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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54)화 (154/181)
  • 154화 

    몽블랑은 어머니의 사망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마탑에 들어간다. 가문명을 신께 봉헌한 어머니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가 무엇이길래 하는 반항 어린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마탑에 들어갔을 때, 따지자면 그는 무신론자에 가까웠다. 그토록 독실하던 모친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니 신이라는 존재에 의구심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마탑에서 자신의 소예언서를 발견한 순간, 몽블랑이 느낀 허무함과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결국 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장난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

    순전히 마법이라는 힘에 매료되어 자의적으로 마법 서약을 한 키슈와는 달랐다. 몽블랑의 서약은 온전히 체념의 의미였다.

    하지만 나는 그가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운명은 정해진 결과가 아니라는 것.

    “저는 그 운명을 바꾸러 온 거예요.”

    고개를 젓고 그 말을 꺼내자마자 몽블랑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 말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들릴지도 몰랐다.

    “할 수 있써요.”

    나는 아이를 가르치듯 차분히 말했다.

    이젠 나도 알 수 있었다.

    ‘아펠이 폭군이 되는 미래를 바꾸겠다’는 내 말에, 몽블랑이 어째서 웃음을 터뜨렸는지. 그리고 왜 나를 도와주겠다고 마음을 굳혔는지.

    운명을 믿지 마세요.

    그 한 문장을 듣고 날 저택에 머물게 해줄 정도로, 그 역시 절실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만큼.

    “도와주실 꺼죠?”

    “…….”

    질문이 끝나자 짧은 적막이 찾아왔다. 진지한 내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몽블랑이 이내 피식 웃었다.

    “아주 믿음직스럽군요.”

    “꼬마워요.”

    빙긋 웃으며 대꾸하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레페 님… 아니, 성녀님의 목표를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드리죠.”

    “크레페 님이면 대요. 아직 공표한 것도 아닌데요, 머.”

    내가 가볍게 답하고는 마론 슈를 집어 들었다. 하도 진지한 분위기였던 터라 이게 오늘 먹는 첫 마론 슈였다.

    향긋하고 묵직한 버터크림에 밤을 넣어 만든 시원한 필링과 폭신한 슈…….

    이게 얼마 만인지, 원!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손가락에 묻은 슈가 파우더를 쪽 빨고 고개를 돌렸다.

    “아, 부탁 하나만 하께요.”

    “디저트를 더 준비하라고 할까요?”

    “네…가 아니라.”

    몽블랑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긍정한 내가 헛기침을 하고 고쳐 말했다.

    “피오르 드 론헤임 님을 불러주쎄요.”

    이번 생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피오르의 이름을 자연스레 꺼내자 몽블랑이 조금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아.”

    내가 슬쩍 손을 들고 뒤늦게 덧붙였다.

    “…디저트도 더.”

    * * *

    역시 몽블랑의 인생도 참 기구하단 말이야. 뭐,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내 방에 있는 카우치에서 뒹굴거리다 말고 하품을 했다.

    아마 몽블랑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을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아닐 테다. 아직까진 그가 알고 있던 운명 그대로 흘러가는 중이었고, 내가 운명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운명의 서를 알고 있는 내가 성녀라는 얘기까진 믿지 않을 수 없으니 도움을 약속한 것뿐이겠지.

    물론 피오르를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데에는 그 정도 신뢰면 충분했다.

    “그래두 너무 오래 걸린다…….”

    나는 카우치의 팔걸이에 턱을 대고 입을 뻐끔거렸다. 살랑거리는 커튼 너머로 발코니 바깥의 비안코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눈 쌓인 산이 만드는 스카이라인과 청명한 하늘. 손님방으로 쓰기엔 아까울 정도로 빼어난 경치였다.

    “하지만 역시 심심하단 말이지.”

    예전처럼 영지 업무를 덜어 온 것도 아니고 읽을 책을 넉넉히 가져온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여기서 오래 머물 거라는 말도 못 했을 정도니 오죽할까.

    그나마 몽블랑의 도서관에 읽을 만한 책이 조금이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이제 그것도 볼 만큼 봤지만.

    아무리 심심해도 마력학 논문이나 영지 측량법 같은 걸 읽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지루함에 몸부림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오르 선… 아니, 피오르 님은 아직 바쁘시대요?”

    몽블랑의 집무실에 가보니 언제나처럼 그가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노크 소리를 듣고서야 쉴 타이밍이 생겼다는 듯 그가 깃펜을 내려놓았다.

    “급한 용건이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아뇨, 그래도 일 마치면 어련히 오시겠쬬.”

    직접 와서 하기에는 다소 영양가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바로 떠나지 않고 괜히 몽블랑 옆을 기웃거렸다.

    그가 방금까지 보던 것은 키슈가 사용하는 연구 비용에 대한 예산안이었다. 그 비용이 전부 브라우니를 연구하는 데 쓰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녀석의 주인인 내 양심이 찔릴 지경이었다.

    물론 후작가의 재산에 비하면 적은 액수겠지만.

    응, 사실 별로 관심 없다.

    “심심하십니까?”

    “네.”

    단칼에 대답하자 그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슬슬 올 때가 됐을 겁니다. 성녀님을 보호하고 있다고 하면 그 녀석도 다른 일 제쳐두고 왔겠지만…….”

    “아직 폐하께도 얘기 못 드렸짜나요. 함부로 제 얘길 할 수 없다는 건 저도 알아요.”

    몽블랑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진지하게 이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피오르는 원래부터 마탑에서 매우 중요한 인사였고, 아마 지금도 키슈가 없는 마탑에서 자신을 대신해 후학을 양성할 사람을 구하느라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부탁한 물건도 있으니 방문이 늦어질 만하지.

    “퓨우, 재송해요. 제 부탁으로 온 건데 불평만 늘어놔서.”

    내가 푹 한숨을 내쉬고 사과했다.

    “하지만 엄마랑 오빠들한테 오늘 치 편지도 썼구, 도서관에 있는 책은 너무 어렵구, 브라우니는 키슈 님한테 완전히 잡혀 있는 데다 파타슈 님도 연구 도우미로 키슈 님한테만 붙어 있짜나요.”

    하나하나 손가락을 꼽으며 내가 심심해진 원인을 늘어놓고 나니 지금까지 버틴 게 용하다 싶어질 정도였다.

    “제가 신경을 못 썼군요. 혹시 필요한 게 있다면 고용인에게 말씀하시죠. 동화책이라든가.”

    “그건 됐…….”

    “케이크라든가.”

    “…그럴게요. 감사함니다.”

    오래 있어봤자 바쁜 사람을 방해하는 게 될 것 같았기에, 나는 그 말에 만족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물러났다.

    그래, 이럴 생각으로 온 건 아니었지만 준다니 받아야지.

    깔끔하게 인정하고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샹들리에나 계단 난간, 장식품 하나하나까지 화려하고 값비싸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머물며 먹은 디저트는 마론 슈 하나뿐이었다. 이 저택에서 단 음식을 좋아하는 게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파타슈는 말할 것도 없고, 몽블랑과 키슈도 딱히 티타임을 부지런히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더란 말이지.

    아무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몽블랑의 허락도 얻었겠다, 나는 먹을 것을 부탁하기 위해 1층 홀로 내려갔다.

    아마 식당 쪽에 가면 금방 먹을 수 있겠지?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본관 문을 열었다. 몽블랑 후작저의 식당은 별도의 건물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을 연 순간, 나는 식당이 아닌 다른 곳에 먼저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오, 도착했꾸나!”

    이 익숙한 마나는 분명 피오르의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과 지루함이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나는 화색을 띤 채 본관 계단을 후다닥 내려갔다.

    몽블랑 후작저의 이동 포트는 저택의 북서쪽, 도서관과 연구실을 겸하는 건물에 있었다. 나는 안내받은 기억을 되살려 도서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크레페 님!”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았다. 막 본관 문을 열고 나온 파타슈가 계단을 두 칸씩 내려와 밝은 얼굴로 물었다.

    “크레페 님도 느낀 거죠? 손님이래요?”

    “네! 근데 나오셔도 대요?”

    “이 기회에 빠져나온 거죠!”

    파타슈가 뭘 묻냐는 듯이 말하곤 나를 앞질러 갔다.

    하긴 공부를 싫어하는데 키슈의 조수 일도 좋아서 한 건 아니겠지.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고 파타슈를 따라 달렸다.

    물론 금방 숨이 차서 파타슈를 놓쳐 버렸지만.

    “흐헥, 그, 그냥 천천히 가는 걸로 하까…….”

    천천히 간다고 피오르가 도망가진 않을 테니까.

    * * *

    저질 체력이라서가 아니다. 나는 그저 여유를 즐기는 것일 뿐…….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천천히 걸어가던 때였다. 이동 포트가 있는 도서관 건물에서 익숙한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연갈색 머리카락에, 안경 너머로 보이는 가느다란 눈매까지. 분명 피오르 선생님이었다.

    원래보다 몇 년은 앞당겨진 만남이었지만 첫인상은 전과 마찬가지였다. 신경질적이고 깐깐해 보이는 느낌은 아무래도 그의 기본값인 듯했다.

    비록 단추를 모두 채운 정복을 입은 모습은 점잖아 보이지만…….

    “아니, 몽블랑 이 새끼가!”

    엥?

    피오르의 입에서 내 상념을 한 번에 흩뜨릴 만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순간 벙찐 내가 자리에 멈춰 서자 이내 건물을 나온 파타슈가 피오르의 짐 가방을 붙들고 늘어졌다.

    “아니라구요!”

    파타슈가 씩씩거리며 떼쓰는 아이처럼 도리질 쳤다.

    대체 내가 늦으면 얼마나 늦었다고 그사이에 이런 사달이.

    “무슨 일이시쬬?”

    내가 그들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피오르가 걸음을 멈추고 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네?”

    고개를 갸우뚱하자 피오르가 친절히 설명해 주는 대신 사나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시종으로 둘 사람이 없어서 이런 꼬마를!”

    “시종 아니라니까요! 꼬마도 아니구요!”

    파타슈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아하.

    “처음 뵙겠씀니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라고 합니다. 몽블랑 후작님께 신세를 지고 있써요.”

    오해의 원인을 파악한 내가 곧바로 예를 차리고 말했다. 피오르가 눈썹을 움찔하고 되물었다.

    “쉬제트?”

    “마탑의 남서쪽에 있는 백짝가예요.”

    “아니, 물론 알고 있습니다만 어째서 이곳에…….”

    “그리고 이쪽은 파타슈 님. 키슈 님의 아드님이시죠.”

    “아.”

    피오르가 멍청한 얼굴로 탄성을 내뱉고는 나와 파타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내 상황 파악이 끝난 듯 그가 뒤늦게 사과했다.

    “크흠. 실례했습니다, 밀 크레프 님. 그리고 파타슈. 네 이름은 키슈가 말해줬었지. 그 녀석이 여기 와 있는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안내해 드리께요.”

    파타슈가 세상 쓴맛 다 본 얼굴로 말했다. 빈말로도 좋다고 말하긴 힘든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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