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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53)화 (153/181)
  • 153화 

    순간 마른침이 넘어갔다. 가방끈을 쥔 손에 식은땀이 난 게 느껴졌다. 몽블랑의 진지한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녀.

    신성 제국인 슈트루델에서 그 호칭이 가진 파워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애초에 내가 성녀라는 건 사실도 아니었고, 혹 사실이라 해도 쉽게 긍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마자요.”

    내가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슈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나는 애써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고 브라우니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긴장이 조금 나아지는 걸 봐서는 녀석의 털에 진정 효과가 있는 것도 같고.

    그래, 이미 가족을 위해 브라우니를 날치기했던 나다.

    새삼 거짓말하는 게 뭐 어때서!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잡고 다시 선언했다.

    “아무래도 제가 성녀인 거 가타요.”

    【 포동포동한 성녀님은 인기가 없나요 】

    “와, 진짜 안 통해!”

    벌써 수십 번은 화염을 내뿜은 키슈가 갓난아이 대하듯 내 손을 잡고 죔죔거렸다.

    새로 연구할 것이 생겼다는 호기심과 희열로 들뜬 모습이었지만 당연히 나는 그런 취급이 유쾌할 리 없었다.

    내가 똥 씹은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이만하면 됐쬬? 안 통해도 무서우니까 키슈 님은 이제 그만 해주쎄요.”

    똑같은 마나라도 몽블랑의 냉기나 파타슈의 바람과 달리 그녀의 화염은 받아낼 때의 정신적 압박감이 달랐다.

    키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듯 멋쩍게 웃었다.

    “하긴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와선 불꽃을 쏟아붓고 있다니, 수플레 님께 죄송하네요.”

    할 짓 다 하고 죄송하다 하면 단가.

    “아, 이 일은 부디 비밀로…….”

    “…….”

    난 구태여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키슈가 급하게 다가와 알랑방귀를 뀌었다.

    여전히 그녀를 외면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때, 저택의 후문에서 파타슈가 나왔다.

    “…키슈 님? 몽블랑 후작님께서 드러오시라는데요.”

    “아, 그래…가 아니라 엄마라고 부르래도! 아무튼 크레페 님, 정말 믿을게요. 아셨죠?”

    키슈가 마지막까지 내게 당부하고는 겨우 발걸음을 떼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퓨우.”

    겨우 키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내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몽블랑 후작저의 뒤쪽에 있는 공터였다. 잠깐 쉴 겸 벤치에 앉아서 고개를 들자 그림처럼 펼쳐진 비안코 산맥이 눈에 들어왔다.

    몽블랑 후작령.

    북쪽으로는 수도가, 남쪽으로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천혜의 요새.

    이 일대는 선대 후작이 다스릴 때까지만 해도 가문의 성씨를 따 비안코 후작령으로 불렸던 곳이었다.

    이후 독실한 신자였던 몽블랑의 어머니는 ‘비안코’라는 가문명을 신에게 봉헌하고 후작령의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비안코 대신 몽블랑 후작령으로.

    그래서 몽블랑 역시 아직까지 비안코 후작이 아니라 몽블랑 후작으로 불린다고 했던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기 전에는 몰랐던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갠차느세요?”

    딴생각에 빠져 허공에 뜬 다리를 휘젓고 있던 내게 파타슈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 올라가 바도 괜찮아요?”

    “네에. 어짜피 어려운 얘기만 하시 텐데요.”

    ‘뭐, 필요하면 부르게쬬’ 하는 말을 덧붙인 파타슈가 옆자리에 올라와 앉았다.

    “그, 성녀라눈 건…….”

    어쩐지 기웃기웃하는 눈치다 했더니 성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긴 마탑 서약도 안 한 파타슈가 인생 서고나 운명의 서 같은 걸 알 리 없으니, 아마 우리 대화도 시종일관 갸우뚱하면서 들었겠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었다.

    “제가 신탁… 아니, 신의 목쏘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거예요.”

    “지굼도 들려요?”

    파타슈가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똑같은 꼬맹이 처지에 그럴 순 없겠다 싶어 억지로 웃음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안 들려요. 듣고 싶다구 맘대로 들을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성녀인 게 마자요?”

    파타슈가 재차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래도 쉽게 납득할 것 같진 않았기에 나는 아까 몽블랑과 키슈 앞에서 꺼냈던 말을 되풀이했다.

    “저한테 마법 안 통하는 거 봤짜나요.”

    “…….”

    파타슈가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내게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브라우니가 부화할 때 녀석의 알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어차피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 이 세계의 신인 디몬에게서 힘을 빌려 쓰는 것이 바로 마법이었다. 그러니 마법이 통하지 않는 내가 성녀라는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건 당연했다.

    브라우니한테 마법이 안 통하는 건 녀석이 신수이기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 있고 말이야.

    아무래도 나한테 사기꾼의 재능이 있었나 봐.

    뻔뻔하게 표정을 가다듬자 파타슈가 번쩍 고개를 치켜들고 다시 물었다.

    “하지만 이동 마법은 통하지 않아써요?”

    “아, 그건 제 몸이 아니라 제가 있눈 공간 좌표를 재구성하는 메커니즘이라…….”

    파타슈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아, 아까 어려운 얘기가 싫어서 안 올라가는 거라고 했었지.

    뒤늦게 깨달은 내가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미래의 대마법사가 이렇게 공부를 싫어해서야, 키슈의 고생이 눈에 훤하구나.

    “자세히 아시는군요. 그것도 성녀이기 때문입니까?”

    키슈와 바통 터치라도 한 듯 몽블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곧 해가 집니다. 머물 방을 안내해 드리지요.”

    말마따나 하늘은 조금씩 어둑해지고 있었다. 나는 두말 않고 의자에서 내려갔다.

    “…….”

    고용인이나 보좌관에게 우리 안내를 맡길 수도 있었겠지만, 몽블랑은 말없이 앞장섰다. 본관의 계단을 올라가는 걸 보니, 객실용 저택 대신 이곳의 방을 내주려는 것 같았다.

    “파타슈 님의 방은 이곳입니다. 바로 옆은 키슈에게 내줄 방이고요. 무료하다면 도서관에 가 계셔도 됩니다.”

    “…감사함니다. 여기면 대요.”

    몽블랑이 열어준 문으로 파타슈가 쏙 들어갔다. 방에 옮겨진 짐 가방을 풀 생각인 것 같았다.

    “크레페 님은 이쪽입니다.”

    파타슈의 방과 같은 2층이었지만 방향은 반대였다. 1층까지 비추는 샹들리에를 기준점으로 두고 파타슈의 방 맞은편에 있는 곳이었다. 몽블랑이 황동으로 된 문고리를 돌려 열었다.

    호텔 스위트룸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식탁으로 써도 될 법한 대리석 티 테이블과 얇은 커튼이 쳐진 발코니, 아치형 기둥 건너편에 있는 킹사이즈 침대.

    쉬제트 백작저도 화려한 편이었지만 적어도 내가 쓰는 방에까지 벽난로가 있진 않았다.

    “지나가는 아이를 불러 물으면 저택의 다른 곳도 안내해줄 겁니다.”

    “네에…….”

    나는 도시에 처음 와본 시골 청년처럼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문득 몽블랑을 올려다보았다.

    “…….”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파티장이나 키슈 앞에선 그나마 표정이 부드러웠는데, 지금 얼굴은 내가 섣불리 말을 걸기 힘들 만큼 차가워 보였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원래 몽블랑은 아이에게 꽤나 약한 인물이었다. 엄마의 죽음은 방관하면서도 죄 없는 어린아이인 나는 목숨 걸고 지킬 정도로.

    방금도 친구의 양자, 심지어는 평민이었던 파타슈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았는가.

    “저한테 할 말이 있쓰신가요?”

    직설적으로 묻자 문고리를 잡은 그의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짧은 침묵 후 몽블랑이 입을 열었다.

    “전 못 믿겠습니다. 성녀라니.”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쩌럼 보였나요?”

    그렇게 되묻자 몽블랑이 입을 다물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여섯 살짜리 어린애가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끄흠.”

    나는 분위기를 환기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어머니 때문이죠?”

    “예? 수플레 님이 무슨…….”

    내가 고개를 젓고 다시 말했다.

    “후작님네 어머니 말이에요.”

    “…….”

    몽블랑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고 종종걸음으로 걸어 티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질문 하나에 마론 슈 하나.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대요.”

    농담 반 진담 반인 말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고용인을 불러 마론 슈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몽블랑이 조심스레 들어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 * *

    몽블랑의 친부인 선대 비안코 후작은 일찍이 숨을 거두었다. 이후 영지 관리는 그의 아내인 후작 부인 몫으로 돌아갔는데, 그녀는 평생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살았기에 실질적 업무는 모두 비안코 후작의 보좌관이 처리했다.

    그사이, 기댈 곳 없어진 후작 부인은 종교에 빠졌다. 슈트루델 신성 제국이 모시는 유일신 디몬을 향한 믿음이었기에 신앙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자신이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주장한 ‘성녀’가 중간에 끼어 있었다는 것만 빼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약해진 후작 부인은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고, 자칭 성녀는 그 틈을 노린 전문 사기꾼이었다.

    후작 부인은 사기꾼 일당을 광신하기 시작했다. 몽블랑은 이성을 잃은 어머니를 만류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이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후작가의 재산을 사기꾼에게 양도하기 직전에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낙마로 인한 사고사. 자칭 성녀에게 그 재산을 헌금하러 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몽블랑이 성년이 되기 하루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럼…….”

    “네, 그 사람은 사기꾼이 마자요.”

    “…….”

    대답을 들은 몽블랑이 눈을 내리깔았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은 없었지만, 표정에는 분노보다 허탈함과 슬픔이 묻어 나왔다.

    [운명을 믿지 마세요]

    디몬의 인생 서고에서 본 그 책을 통해 나는 몽블랑의 과거사를 알았다.

    소설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일대기에 가까웠던 신탁의 서는, 운명에 체념한 몽블랑이 마침내 마법 서약을 하기로 결심하는 부분에서 마무리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미지근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었다.

    그래, 함께 나온 마론 슈가 달달하니 이 정도 홍차가 맞지.

    내가 마론 슈로 손을 뻗으려는 그때, 몽블랑이 입을 열었다.

    “제가 본 소예언서는 뭡니까?”

    “…그건 진짜에요.”

    망설이다 대답하자 몽블랑이 허탈하게 웃었다.

    “하, 결국 운명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뜻 아닙니까? 어차피 신의 뜻대로 흘러갈 것을, 크레페 님도 저도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이 앞에서 꺼내기엔 냉소적인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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