와 공중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다. 피오르가 재빨리 보조 마법진을 띄워 가까이 다가온 몬스터를 뒤로 밀어냈다.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내가 바라던 대로였다. 나는 그들과 시선으로 신호를 주고받은 뒤, 한 손으로 귀걸이를 쥐어 작동시켰다. 증폭진을 띄우고 거기에 수첩을 가져다 대자 숲에서 몬스터 두 마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끼에엑!”

    소름 끼치는 괴성과 퍼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

    위협적인 분위기였지만 나는 몸을 움츠리는 대신 눈을 부릅떴다. 풍압이 거세지자 내 몸이 바람에 떠밀려 비틀거렸다.

    “크레페!”

    엄마가 나를 꽉 붙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안 하면, 여기서 엄마가 죽을지도 몰라.

    나는 엄마의 팔을 뿌리치고 공중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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