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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51)화 (151/181)

151화 

“크레페.”

조금 느린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엄마였다. 그녀의 고동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살짝 가려져 있었다. 돌발 행동에 나를 탓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일방적인 제안을 했다. 심지어 백작보다 높은 후작에게.

당연히 큰 실례를 저지른 것은 내 쪽이었으니 엄마가 화내는 것도 당연했다.

“…….”

엄마가 내게 손을 뻗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그만하라는 권유로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엄마 품에 섰다. 그 대신 몽블랑의 청회색 눈을 빤히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운명을 믿지 마세요.”

“…….”

짧은 문장에 몽블랑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귀빈 여러분께 실례가 많았습니다. 준비한 만찬을 느긋이 즐겨주시길.”

엄마가 파티장을 두루 보며 권했다.

“대체 뭐야, 응?”

잠시 밀려나 있던 갈레트가 다시금 내게 다가와 대답을 보챘다.

“그건 나중에…….”

엄마가 갈레트를 달래며 등을 살짝 밀었다. 하지만 갈레트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하아.”

한숨을 내쉰 엄마가 우리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이대로 파티에 집중하라고 해봤자 안 들을 거지?”

나는 말없이 갈레트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이마에 ‘물론이죠!’ 하는 말이 쓰여 있었다.

물론 기분 탓이겠지만 그 감상은 엄마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조용한 곳에서 얘기하고 오렴.”

그녀가 체념한 듯 말했다.

“네!”

갈레트가 씩씩하게 대답하고 내 팔을 잡았다.

예의상의 거절도 없는 파티 주인공의 당당한 태도에 고개를 저은 엄마가 이번에는 카눌레를 쳐다보았다.

“…저도 갈게요.”

망설이던 카눌레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엄마 옆에 서서 다른 귀족들의 인사를 받는 게 더 어색할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엄마가 우리의 등을 가볍게 떠밀었다.

“그래, 이따 나한테도 얘기해 줘야 해!”

“네에!”

언제나 대답만은 시원시원한 갈레트의 목소리와 함께 우리가 파티장을 나갔다.

* * *

우리는 조용히 얘기할 만한 곳으로 저택 뒤편의 도서관을 선택했다.

나는 마르크를 포함한 호위 기사들에게 도서관 입구에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한 후, 발 받침대를 딛고 도서관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

카눌레도 별말 없이 내 맞은편 의자를 빼 앉았다. 하지만 갈레트는 아직 진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인데? 아침에 그 아저씨랑 만난 거야? 다시 부탁드린다고 했지?”

십오 년… 아니 작년의 첫사랑 발언 이후 그는 아직도 몽블랑을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 한 나라의 후작을 당당히 아저씨라고 지칭한 그가 눈에 불을 켜고 내 대답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파타슈와 나의 스캔들만 들었지, 그게 몽블랑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고는 듣지 못했나 보구나.

“음, 별건 아니구…….”

나는 적당히 말을 흐리고 뺨을 긁적였다.

원래 이렇게 대단하게 취급될 일도 아니었다.

지난 경험에 비추어 보면 몽블랑은 오늘 저녁에 돌아간다. 나는 그 전에 그를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몽블랑과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얘기를 이용해서 말이다.

이제 씨앗은 뿌려놨으니 오빠들에겐 적당히 둘러대다가 몽블랑의 지원을 받아 가족들을 설득하고 떠나면 그만…이긴 한데…….

“우리 동생, 진짜 가려는 건 아니지?”

갈레트가 보드라운 손으로 내 손을 감싸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기로 만든 인형처럼 매끈한 피부와 큼지막한 보라색 눈동자, 금색으로 반짝이는 속눈썹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부담스러워서 눈을 꽉 감았다.

“아니, 그, 몽블랑 후작령의 마론 슈가! 너무 맛있써서 꼭 가보고 싶었꺼든!”

역시 절세미인이라던 크레페의 미모가 갑자기 튀어나온 건 아니구나.

친동생에게까지 통하는 미남계라니, 만일 미모로 사람을 신문하는 게 가능하다면 갈레트의 미모는 고문관급일 것이다. 지난 이십여 년의 세월이 없었다면 나마저 홀라당 넘어갈 뻔했으니까.

“…….”

내가 준비한 듯한 변명을 쏟아내자 내 손을 붙들고 있던 갈레트의 손힘이 풀어졌다.

“하아, 벌써부터 나한테 숨기는 게 있다니…….”

갈레트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수, 숨기는 거?”

“디저트 때문이면 굳이 혼자 가지 않아도 되잖아. 마론 슈 장인을 불러오든, 우리가 다 같이 나들이를 가든.”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덧붙였다.

“뭔가 다른 사정이 있는 거지?”

“…….”

긴장감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러고 보면 소예언서에서도 몇 번 나왔다. 내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는 그의 모습이 말이다.

“…헤헤, 역시 천재한텐 숨길 쑤가 없나 바.”

체념 반, 뿌듯함 반으로 웃자 갈레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아차, 저 표정은…….

“누가 그렇게 귀엽게 웃으래~!”

“웁.”

나는 그의 제복 단추에 이마를 콩 찧고 곧바로 그를 밀어냈다. 웬만하면 애정 공세도 받아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갈레트의 제복 천이 까슬까슬해서 뺨이 아팠으니까.

“아이구, 미안.”

갈레트가 후다닥 떨어졌다. 나는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며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자리에 앉게 하곤, 카눌레의 질린 표정을 보며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나, 후작님네에 갈 꺼야. 왜냐면…….”

내가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페가수스를 우리 집에서만 키우면 안 좋은 소문이 돌 수도 있짜나. 브라우니를 황궁에 보내긴 싫구, 후작님께 맡기면 어떠까 해서. 각인을 했쓰니 나랑 파타슈 님도 같이.”

“그것뿐입니까?”

출입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몽블랑이 들어왔다. 갈레트가 얼떨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몽블랑의 손짓에 도로 앉았다.

마르크가 내게 몽블랑을 들여보내도 괜찮냐며 입술을 뻐끔거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머뭇거리다가 선 자세를 바로잡았다.

외부인이긴 해도 몽블랑 후작과 아빠 사이에 친분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네에.”

갈레트의 호위 기사가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아주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몽블랑이 예의 바르게 말하고 카눌레의 옆에 앉았다. 키가 고만고만한 어린애들 사이에 한 명의 머리만 톡 나와 있는 게 제법 우스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인 듯, 몽블랑이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크레페 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이런 데서요?”

나는 질문을 듣기도 전에 그렇게 맞받아쳤다. 어차피 듣지 않아도 그가 묻고 싶어 하는 말이란 뻔했다. 내가 운명을 믿지 말라고 했으니까.

‘운명을 믿지 마세요.’

그건 그와 나 사이의 비밀 같은 것이었다. 바로 몽블랑 후작의 생애가 적힌 소예언서의 제목.

내가 디몬의 인생 서고에서 읽은 것 중 하나였다.

몽블랑은 물러서지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

“예지몽을 꾸신 겁니까?”

“그게 먼데요?”

내가 시치미를 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푸핫! 아저, 아니 후작님 그런 거 믿어요? 갑자기 뭔…….”

마법진에만 관심 있는 카눌레는 헛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고, 갈레트는 나와 몽블랑을 번갈아 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나는 갈레트의 시선이 몽블랑을 향해 있는 틈에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소리를 낸 후 말했다.

“아무튼, 데려가 주실 꺼죠?”

그건 사정을 듣고 싶으면 나를 저택에 데려가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내가 생글거리며 웃자 몽블랑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몽블랑은 내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 * *

“크레페?”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가 도서관에 입장했다. 몽블랑이 온 것을 보고 예상했지만, 그녀는 손님들에게 적당히 양해를 구한 뒤 파티장을 잠시 비운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엄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뭔가를 부탁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거야. 게다가…….”

엄마가 말을 멈추고 몽블랑이 앉은 자리를 향해 섰다. 나를 타이르느라 몽블랑의 존재를 그제야 눈치챈 모양이었다.

“크흠. 실례가 많았습니다. 곤란하셨을 텐데.”

“아뇨. 괜찮습니다.”

몽블랑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언제나와 같은 미소라기엔 조금 굳은 표정이었다.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그는 잠깐 헛기침을 해 분위기를 환기하고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가족분들께서 괜찮으시다면 크레페 님의 청을 받아들이고 싶은데 어떠신지요?”

“예?”

“엥?”

엄마의 놀란 목소리에 이어 카눌레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몽블랑의 동조가 갑작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나야 내심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엄마와 갈레트가 보는 앞에서 그랬다간 의심스러워 보일 게 뻔했기에 겉으로는 어린애답게 들뜬 표정을 했다.

“진짜죠?!”

“하, 하지만…….”

고장 난 인형처럼 입술을 뻐끔거리던 갈레트가 뒤늦게 반박하려 나섰다. 엄마가 그쪽으로 손을 뻗어 제지하고는 책상머리로 다가왔다.

“후작님께 폐를 끼칠 순 없습니다. 아직 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인걸요. 함께 보낼 보모도 마땅치 않고요.”

“갠차나요. 에이미는 원래 보쟈관이기도 하구, 바쁘니까 같이 안 가도…….”

“크레페.”

엄마가 눈썹을 움찔했다.

그녀가 하루 동안 내 이름을 이렇게 여러 번 부른 건 처음이었을 것이다. 평소에 그녀는 나를 ‘우리 딸’이라고 불렀으니까.

딱히 탓하는 표정도 아니었지만 나는 내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혼나는 기분이었다.

물론 여기서 물러나면 죽도 밥도 안 되겠지.

“진짜 괜차나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린 내가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위로하듯 눈을 마주치며 차근히 말했다.

“브라우니를 따라가려는 거예요. 키슈 님이랑 파타슈 님도 함께 갈 꺼구요. 걱정할 만한 일은 없쓸 거라고 약속할께요.”

“…….”

엄마는 당황한 듯 떨리는 눈으로 내 시선을 받아냈다. 내가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엄마가 잠깐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우리 딸, 나한테 숨기는 게 있지?”

“네?”

놀란 나머지 엄마의 소매를 잡은 손에 힘이 풀렸다. 그러자 엄마는 이번엔 자신의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고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이렇게 고집을 부린 게 처음이 아니잖아. 몬스터 알을 부화시키자고 했을 때도, 파타슈의 후원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그랬지.”

지난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그녀가 내 행동에서 위화감을 느끼는 건 지금으로부터 일 년 뒤의 얘기였다. 내가 루아 요새로 따라가겠다면서 그녀를 조목조목 설득했을 때 말이다.

그 시간이 당겨진 걸까? 아니면 지난 삶에서도 그녀는 계속…….

‘크레페,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엄마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않겠다고.’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마치 방금 들은 것처럼 생생히 되풀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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