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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52)화 (152/181)
  • 152화 

    “…크레페.”

    “네, 네?”

    잡념에 빠져 있던 내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얕은 한숨을 내쉬곤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보내줄게. 물론 키슈 님의 의견을 들은 다음이 되겠지만.”

    키슈는 브라우니를 연구할 수만 있다면 사소한 환경 변화에 신경 쓸 사람이 아니었다. 엄마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내가 곧 저택을 떠나게 되리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네.”

    “엄마!”

    내가 얌전히 대답하자마자 갈레트가 책상을 쾅 쳤다.

    하지만 엄마는 갈레트를 진정시키곤 나와 눈높이를 맞춰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크레페, 약속 하나 해줄래?”

    “아무것도 숨기지 않을께요.”

    선수 치듯 말했다.

    “다녀오면 다 얘기하께요. 약속.”

    진지하게 선언한 내가 엄지손가락을 접은 오른손을 보여주었다. 엄마가 피식 웃고 엄지를 접은 손을 하이파이브 하듯 마주 댔다.

    “그래, 약속.”

    * * *

    ‘뭔가 다른 사정이 있는 거지?’

    ‘우리 딸,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나름 어린애처럼 한다고 한 거였는데.

    갈레트와 엄마의 반응을 떠올리며 멋쩍게 입맛을 다셨다. 두 명이 똑똑해서인지 내가 연기를 못해서인지 원인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쯤, 내 방문을 열고 갈레트가 들어왔다.

    “진짜 다 이상해! 어린애가 집을 나가겠다는 걸 그렇게 쉽게 허락해 주다니!”

    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키슈 님도 별말 안 하셔찌?”

    “…….”

    곧장 짐을 싸러 온 나와 달리 갈레트는 곧장 키슈를 찾아갔다. 갈레트의 뾰로통한 얼굴을 보니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책상 한쪽에 정리된 필기도구와 책 중에서 가져갈 만한 것을 고르며 일방적인 말을 이었다.

    “그래도 오래 안 걸리 꺼야. 키슈 님이랑 몽블랑 후작님 다 훌늉한 마법사시잖아. 연구만 끝나면 금방 올 테니깐, 오빠도 그동안 학교 잘 다니고 이써. 이 기회에 기숙사 들어가면 되게따. 그치?”

    “…….”

    아직도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아주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갈레트는 힘없이 티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으음, 생일 주인공이 왜 파티장에 안 돌아가느냐는 매정한 질문은 참기로 할까.

    아무래도 대화할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갈레트에게 더 말을 붙이는 대신 짐 챙기기를 계속했다. 서랍에서 꺼낸 『내 인생 공략집』도 챙길 것 중 하나였다.

    갈레트는 한글을 모르니까 지금 꺼내도 되겠지?

    나는 괜히 그의 눈치를 한 번 보고 공책을 펼쳤다. 엄마의 소예언서 내용을 적어둔 페이지를.

    [산적인 줄 알았는데 미남이시네요]

    제목부터 느껴지는 로맨스 판타지의 기운…….

    어쩌면 내 얼빠 기질이 유전이었던 걸까, 하는 의심이 들긴 했지만 넘어가고, 아무튼 그 책은 내용도 제목에 걸맞은 유쾌한 연애담이었다.

    바움쿠헨의 고위 귀족에게서 받은 정략결혼 제의를 뿌리치고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 그곳에서 알게 된 아빠와 교제하다가 이내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기에 이르기까지.

    솔직히 말하면 내 취향의 로판이었지만 사실 이 내용 정리를 새삼 살펴봤자 지금 엄마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주요 내용이 아빠와의 연애담이었던 만큼 그들의 결혼 이후의 모습까지는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크레페의 생애를 담은『하루만 못생기고 싶다』가 그랬듯이, 주인공이 사망하기 전에 엔딩이 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갈레트 오빠나 아펠이 이상했떤 거지…….”

    “응?”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갈레트가 말꼬리를 올렸다. 내가 급히 고개를 가로젓고 화제를 돌렸다.

    “진짜 갠찮다구. 오래 안 있을 거라니까?”

    “구래도오…….”

    갈레트가 나보다 혀 짧은 소리를 내며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방까지 따라와서 날 설득하려는 건가 했더니만 이젠 작전을 바꾼 모양이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나는 가져갈 책 사이에 읽던 공책을 끼워 숨기고 말했다.

    “들어오쎄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키슈가 방문을 열었다.

    “몽블랑이 곧 출발한다는데요.”

    “벌써요?!”

    갈레트가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놀라는 대신 지금껏 챙긴 것들을 작은 가방에 넣고 그것을 어깨에 멨다.

    “저도 준비 다 해써요.”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오후 시간이었다. 에이미는 급히 챙긴 짐가방을 짐꾼에게 건네며 눈으로는 몽블랑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사달이 일어난 게 그의 탓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몽블랑한텐 잘못 없는데.

    “끄흠.”

    그의 결백함을 알고 있는 내가 괜히 찔리는 마음에 헛기침을 했다.

    몽블랑이 짐꾼을 발견하고 에이미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 짐꾼은 필요 없습니다. 마법으로 돌아갈 테니까요. 괜찮지?”

    마지막 말은 키슈를 향한 것이었다. 파타슈를 데리고 나온 그녀가 시원스레 답했다.

    “물론이지. 우리 아들도 있는걸.”

    파타슈의 품에는 브라우니가 안겨 있었다. 내가 다가가 녀석을 건네받고는 몽블랑 옆에 가서 섰다.

    물론 파타슈가 마나를 사용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걱쩡 마요. 잘 갔다 오께요!”

    “크레페에에…….”

    씩씩하게 인사하자 갈레트의 좀비 같은 반응 너머로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눌레는 불만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계단 난간에 기대 있었고 에이미는 걱정을 숨기고 애써 웃어 보였다.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살피며 불안해하는 마르크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나는 몽블랑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하지요.”

    몽블랑이 수식을 계산하기 시작하자 키슈가 짐꾼에게 있던 가방을 대신 들고 내 옆에 자리 잡았다.

    “아들, 어떻게 하는지 알지?”

    “네.”

    파타슈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나를 흩뿌렸다. 키슈가 마법진을 띄우며 몽블랑과 시선을 교환했다. 마나의 농도가 서서히 짙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나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마법진이 무릎까지 올라온 것을 확인했다.

    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브라우니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이제 곧 기절할 꺼야. 안 다치게 쪼심해. 알았찌?”

    “삐?”

    브라우니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법진은 금방 떠올랐다. 물론, 내가 정신을 잃는 것도 금방이었다.

    * * *

    지난 생에서는 나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어린아이로 돌아오자 그 내성도 다 사라진 모양이었다.

    나는 아직도 울렁거리는 속을 가다듬기 위해 억지로 침을 삼키고 눈을 떴다.

    주황과 빨강이 섞인 듯한 색깔. 키슈의 눈동자였다.

    “크레페 님!”

    코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죄송해요. 마법진을 볼 수 있을 정도니 선천적으로 마나에 예민한 체질일 가능성도 생각했었어야 하는데.”

    “생각했쓰면 머요. 마차 타면 한참 걸려쓸 거잖아요. 더 위험했을 쑤도 있구.”

    “그야 그렇죠.”

    키슈가 멋쩍어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수플레 님께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이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게 아닌가 싶어져서 말이에요.”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나는 그 말을 삼키고 끙, 소리를 내며 허리를 일으켰다.

    몽블랑의 집무실이구나.

    처음 보는 장소였지만 그 사실을 알기는 쉬웠다. 몽블랑이 책상 앞에 앉아 한창 업무를 보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남아 있었기에.”

    해가 지기도 전에 출발한 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듯 몽블랑은 조금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절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는지 내가 눕혀져 있던 곳은 침대가 아니라 소파였다. 나는 몸을 돌려 다리를 바닥에 내렸다.

    “…풋.”

    나는 뒤늦게 맞은편 소파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기절한 것도 아닐 파타슈가 그 위에 누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일찍 눈을 뜬 부작용이겠지. 뭐, 브라우니는 왜 덩달아 자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안, 깨울까?”

    키슈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파타슈를 깨우려는 것에 몽블랑이 팔을 뻗어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몽블랑의 용건은 그녀가 아니라 내게 있는 듯했다.

    “공간 이동은 처음이셨겠죠?”

    “네에.”

    “그런데 곧 기절할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페가수스에게 한 말이 들렸습니다.”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몽블랑의 물음에 허점을 찔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사소한 것까지 의심하는 모습에서 그의 절박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의 심정도 이해는 갔다.

    애초에 그가 내 부탁을 받아들여 준 이유도 내게 듣고 싶은 설명이 있어서였으니까.

    “무슨 소리야?”

    키슈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몽블랑을 가리켰다.

    “운명을 믿지 마세요.”

    “에?”

    키슈가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이번엔 그녀를 가리켰다.

    “어화둥둥 우리 아들.”

    “…어?”

    키슈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녀가 몽블랑과 나를 번갈아 보며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잠들어 있는 파타슈를 가리켰다.

    “대마법사가 되기 1,000일 전.”

    “신탁의 서를 보신 거예요?!”

    정신을 차린 키슈가 큰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녀에겐 자신의 소예언서를 불태우려고 했던 전적이 있었다. 물론 그 제목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말한 것이 자신들의 소예언서 제목이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놀람이 아니라 환희에 가까웠다.

    “무, 무슨 일…….”

    큰 소리에 놀란 파타슈가 몸을 파득거리며 눈을 떴다. 키슈가 상기된 얼굴로 그를 껴안으며 감격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들이 대마법사가 된다니!”

    음, 역시 아들 바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내심 고개를 저었다.

    “쉬제트 영애!”

    몽블랑이 언성을 높여 시선을 모았다.

    “말씀해 주시죠. 제가 크레페 님의 요청을 왜 받아들였는지 아실 것 아닙니까.”

    막 일어난 파타슈가 당황한 듯 눈을 껌뻑거렸다. 브라우니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책상을 밟고 내 쪽으로 넘어왔다.

    “진정해, 그냥 꿈에서 보신 걸 수도 있잖아. 크레페 님도 마법에 재능이 있으니까.”

    키슈가 나서서 몽블랑을 진정시키려 했다. 나는 가볍게 혀를 차서 브라우니를 부른 후 한 팔로 녀석을 안았다.

    “꿈에서 안 봐써요. 책을 봤쬬.”

    “크레페 님의 소예언서에 저희의 책 제목이 적혀 있었다는 겁니까?”

    몽블랑이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고개를 가로젓자 곧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럼…….”

    “디몬 님 서고에서요.”

    내가 확인 사살 하듯 덧붙이자마자 몽블랑이 키슈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당황해 손을 흔들었다.

    “내, 내가 말한 거 아냐!”

    그럴 만했다. 디몬은 신의 이름이었지만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으니까. 몽블랑과 키슈처럼 마탑에 다녀온 사람들을 빼면 말이다.

    하지만 애초 그녀를 진지하게 추궁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으로, 몽블랑은 금세 내게 다시 물었다.

    “그건 성녀의 계시를 받았다는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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