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하지만 어른들은 원래 아이가 그런 반응을 보일수록 더 놀려주고 싶어 하는 법.
“아하하, 일 년 만에 취향이 많이 바뀌었나 봐요? 몽블랑이랑 파타슈는 전혀 안 닮았는데.”
“하지만 내가 더 잘생겼겠지.”
몽블랑이 장난기 어린 투로 키슈에게 부언했다. 그녀가 뭐라 맞받아치려던 찰나 내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게 작년이어써요?”
그러자 순간 둘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곧 키슈가 풉, 웃음을 터드렸다.
“어쩌냐, 넌 벌써 잊혀진 모양이다.”
그녀가 어깨로 몽블랑을 툭 쳤다. 몽블랑이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실언한 나도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체감으론 한 십오 년쯤 지났거든요.
【 운명을 믿지 마세요 】
내가 몽블랑을 따라가고 싶다고 선언한 직후 난입한 키슈로 인해 대화가 잠시 끊겼다. 키슈는 몽블랑과 서신만 주고받았을 뿐 직접 대면하는 것이 오랜만이라며 그간의 회포를 푸느라 열심이었다.
나는 그들의 재회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하녀가 가져다준 차와 비스킷을 조용히 우물거렸다.
“…어떠케 된 거예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파타슈가 내 귓가에 속닥였다. 나는 비스킷 가루가 묻은 손을 털었다.
“머가요?”
“…….”
파타슈가 알지 않느냐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날 쳐다보았다. 적당히 얼버무리려던 계산을 들킨 듯한 기분에, 나는 열심히 비스킷을 씹고 입 안에 남은 것을 꿀꺽 삼켰다.
“아아, 갑자기 후작님네에 가고 싶따고 한 거요? 브라우니를 보내기 시르면 우리가 가야죠.”
“…브라우니를 억지로 보내겠따고 한 건 크레페 님이시자나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키슈가 몽블랑과 대화하다 말고 귀를 쫑긋 세웠다.
“브라우니를 데려가?”
“크흠.”
몽블랑이 헛기침을 하고 키슈에게 설명했다.
“굳이 데려가지 않아도 괜찮아. 황제 폐하께 페가수스의 존재를 알리고 연구 결과를 정기적으로 보고하기만 하면.”
“그래도 갈래요.”
내가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몽블랑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가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헛기침만 했고, 파타슈는 반눈을 뜨고 입술을 삐죽 내민 채 날 응시했다.
그중에서도 키슈는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포용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미소는 능구렁이 같았고 입꼬리는 폭소를 참는 것처럼 씰룩거리는 데다 눈빛은 음흉했다.
“크레페 님…….”
“쉿!”
키슈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는 뒷말을 안 들어도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말을 막고 의자에서 깡총 뛰어내렸다.
“삐유?”
브라우니가 고개를 들고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별일 아니라는 의미로 녀석의 머리를 잠깐 쓰다듬고 짧게 말했다.
“쫌 있으면 파티 시간이니까 자세한 건 이따 말씀 드리께요. 가요.”
“에? 아, 네!”
파타슈를 보며 덧붙이자 그가 허둥지둥 의자에서 내려왔다.
* * *
“히유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에이미의 손길에 몸을 내맡겼다. 완성된 스타일은 어제 입었던 드레스와 전혀 다른, 내 오동통한 몸매에 맞춰 특수 제작된 제복이었다.
“브라우니 때문에 그러세요?”
에이미가 내 머리를 땋아주며 물었다.
“그렇다구 해야 하나…….”
내가 말을 흐리며 어두운 얼굴을 하자 에이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나는 보충 설명을 해주는 대신 착잡하게 콧바람만 내쉬었다.
애초 계획대로 몽블랑과 단둘만 있었다면 그를 설득하는 일이 좀 더 쉬웠을 것이다.
파타슈와 키슈… 아니, 키슈가 난입하며 분위기가 완전히 깨진 것을 떠올렸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어머, 얌전히 계셔야죠.”
“네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물거리며 대답하자 에이미는 뭐가 웃긴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꾸밈을 마무리했다.
“자, 됐어요. 아주 씩씩하고 멋있어 보이네요.”
그녀가 내 소매를 당겨 각을 세웠다. 은거울 앞에 선 내가 몸을 틀며 이리저리 옷차림을 비춰 보았다.
은실을 섞어 땋은 후 레이스 끈으로 묶은 머리카락, 색을 맞춰 채운 두 줄 단추, 빳빳한 흰색 옷감에 어울리는 화려한 견장, 금실로 만들어진 어깨 술.
옆모습을 보면 배가 볼록한 곰 인형 같았지만 앞에서 보면 재봉선과 단추를 이용한 디자인 덕분에 통통한 몸매가 그리 강조되진 않았다.
“조아.”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잘 다녀오세요.”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을 하자 에이미가 등을 떠밀었다. 문을 열자 앞에서 대기하던 마르크가 감탄했다.
“오.”
“왜요?”
시치미를 떼고 물었지만 나는 내심 뿌듯한 마음이었다.
잔뜩 꾸민 어제도 못 들었던 탄성을 듣다니, 나한텐 드레스보다 제복이 더 잘 어울리는 걸까?
그때 마르크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작년이랑 달리 옷이 잘 맞아서 다행이군요.”
“…아저씨는 눈치가 너무 없써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늘어뜨리자, 에이미가 마르크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크레페!”
타이밍 좋게 코너를 돌며 갈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그는 원래 엄마랑 같이 입장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갈레트가 내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들었다.
“파타슈 그 땅콩 같은 녀석이랑 약혼이라니 무슨 소리야아!”
예상은 했지만 소문이 너무 빠르구만.
“그런 거 아니야, 단순한 오해… 윽.”
말하다가 혀를 깨물어 버렸다. 내가 짧게 신음하자 갈레트가 화들짝 놀라고는 제 양손을 번갈아 보며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이런 폭력성을 갖고 있었다니! 카눌레도 아니고 내가……!”
“그게 무슨 뜻이야, 갈레트 형?”
“크레페, 괜찮아? 많이 다친 건 아니지?”
카눌레의 목소리를 무시한 갈레트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내 기색을 살폈다. 무시하는 게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내가 환청을 들었나 생각했을 정도였다.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복도 끝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삐죽거리는 카눌레와 함께 웃는 얼굴의 엄마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에이미가 문밖으로 나와 물었다.
“다 같이 들어가려고요. 옷을 맞춰 입은 건 처음이고.”
짧게 대답한 엄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하, 크레페, 너무 잘 어울린다. 초상화 다시 남길까?”
그 질문에 나는 잠깐 갈레트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엄마를 올려다보며 생긋 웃었다.
“네!”
이제 곧 몽블랑 후작령으로 떠나고 나면 가족들과 만나기도 쉽지 않게 될 것이다. 이번 그림은 내가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갈레트가 여느 때처럼 연신 귀엽다는 말을 내뱉으며 날 끌어안았다.
“후후, 이제 들어가야지.”
엄마는 나와 한 덩이가 된 갈레트의 등을 눈덩이 굴리듯 살살 밀었다. 카눌레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휴, 부끄럽게.”
“아무튼 절대 안 돼, 알았지? 약혼이라니 절대! 응?”
“으으응…….”
사실 부끄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좀 놔줬으면 좋겠다.
* * *
가족들과 나란히 단상에 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눈동자를 굴려 파티장 어딘가에 있을 몽블랑 후작을 찾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의 하얀색 머리는 홀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드라질 만큼 독특했다. 나는 금방 그를 발견하고 놓치지 않도록 눈으로 좇았다.
“그럼, 다들 느긋하게 즐겨주세요. 감사합니다.”
갈레트가 마무리 인사를 하며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에 대고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어제 또래들 사이에서 한 것만큼이나 자연스럽고 기품 어린 인사였다.
엄마가 칭찬의 의미로 갈레트의 등을 토닥인 것을 마지막으로, 나와 카눌레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단상에서 쪼르르 내려갔다.
카눌레야 원래 이런 자리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나는 그에 더불어…….
“약혼 발표라도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냥 말동무로 붙여줬던 시종이었던 걸지도요.”
“세상에, 망측해라. 제 딸아이한테도 주의를 한 번 줘야겠군요.”
…귀족들의 입에 이런 이야기들이 오르내리는 것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끄응, 지난 생에선 이 소문이 사라지기까지 얼마나 걸렸더라.
“야, 오늘은 좀 떨어져 있어라.”
카눌레가 내게 속삭였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파티 때마다 구석에 서서 사람들 시선을 같이 피했던 동지가 그런 식으로 나오자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나두 바쁘거든?”
나는 일부러 코웃음까지 곁들이고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뭐, 뭐야?”
당황한 듯한 카눌레의 목소리는 못 들은 척했다. 바쁘다는 말은 단순한 반발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끄흠. 몽블랑 후작님?”
사교 파티에 참석하는 일이 드문 사람인 만큼 몽블랑 후작의 주변에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하지만 이질적인 어린아이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자, 몽블랑은 단번에 날 발견하고 시선을 내렸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창백한 피부에 오팔을 닮은 청회색 눈동자.
아직 어린아이인 내게는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나 나는 침착하게 다리를 모으고 섰다.
“아침엔 실례가 많았씀니다. 후작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써서 그만.”
코딱지만 한 어린애가 슈트루델 제국의 유명인에게 먼저 말을 붙이는 이색적인 광경에 주변의 시선이 쏠렸다.
“제게 말입니까?”
그가 부드럽게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보고 섰다. 한색을 띤 눈과 옅은 미소는, 그 인정 넘치는 말투와 달리 내 용건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뭐, 아침에 있었던 일도 있으니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물러났다. 발뒤꿈치를 맞추고 가슴을 부풀린 후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가 주먹 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며 45도 각도로 인사.
유능한 지휘관으로 정평이 난 아빠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을 완벽한 자세로 예의를 갖춘 내가 서서히 허리를 세워 일어났다.
“쉬제트 백작가의 여식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예를 갖쭤 다시 부탁드림니다. 몽블랑 후작령에 대한 방문을 허해주시겠씀니까?”
“크……!”
갈레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몽블랑에게든 내게든 또 웃기지도 않은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나는 곧바로 두 손을 들고 갈레트의 입을 막았다.
“웁?”
이렇게 무력(?)을 동원해 갈레트의 행동을 막은 적은 손에 꼽았다. 갈레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부엉이처럼 크게 뜬 눈을 끔뻑거렸다.
소란은 안 피우겠지, 하고 갈레트를 옆으로 밀어냈을 때였다.
“영애께서 제 영지를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 영광입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영애를 제 저택에 보내주실 분은 쉬제트가에 없는 것 같군요.”
몽블랑이 부드럽게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홀 바깥에서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던 마르크의 경악한 표정, 엄마의 보좌관으로서 단상 한쪽에 서 있던 에이미의 넋 나간 얼굴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