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56)화 (156/181)
  • 156화 

    “거대화에 성공하셨군요. 키슈가 보면 난리를 치겠네요.”

    몽블랑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브라우니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우쭐한 표정으로 둥실 떠오르려던 그때, 몽블랑이 말 꼬리를 잡고 풍선처럼 끌어 내렸다.

    “킁?!”

    “여기선 안 됩니다. 들켜요.”

    브라우니가 대리석 바닥에 미끄러질 뻔한 애완견처럼 후다닥 중심을 잡았다.

    “푸릉!”

    기 싸움에서 졌다고 생각한 듯 브라우니가 뒷발차기를 날리려던 찰나, 내가 녀석의 몸에 손을 올렸다.

    “푸릉… 쀼?”

    브라우니가 순식간에 도로 작아졌다. 순간 당황한 녀석이 눈을 꽉 감고 다시 덩치를 키우려 끙끙댔지만 실제로 변하진 않았다. 아직 혼자 거대화하기는 힘든 듯했다.

    “삐이! 삐이이!”

    결국 브라우니는 내 주변을 빙빙 돌며 불만을 표출했다. 내가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 하찌만 후작님 말처럼 들키면 안 되잖아.”

    “삐유우…….”

    시무룩해진 브라우니가 파타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몽블랑이 내게 말을 붙였다.

    “마구를 완성한 겁니까? 능숙하시군요.”

    “감사함니다. 괜찮았쬬, 선생님?”

    내가 밝은 얼굴로 피오르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감격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가 그제야 감정을 추스르고 대답했다.

    “…이 정도면 혁신이지요. 훈련만 계속한다면 특정 마법 몇 가지 정도는 큰 딜레이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와아!”

    기대했던 대답을 들은 내가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리고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 브라우니 옆에서 방방 뛰었다.

    “근데 여긴 무슨 일이야?”

    피오르가 몽블랑에게 물었다. 은근슬쩍 브라우니의 앞발을 잡고 기쁨의 댄스를 리드하던 나도 뒤늦게 몽블랑을 쳐다보았다.

    “크흠, 실례를 무릅쓰고 성녀님께 여쭤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저한테 물어보실 꺼요?”

    고개를 갸우뚱하자 몽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서 말이죠.”

    “아, 재, 재송해요. 생각보다 귀걸이 제작이 오래 걸려서…….”

    내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곤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면 생판 남인 사람들과 같은 건물에 산다는 건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나와 페가수스에 대한 얘기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단속을 하는 것도 어려울 테고.

    지금도 우린 야외 연무장이 아닌 도서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고용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몽블랑이 도서관 중앙을 통째로 치워 연무장 뺨칠 만한 공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게다가 자칫 황제의 귀에 들어가 애먼 오해라도 받으면…….

    “아니,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저자세로 나오자 몽블랑이 잠깐 당황한 듯 고개를 젓고 헛기침을 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러면서 그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한 번 열린 흔적이 있는 그것은 쉬제트가의 인장으로 봉해져 있던 서신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펼쳐 보았다.

    몽블랑 후작님께, 라는 예의 있는 첫인사로 시작된 편지는 후반으로 갈수록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의 내용이 되었다.

    […아무래도 후작 아저씨님께선 훌륭한 요리사가 될 자질을 가지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동생을 어찌나 잘 구워삶으셨는지, 언젠가 그 방법에 대해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재송합니다.”

    마지막까지 읽은 내가 종이를 곱게 접어 갈무리하고 허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가족 입장에선 걱정될 만하죠. 이렇게 오래 머물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게다가 처음 편지에선 제법 예의 차린 티가 나더라고요. 최근 마음이 급해졌는지 서서히 본성을 드러내는 게 재밌기도 했고 말이죠.”

    몽블랑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처음 편지’라면 이게 첫 서신도 아니라는 소리였다.

    후작님으로 시작해 놓고 아저씨님이라는 괴상한 호칭으로 변한 게 웃겼다는 건가?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갈레트의 가시 돋친 말도 그에게는 깜찍한 반항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물론 오빠가 깜찍한 건 사실이지만 이건 좀.

    “으음, 제가 오빠 교육을 더 잘 시켜써야 했는데, 실례가 많았네요.”

    결국 내가 재차 사과했다. 그러고 나니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피오르가 괴상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성녀는 원래 이런 겁니까?”

    “머가요?”

    “애늙…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두루뭉술한 물음에 되묻자 그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가 얼버무렸다. 실례되는 말을 할 뻔한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지만, 이미 난 그가 하려 했던 말을 눈치챈 후였다.

    …그래도 모르는 척해 줄까.

    “크흠, 그래서 마탑에는 언제쯤 들어올 생각이십니까? 요청하신 마구도 완성했으니 곧 출발하시겠죠?”

    피오르가 헛기침을 하고 화제를 돌렸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요.”

    “아,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실 생각이라면…….”

    나는 손을 들어 피오르의 말을 막았다.

    그가 하려는 말도 이해는 갔다. 역사적으로 성녀는 마탑에서 폐관 수련 비슷한 수행의 길을 걸었으니까.

    하지만 성녀라고 공표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엄마한테 루아 요새에서 보자고 편지 쓰께요.”

    그렇게 말하며 몽블랑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그가 순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힘들게 입을 열었다.

    “…역시 그것도 신탁으로 들으셨나 보군요.”

    조금 잘못된 말이긴 했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파타슈와 피오르가 말뜻을 모르고 의아한 기색을 내보였지만 나는 설명하지 않았다.

    엄마가 암살 위험에 처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건 엄마가 루아 요새에 시찰을 나가는 게 그때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올해 시찰을 나간다고 하면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도 올해가 될 것이다.

    지금은 이미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이 술수를 쓴 후였으니까.

    엄마의 수첩에 걸려 있는 마법. 몽블랑이 묵인한 엄마의 암살 위험.

    당장 황제에게 내 존재를 고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 있었다.

    지금 내가 마탑으로 들어가게 되면 엄마의 암살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보름 후에 루아 요새에서. 괜찮으시까요?”

    “그러죠.”

    몽블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피오르는 그가 도서관을 나간 후에도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내가 피오르를 보며 짝, 박수를 쳤다.

    “선생님!”

    “에, 예?”

    “보름이요. 그때까지 마법을 쓸 쑤 있어야 해요!”

    “예에, 알겠습니다.”

    내가 결연히 말하자 피오르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눈 이만…….”

    대화에도 못 끼고 쭈뼛거리던 파타슈가 슬쩍 끼어들었다. 하지만 나는 몽블랑이 나간 문 앞을 몸으로 가로막고 그와 브라우니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제 상대를 해쭈셔야죠!”

    “에?”

    【 여섯 살이 암살을 막아내는 법 】

    “그게 아니라니까! 요!”

    피오르가 반말도 존댓말도 아닌 문장을 구사하며 큰 소리를 내고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그가 곧바로 바닥에 마법진을 띄웠다. 착시 현상이 생길 정도로 복잡한 육각형 진이었다.

    “여기,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피오르가 마법진 이곳저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지적한 부분을 찾으려 노력했다.

    “여기……?”

    “여기!”

    “…선생님. 저 눈이 침침해요.”

    휴식 선언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꺼내자 피오르는 순간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물론 내 말은 과장도 엄살도 아니었다. 마법진은 그의 손가락보다 가는 선으로 그려져 있었고, 이미 사라진 내 마법진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단기 기억력이 좋지도 않았다.

    아마 옆에 내 마법진을 나란히 띄워놓는다고 해도 이런 틀린 그림 찾기는 무리일 것이다.

    “하아. 아무튼 그 부분이 달랐어. …요.”

    피오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는 침침한 눈을 소매로 비비며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도서관 의자를 빼서 앉았다.

    “잠깐 쉬께요…….”

    나는 피오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파타슈도 내 옆 의자에 기어 올라와 브라우니를 책상에 올리곤 두 팔을 포개 엎드렸다.

    나와 파타슈의 머리는 서로의 마력이 만들어낸 바람으로 산발이 된 채였다. 방금 전까지도 우리는 각자의 마나와 마법을 이용해 대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파타슈, 브라우니가 마법 대련을 하면, 피오르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련이 끝난 후 우리에게 잘못된 부분을 알려준다. 그것이 최근의 수업 방식이었다.

    마나를 쓰느라 기진맥진한 우리와 달리 브라우니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녀석이 걱정스러운 듯 우리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주둥이로 머리나 팔을 툭툭 건드렸다.

    “크흠, 그래도 대단하십니다. 제가 제대로 가르쳐드리지도 못했는데 2주 만에 이만큼 발전하다니.”

    어린애 둘을 녹초로 만든 피오르는 그제야 이성을 되찾은 듯 헛기침을 했다.

    나는 순식간에 제대로 된 존댓말을 쓰는 그에게 뭐라 대꾸할 기력도 없이 의자에 그대로 늘어져 있었다.

    그냥 반말을 쓰면 편할 텐데, 역시 내가 성녀라는 게 불편해서 그렇겠지? 키슈의 태도는 똑같던데 말이야.

    하긴 신탁의 서를 불태우려고 했던 사람과 운명 알기가 무서워서 마법 서약도 안 한 사람을 비교하는 건 반칙일지도.

    아무튼, 나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피오르의 감탄 어린 말이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피오르는 스승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인재였지만 마탑 마법사로서의 제약이 있었다. 마탑에서 전수받은, 마법진이나 마법 수식에 관련된 지식을 마탑 소속이 아닌 내게 알려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교수법을 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마탑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내가 이렇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역시 성녀라는 건가…….”

    신기한 동물 보듯 날 뜯어보던 그가 파타슈에게도 경탄 어린 말을 했다.

    “아, 너도 인상 깊었다. 키슈가 왜 널 그렇게 끔찍이 아끼는지 이해가 돼. 마법 수식을 하나도 계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순수 마력만으로 증폭된 마나를 막아내다니…….”

    마법이 안 통하는 브라우니를 방패로 삼을 때도 있었지만, 확실히 파타슈의 깡다구와 마나 컨트롤 실력은 천재급이었다. 피오르는 말을 맺지도 못하고 질린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제대로 마법을 써보니까 알겠다.

    순수 마나를 자기 몸처럼 운용할 수 있는 파타슈, 짧은 시간에 마법진을 계산해 내는 갈레트, 마법진이고 뭐고 그냥 마나양이랑 밀도로 눌러버리는 아펠.

    세 명은 각기 다른 장점이 있는 천재였다는 것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