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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55)화 (155/181)
  • 155화 

    * * *

    “시종이라니, 무슨 그런 오해를.”

    몽블랑이 차마 웃지도 못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포트 앞에 꼬마 하나 달랑 마중 나와 있는데, 그럼 내가 뭐라고 생각했겠냐. 네가 양자를 들였다는 소문도 못 들었는데.”

    피오르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찻잔을 입에 댔다. 이내 잔을 내려놓은 그가 순간 움찔했다. 파타슈와 키슈가 꼭 닮은 표정으로 피오르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꼬마는 꼬마라는 말을 싫어하는 법이니까.

    게다가 피오르는 어린애를 딱히 귀여워하는 성정도 아니었으니, 파타슈를 대하는 데 서투른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네 아드님한테 실례되는 착각을 해서.”

    “쯧, 알면 됐어.”

    키슈가 뻔뻔하게 대답하고 의자를 당겨 파타슈에게 바싹 붙어 앉았다. 그러자 파타슈도 더 화내지 못하고 입술만 비죽 내민 채 눈을 돌렸다.

    “이쪽 분은……?”

    피오르가 그다음 화젯거리로 날 선택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내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브라우니의 엄마임니다.”

    “아아, 그래서 와 계셨던 거군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접대실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슥 훑어보았다.

    “…근데 혼자십니까?”

    보호자를 찾는 듯한 그의 말에 내가 미소를 머금고 담담히 대답했다.

    “제 보호자는 언제나 저와 함께하신담니다.”

    “예?”

    피오르가 무슨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콧잔등을 찌푸렸다. 나는 짐짓 경건하게 두 손을 모아 쥐었다. 파타슈의 표정이 괴상해지는 게 꽤나 재밌다.

    “크흠. 내가 중요한 소식이 있다고 했지?”

    몽블랑이 말문을 뗐다. 그 말을 들은 피오르가 반사적으로 파타슈의 품에 안겨 있는 브라우니를 쳐다보았다.

    ‘페가수스 얘기가 아니었어?’라고 말하는 듯한 반응을 보고, 키슈가 웃음을 삼키며 두 손으로 날 가리켰다.

    “성녀님이셔.”

    “…….”

    피오르는 내가 본 것 중 제일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헤벌렸다. 순간 적막이 찾아왔지만 아무도 그에 반응하지 못했다.

    잠시 후 피오르가 고개를 털고 안경을 고쳐 썼다.

    “노, 농담이지? 성녀는 무슨, 이런 꼬마…….”

    그가 내 눈치를 보더니 도리질을 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어린애가?”

    고쳐 말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단어 선택이었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안 믿어도 갠찮으니 가져온 걸 보여주시게써요?”

    “…이거 말입니까?”

    피오르는 여전히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품 안에서 물건을 꺼냈다.

    얇은 금속 철사와, 마법진이 새겨진 투박한 흑요석.

    흠, 이게 시제품이로군.

    나는 그것들을 건네받아 찬찬히 살핀 후 고개를 주억거렸다.

    “철사는 이대로 쓸 쑤 있겠네요. 하지만 보석 쪽은 마법진을 수정하는 게 조을 꺼 같아요. 이대로는 변쑤가 너무 많아서 병렬식의 연산 속도가 안 맞을 거예요. 일단 용도를 확정해서 필요 부냐에만 사용하도록 제한할까 하는데, 시안을 보여드릴 테니 개선을 도와주시게써요?”

    그러자 피오르가 재차 입을 떡 벌리고는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성녀를 대하는 태도라고 하기엔 무례했지만 몽블랑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널 부른 게 이분이야. 황제 폐하께도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으니 당분간은 비밀로 해줘.”

    “저를 콕 집어 불렀다고요?”

    피오르가 얼떨하게 손을 거두었다.

    “몽블랑이나 키슈에게 부탁했으면 이 정도 물건들은 금방 구했을 텐데…….”

    나는 고개를 젓고 파타슈 쪽으로 양팔을 뻗었다. 파타슈의 품에 안겨 꾸벅꾸벅 졸고 있던 브라우니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한 팔로 녀석을 안고 다른 손으로는 피오르에게서 받은 얇은 철사를 들었다. 그것을 브라우니에게 가져다 대자 곧 철사 위에 뜻을 알 수 없는 문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건 문제 없겠찌만,”

    내가 철사를 팔목에 감은 후 흑요석을 손에 쥐었다.

    “이건 혼자 배우긴 힘들거든요.”

    나는 흑요석을 쥔 손을 피오르에게 내밀며 당돌하게 웃었다.

    “가르쪄주셔야죠, 선생님.”

    * * *

    피오르가 도착하고부터는 나도 할 일이 많았기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내가 깨달았을 땐 이미 가을이 다 되어 있었다.

    “와, 쩌거 봐요, 선생님. 벌써 단풍이 지는 거.”

    “쉿.”

    피오르가 내 감탄을 막고는 세공 작업에 집중했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쩝, 소리를 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 소리가 저를 부른 거라고 생각한 듯 브라우니가 내게 다가왔다.

    “삐.”

    “쉬잇. 갠차나아.”

    브라우니를 조용히 시키고 피오르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그의 작업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양손으로 브라우니의 갈기를 슥슥 쓰다듬자 왼쪽 손목에 감아놓은 철사가 잘랑거렸다.

    전에도 나와 아펠이 유용하게 사용한 그 팔찌였다. 착용자의 마나 패턴에 따라 겉모양이 바뀐다고 했지만 마법을 쓸 수 없는 내 팔에선 그냥 민짜 철사일 뿐이다.

    “나가 이쓸까요?”

    숨 막히는 적막 속에 파타슈가 속닥거렸다. 그 말이 들린 걸까 싶은 타이밍으로 피오르가 제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말했다.

    “기초 작업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써요!”

    밝게 대답한 내가 책상에 올려뒀던 종이를 피오르에게 건넸다. 풍경을 감상하기 전에 진작 계산해 놓았던 마법 수식이었다.

    나는 피오르가 내 수식을 검산하는 동안 그가 작업하던 책상을 기웃거렸다. 메이플 시럽 색깔의 토파즈가 석고 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피오르에게 갖다 달라고 부탁한 철사와 흑요석.

    철사와 달리 마법진이 각인된 흑요석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제품의 활용법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새겨져야 할 최종 형태의 마법진이 어떤 모습일지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 갈레트가 사용하던 토파즈 귀걸이를 본 적이 있었으니까.

    “확실히 저번 것보다는 쉽겠군요. 위력은 떨어지겠지만.”

    피오르가 검산을 끝낸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수학 공식이 어려워서 기절하눈 건 한 번으로 족해요.”

    나는 나지, 갈레트 같은 천재가 아니니까.

    내가 쓰려면 마법진이 더 쉬워야 한다는 건 이미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았다.

    귀걸이를 걸자마자 눈앞이 팽그르르 돌 정도의 정보가 쏟아지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실수로 누른 클릭 한 번에 광고 팝업이 끝없이 떠오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역씨 공부는 너무 위험해.”

    파타슈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자 피오르도 동조했다.

    “…크흠. 천천히 마무리하죠.”

    “네.”

    내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오르는 마법 수식이 적힌 종이를 책상에 내려놓고 토파즈를 석고 틀째로 미세하게 움직였다.

    절삭기로 절단하고 연삭기로 표면을 깎아 다듬은 토파즈는 보석으로서 이미 완성형이었으나 마법 도구로서는 아직이었다.

    섬세한 다이아 칼로 토파즈에 손수 마법진을 새기는 작업이 시작됐다.

    아까보다 집중력이 필요한, 세밀한 작업이었으나 피오르는 보석 세공 장인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능숙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분야에 대해 전혀 모르는 내가 옆에서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올 정도라고 해야 하나.

    “…이거면 됩니까?”

    한참 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을 넘기며 피오르가 나를 돌아보았다.

    작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파타슈와 브라우니를 돌보고 있던 내가 그에게서 귀걸이를 건네받았다.

    “써보께요.”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건네받은 것을 귀찌처럼 귀에 갖다 댔다. 그러자 딸깍 소리와 함께 통통한 귓불에 무게가 느껴졌다.

    “흐읍, 후우.”

    천천히 심호흡한 내가 눈을 부릅떴다.

    좋아, 일단 여기까진 성공이군.

    첫 작품인 메이플 시럽 001(나 혼자 붙인 이름이다)을 착용했을 때는 내 머리가 마법진의 연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두통으로 기절 직전까지 갔다.

    002 버전에선 공기 중의 마나 흐름까지 육안으로 보이는 바람에 일상생활이 안 될 지경이었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쳐 이번에 겨우 007 버전을 만든 참이었다.

    “괜찮습니까?”

    피오르가 걱정스럽게 물어와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 옆으로 손을 뻗었다.

    파타슈가 폭발물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브라우니를 내게 건네주었다.

    “쀼!”

    씩씩하게 대답하는 녀석의 등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귀여움에 홀려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다간 주변에 콩알탄을 뿌린 듯한 폭발이 일어날지도 몰랐으니까.

    그게 아마 005 버전 테스트 때였나.

    “집중!”

    “옙!”

    피오르가 내 집중력이 흐트러지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의 엄격한 목소리에, 나는 다시금 집중하며 마나를 느껴보았다. 브라우니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혈류 같은 흐름과 내 몸 주변을 떠도는 공기.

    나는 서서히 눈을 뜨고 마법 수식을 계산했다.

    자연 마력의 감지, 육감을 이용한 인식, 신체 내부로 흡수 후 순마나로 응축, 전환.

    말이 쉽지, 감지와 응축과 정화 수식을 동시에 계산해야 하는 터라 몇 번이고 집중력이 흐트러질 뻔했다. 계산기 사용이 허락된 수학 경시대회에 나온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실수는 엄금입니다! 첫 작동이 기본 수식을 설정한다는 것 잊지 마시고요.”

    “…….”

    나는 대답할 정신도 없이 집중했다. 그의 말대로 첫 작동에 오답이 생기면 007 버전도 폐기였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최고급 토파즈가 예쁜 돌덩이로 변한다는 거지.

    나는 영혼에 새겨진 서민 근성으로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금색의 빛줄기가 브라우니의 몸통 위에 마법진을 만들었다.

    “우와……!”

    파타슈의 탄성과 함께 브라우니의 몸이 훅 커졌다. 덩치에 밀린 내가 뒤로 물러나자 어느새 브라우니는 듬직한 성체 페가수스가 되어 있었다.

    “푸릉!”

    “드디어!”

    감격한 듯한 피오르의 외침과 동시에 나는 귀걸이를 잡고 작동을 정지시켰다. 브라우니도 즐거운 듯 내 주변을 한 번 돌고 내게 고개를 비비적거리려 했다.

    “악!”

    하지만 말이 된 브라우니는 망아지 때와 달랐다. 내가 비명을 지르며 도서관 문 쪽으로 넘어지려던 때였다.

    달칵.

    “이런, 조심하셔야지요.”

    마침 이곳을 찾아온 몽블랑이 내 등을 받쳐주었다.

    “휴우, 고마씀니다.”

    “별말씀을요.”

    나와 몽블랑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파타슈는 합체 로봇을 처음 본 아이처럼 입을 벌리곤 제 눈높이보다 높게 올라온 브라우니의 등을 토닥여 보았다. 브라우니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발을 구르며 투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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