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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9)화 (149/181)
  • 149화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브라우니를 만나러 왔다. 여름이라고는 해도 워낙 이른 시간이었기에 날씨가 그리 덥진 않았다.

    “브라우니?”

    창문을 똑똑 두드리고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파타슈와 등을 맞대고 옆으로 누워 자고 있던 브라우니가 멍하니 턱만 치켜올리고 나와 눈을 맞췄다.

    꿈뻑. 꿈뻑.

    “…졸린 건 이해하지만 나 발견했쓰면 좀 와죠.”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브라우니가 비치적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척을 느낀 듯 파타슈가 몸을 뒤척였다.

    “우움.”

    파타슈가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을 걷어찼다. 많이 더웠는지 그는 배를 훤히 드러낸 채 다시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냈다.

    “삣.”

    파타슈 다리 밑에 깔린 브라우니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끄응… 응?”

    그 소리에 결국 파타슈도 눈을 떴다. 그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창문 밖에 선 나를 발견했다.

    “하하… 안녕하쎄요.”

    “크… 끄악!”

    파타슈가 뒤늦게 제 포즈를 깨닫고는 급히 옷을 끌어 내려 배를 가리려다가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쿵 소리 때문에 괜히 나까지 아픈 것 같았다. 내가 꽉 감은 눈을 슬그머니 뜨자, 그의 몸에 휘감긴 이불자락 아래에 깔린 브라우니가 구슬프게 울었다.

    “삐우우우…….”

    * * *

    잠시 후, 옷차림을 가다듬은 파타슈가 쭈뼛거리며 건물을 나왔다. 머리카락은 마구잡이로 뻗쳐 있었고 품에는 브라우니가 안겨 있었다.

    “크흠, 여기예요!”

    웃으면 파타슈가 꽁할 것이 뻔했기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그를 불렀다. 파타슈가 나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이 시간에 무쯘 일로…….”

    “무쯘 일은요. 브라우니를 보내줘야 할찌도 모른다잖아요.”

    “아아.”

    벤치에 앉아있던 내가 옆자리를 손짓하며 대답하자, 파타슈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그에게 안겨 있던 브라우니가 하품을 하고는 내 무릎 위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 파타슈보단 내가 더 폭신폭신하니 좋은가 보구만.

    귀여워하는 마음 반, 민망한 마음 반으로 녀석의 갈기털을 몇 번 쓰다듬자 브라우니가 나른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사실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는데.

    파타슈에겐 그렇게 둘러대긴 했지만 나는 사실 몽블랑 후작이 브라우니를 데려가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원래 파타슈가 잠든 사이에 브라우니만 몰래 데리고 다녀올 생각이었던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왜요?”

    “아, 아니에요.”

    졸려 보이면 더 자라고 들여보낼 작정이었건만 불행히도 파타슈는 잠이 다 깬 것 같았다. 나는 몇 분간 애꿎은 브라우니만 쓰다듬고 있다가, 결국 더 기다리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안 되게써요.”

    “네?”

    “몽블랑 후작님께 가보께요.”

    내가 당당히 선언하곤 브라우니를 든 채 걸음을 옮겼다.

    “키, 키슈 님께 말이라도 하구…….”

    파타슈가 어찌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다가 날 따라왔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객실용 저택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삐?”

    “쉬잇.”

    이른 시간이었지만 깨어있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다. 나는 브라우니의 배를 앞으로 해서 인형처럼 보이도록 안고, 혹시라도 녀석을 수상쩍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무서워 연신 쉿 소리를 내며 걸었다.

    “갠찮을까요……?”

    파타슈가 작게 속삭였다. 결국 키슈에게도 말 못 하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가씨께서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택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얼굴이 눈에 익은 것을 보니 내가 카눌레를 따라 연무장을 오갔을 때 마주친 적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몽블랑 후작님을 뵈러 왔써요. 안내해 주실 쑤 있나요?”

    당당히 말하자 그는 대처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후웁.”

    그사이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몽블랑 후작니이이임!”

    “아, 아가씨!”

    내 돌발 행동에 기사가 당황한 듯 손을 휘저었다. 파타슈도 덩달아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1층 창문이 몇 군데 열리며 귀족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 쉬제트가의 막내 영애님?”

    “아, 저 아이가 그…….”

    “크, 크레페 님. 브라우니를 들키면 안 되자나요.”

    파타슈가 내 귓가에 속삭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소란을 들은 한 귀족 부부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신가요, 꼬마 아가씨? 시동까지 데리고.”

    “쯧, 노예 아이를 이곳까지 데려오다니 아무리 어린아이라지만…….”

    이크.

    바움쿠헨의 노예. 그건 파타슈에게 지뢰 같은 단어였다. 아니나 다를까, 파타슈가 움찔하더니 곧 반항적인 눈빛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뇌의 착각 같은 건 아니었다.

    ‘물론 억지로 운명을 바꾸는 것도 쉽진 않아. 운명한테는 자신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거든.’

    이게 디몬에게서 들은 ‘운명적 이끌림’이라는 건가?

    나는 이럴 때 쓸 만한 대처법을 알고 있었다. 짧은 순간 계산을 마친 내가 파타슈의 팔을 잡아당겨 내 뒤에 숨기고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 애 아빠한테 함부로 말하지 마쎄요!”

    “…….”

    그들이 말을 잃고 눈을 깜빡이더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내가 훙, 콧바람을 내뿜은 그때, 그들의 뒤로 새하얀 머리칼의 몽블랑이 나타나 끼어들었다.

    “제 손님인 것 같은데, 비켜주시겠습니까?”

    * * *

    “갑짝스런 방문에도 놀라지 않고 맞아주셔서 감사함미다.”

    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정중히 예를 올리고 몽블랑의 방에 들어섰다. 귀족의 예에 대해 잘 모르는 파타슈는 쭈뼛거리며 고개인사만 하고 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찻잔을 더 부탁하지.”

    하녀를 불러 지시한 몽블랑이 창가에 위치한 테이블로 우리를 안내했다. 마침 아침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듯 테이블 위에는 찻주전자와 소프트 비스킷이 놓여있었다.

    이른 아침의 찬란한 햇빛과 그에 대조되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 그 앞에서 마시는 따끈한 차 한 잔.

    크으, 풍류를 아는 양반이로구만.

    “앉으시죠. 같이 오신 분은… 약혼자신가요?”

    몽블랑이 말을 맺으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놀리는 말이었지만, 파타슈는 맹수 소리를 들은 토끼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고 부정했다.

    “아, 아닌데요!”

    “크흠.”

    나는 민망한 기분을 감추려 짧은 헛기침을 하고 설명했다.

    “파타슈 님이에요. 키슈 님한테 아들 얘기 들은 적 없써요?”

    “아아, 키슈의.”

    몽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가 파타슈와 대면한 첫날이었다. 파타슈도 처음 만나는 엄마의 친구가 어색한 듯, 제대로 된 자기소개 대신 나와 몽블랑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그럼 이 녀석이 그 페가수스겠군요.”

    몽블랑이 내 품에 안긴 브라우니에게 손을 뻗었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자 녀석이 몽블랑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몽블랑의 손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에도 녀석에게서 그 외의 다른 반응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얌전히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즐기기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낯을 너무 안 가리는 것 아닌가.

    “데려가실 껀가요?”

    낯선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교육이라도 해줘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파타슈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태도는 꼭 ‘제가 책임질 테니 강아지 키우면 안 돼요?’ 하고 묻는 어린아이 같았다. 몽블랑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옅게 웃고는 브라우니를 쓰다듬던 손을 거뒀다.

    “아뇨, 꼭 데려가야 하는 건…….”

    “맞쬬! 연구, 하셔야 하잖아요. 그쵸?”

    내가 몽블랑의 말을 가로챘다. 그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아니, 연구는 키슈에게 맡기고 저는 종종 서신으로 상황을 살필까 했는데요.”

    “그래도 직접 보눈 게 젤 정확하죠.”

    “그렇긴 합니다만…….”

    몽블랑이 말을 흐리며 파타슈의 눈치를 보았다. 파타슈는 믿었던 나의 배신에 경악한 얼굴이었다. 입도 다물지 못한 저 얼굴을 보니 새삼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하지만 결심을 꺾을 생각은 없었다.

    인생 서고에서, 디몬은 내게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은지를 물어봤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내 이야기를 읽자마자 곧바로 갈레트의 열한 번째 생일을 선택했다.

    [그러고서 몽블랑은 복도를 걸어 나갔다. 엄마가 그를 배웅하러 따라갔다.

    어쩌면 나는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몽블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구절 때문이었다.

    당시의 나는 몽블랑을 내 적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엄마를 암살 위협에서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에 함부로 저택을 비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선 이미 정리했으니까.’

    내심 결연히 되뇐 내가 진지하게 몽블랑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제가 이 녀석을 키울 수는 없을 텐데요. 페가수스가 이미 두 분께 각인을 했다지 않았습니까?”

    의외의 말을 들은 그가 확인하듯 물었다. 내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니까 저희도 가께요.”

    “…예?”

    “후작님 저택에요!”

    “…….”

    똑똑.

    조용한 가운데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무래도 하녀가 차와 찻잔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실례합니다. 부탁하신 찻잔과…….”

    “파타슈우우!”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하녀의 목소리를 가르고 외친 키슈가 곧바로 파타슈를 끌어안았다.

    “으이그, 일어났는데 우리 아들이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말은 하고 갔어야지이!”

    오구오구 어화둥둥, 그의 정수리에 뺨을 문지르던 키슈가 뒤늦게 우리 표정을 보곤 방의 분위기를 깨달았다.

    “뭐야, 무슨 얘길 하고 있었길래 그래요?”

    “아니…….”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듯, 몽블랑이 뒤늦게 인사했다.

    “크흠, 오랜만이다, 키슈.”

    “그러게! 아들, 이 아저씨랑 인사는 잘했어?”

    “그…….”

    파타슈가 어물거리며 나와 몽블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크레페 님…….”

    별안간 키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아직도 몽블랑을 잊지 못해서 찾아오신 거예요?! 안돼요! 이 녀석, 생긴 건 멀쩡해도 크레페 님이랑 나이 차가 몇인데!”

    키슈가 내 어깨를 붙들고 짤짤 흔들었다. 경악스럽기까지 한 추론에, 나는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혀를 깨물기라도 할까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그만해, 어지럽겠다.”

    고맙게도 몽블랑이 키슈를 말려주었다. 내가 메스꺼움에 못 이겨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안 몽블랑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올해엔 다른 남자 친구가 생긴 것 같더라. 네 아들한테 애 아빠라고 하던데?”

    “어머.”

    “브라우니 얘기예요!”

    이런 화제를 한참 민망해할 나이의 파타슈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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