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8)화 (148/181)

148화 

* * *

“다들 와줘서 고마워, 누나. 형도.”

갈레트의 인사가 끝나자 학생들이 생일 축하한다며 환호했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다가, 아이들끼리 편하게 즐기라며 홀을 나갔다.

갈레트는 제 몸 뒤에 숨어있던 날 챙겨 단상을 내려갔다. 물론 그는 곧바로 친구들에게 둘러싸였기에 난 금방 그의 옷자락을 놓고 카눌레를 찾아 옆에 섰다.

“너, 원래 그렇게 주목받는 거 좋아했냐?”

“응?”

카눌레가 가는 눈을 뜨고 날 흘끗 쳐다보았다.

“갈레트 형이랑 같이 들어가겠다니, 너 원래 파티도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무래도 내가 갈레트와 함께 들어가겠다고 한 것 때문에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린애가 나뿐 꿈을 꾸면 그럴 쑤도 있찌.”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맞받아쳤다. 괜히 찔리는 기색을 내보여 봤자 좋을 것도 없었고.

“지 입으로 그딴 말을…….”

카눌레의 질린 표정을 봐야 했지만, 다행히 더 이상의 불필요한 의심을 사진 않았다.

“동생이야? 웬 쥐방울이 단상에서 굴러다니나 했더니만.”

그래, 등장할 줄 알았다.

나는 놀라지도 않고 크바스를 향해 생긋 웃었다.

“쥐방울뽀단 도토리가 조아요.”

“뭐야, 이 어이없는 꼬맹이는.”

“적당히 해. 오늘 갈레트 생일이잖아.”

젤라토가 끼어들어 크바스를 만류했다. 크바스는 자신이 뭘 했다고 그러느냐며 젤라토에게 툭툭거렸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들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이 모습을 봤을 때는 갈레트보다 훨씬 몸집 좋은 아이들이 시비를 걸고 말씨름하는 모습에 괜한 경계심이 들었지만, 스물한 살이었던 내 시점으로 보니 저들도 그냥 열다섯의 소년이었다.

뭐, 하나는 속이 넓고 하나는 속이 좁다는 차이점은 있었지만.

“크레페, 왜 혼자 갔어!”

갈레트가 겨우겨우 인파를 헤치고 나와 내 팔을 붙잡았다.

“아, 갈레트. 생일 축하해.”

젤라토가 먼저 나서서 말했다. 가만히 두면 크바스와 갈레트 사이에 또 말다툼이 오갈 것임을 알고 하는 행동이 분명했다.

“하하, 고마워.”

대답한 갈레트가 크바스를 쳐다보았다. 젤라토도 크바스를 쳐다보았다. 나도 크바스를 쳐다보았다.

군중심리에 못 이긴 카눌레도 크바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 순간, 크바스가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

“파티는 봐줄 만하네.”

“야.”

축하는커녕 호스트에 대한 예의도 아닌 말을 듣고, 젤라토가 크바스의 옆구리를 툭 쳤다. 크바스가 으르렁거리듯 미간을 찌푸리곤 젤라토의 시선을 받아냈다.

“형 친구야?”

카눌레가 갈레트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크바스의 시선이 카눌레에게 향했다.

“친구? 내가 저 쥐방울이랑 친구처럼 보이냐?”

“그럼, 칭구보다는 원수에 가깝찌.”

“…….”

혼자 팔짱을 낀 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주의가 집중됐다. 이를 갈던 크바스도 순간 맥이 풀린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참 나. 이 녀석은 대체 뭐야? 아까부터 다 아는 것처럼. 갈레트 너, 혹시 내 욕 했냐?”

“안 했어! 형 하는 걸 보니 욕먹고 싶은 것 같던데, 난 형이 바라는 대로 해주긴 싫었거든.”

갈레트가 뻔뻔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자, 말싸움에서 진 크바스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한참 쏘아보다가 퇴장했다.

“하하, 미안. 내가 잘 달래서 사과하라고 할게.”

젤라토가 크바스를 대신해 사과하곤 그의 뒤를 따라갔다.

휴, 한 건 해결인가.

나는 뽀송한 이마를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원래 진행대로라면 여기서 크바스가 계속 시비를 걸고, 거기에 발끈한 카눌레가 크바스와 대결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 꼴을 두 번 보고 싶진 않았다. 하마터면 카눌레가 크게 다칠 뻔했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카눌레와 크바스의 친분이 이날 일을 계기로 생긴 걸 떠올리면 나비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카눌레가 학교에 입학해서 검술에 두각을 드러내면 원내용을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크바스가 심성이 나쁜 것도 아니고.

“…음,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쭐은 몰랐는데.”

“응? 뭐라고?”

갈레트가 얼굴을 들이밀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그의 뒤편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보고 있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뒤늦게 민망해진 내가 헤실헤실 웃고는 갈레트와 카눌레를 잡아끌었다.

“아, 아냐. 케이크 먹으러 가자구!”

* * *

실컷 케이크를 덜어 입으로 퍼 나르던 내가 마침내 포크를 내려놓았다. 흐뭇하게 웃으며 내 배를 문지르자 갈레트가 풉, 웃음을 터뜨렸다.

“만족했어?”

그가 내 손에서 빈 접시와 포크를 가져다가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내 눈앞에 있는 건 식용 진주와 설탕 꽃으로 장식된 4단 초코 크림 케이크… 아니, 그 케이크가 있던 받침대였다.

촉촉한 초코 시트에 초콜릿을 섞은 버터크림, 거기에 은은하게 배어나는 헤이즐넛 향.

아마 저 4단 중 맨 아래에 있던 한 판 정도는 다 내 배 속에 들어있을 것이다.

윽, 느글거려.

“하지만 맛이써!”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친구들의 시선 때문인지 자중하던 갈레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날 강아지 안듯이 품에 꽉 끌어안았다.

“으으, 역시 너무 귀엽잖아, 내 동생!”

발이 대롱대롱 흔들려서 불편하긴 했지만 나는 무념무상에 든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디몬의 인생 서고에서는 잠을 잘 필요도, 먹고 마실 필요도 없었기에 이 지복(至福)은 정말 오랜만에 누리는 것이었다.

“끄윽.”

배를 눌린 내가 갈레트의 어깨에 턱을 대고 작게 트림했다.

“…속 안 좋아.”

카눌레가 짧게 말하곤 홀을 나갔다. 나로서는 그 이유가 케이크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 갈레트 때문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실제로 물어볼 틈은 없었다.

멋쩍게 헛기침을 한 내가 갈레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럼 오빠는 칭구들이랑 더 놀고 와. 나는 브라우니 보러 가께.”

조금 아쉬워 보이는 그의 귓가에 대고 브라우니 핑계를 대자, 갈레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 노셨습니까?”

내가 생긋 웃고 종종걸음으로 홀을 나오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마르크가 바로 따라붙었다.

“네, 이제 돌아갈 꺼에요. 급한 일이 있거든요.”

“급한 일이요?”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는 대답 대신 바지런히 다리를 놀려 내 방으로 돌아갔다.

오빠한테 거짓말하게 된 건 미안하지만, 친구들이랑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할 테니까.

그렇게 되뇌고 나는 마르크에게 오늘의 외출 일정이 끝났음을 알려 그를 돌려보낸 후, 책상 앞에 앉아 ‘내 인생 공략집’을 펼치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자, 공략집 업데이트 시간이다.

* * *

말했듯이, 디몬의 인생 서고에서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책을 읽었다. 이제 그 내용이 희미해지기 전에 정리해야 했다. 문제는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공부는 내 특기였으니까.

암기, 응용, 심화.

공부가 모든 일의 근본이라던 어른들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단순히 마법 수식을 계산하는 것에 그칠 줄 알았던 과거의 특기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되다니, 역시 뭐든 잘하고 볼 일이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서고에서 읽었던 소예언서의 내용을 되새겼다.

“뢰드그뢰드가 린처의 입학을 다그침, 엄마가 처음 암살 위협을 자각한 순간, 아펠이 신탁의 서를 발견한 날짜.”

언젠가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가 소설이 아니라 역사서처럼 서술되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제 굵직굵직한 정보들은 모두 내 머릿속에 있었으니, 내가 역사서를 한 권 편찬한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시간별 나열, 사건순 정리, 거기에서 파생될 경우의 수.

이렇게 저렇게 묶으며 손목이 저리도록 필기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크레페?”

노크 소리에 화들짝 어깨를 움츠리고 노트를 덮었다.

“여기 있었구나.”

엄마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딘가 곤란한 일이 있을 때만 나오는 표정이었다.

“무슨 일 이써요?”

“갈레트한테 브라우니를 보고 오겠다고 했다며? 지금 그 애가, 네가 행방불명됐다면서 난리 법석이야.”

“…금방 말릴게요.”

내가 노트를 서랍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냐, 같이 가자. 너희한테 할 말도 있거든.”

엄마가 고개를 젓고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헤헤, 웃고 쪼르르 달려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펜이나 검을 오래 잡으며 박인 굳은살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었다.

* * *

파타슈와 키슈가 묵고 있는 임시 거처, 갈레트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는 그곳은 피낭시에 제1기사단의 연무장이 있는 건물이었다.

물론 브라우니가 다른 방문객의 눈에 띄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브라우니를여?!”

파타슈가 날카로운 눈을 똥그랗게 뜨고 탁자를 내리쳤다. 힘이 어찌나 셌는지 그의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였다. 테이블 위에서 강아지처럼 앉아있던 브라우니가 화들짝 놀라 파타슈를 돌아보았다.

“…….”

어색한 공기에 파타슈는 탁자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엄마와 키슈는 물론이고 갈레트와 카눌레, 심지어는 나조차 그처럼 격렬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민망한 듯 파타슈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다섯 살배기 아이의 손바닥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손을 감싸고 호호 입바람이라도 불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이번 생에 갈레트와 파타슈가 철천지원수 사이가 될 수도 있었기에 참기로 했다.

“크흠.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겁니다. 그분이 브라우니를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신 건 아니니까요.”

엄마가 헛기침을 해서 분위기를 환기하고 설명을 이었다. 키슈가 파타슈를 위로하듯 어깨를 도닥거리며 말을 받았다.

“네에, 아무래도 페가수스를 인공적으로 부화시킨 사례가 없으니 확인은 필수겠죠. 황제 폐하께 알려드릴 것도 있겠고…….”

“크레페, 넌 괜찮아? 어쩌면 브라우니를 보내줘야 할지도 모르는데.”

엄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 태도가 시종일관 담담하니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리를 휘휘 저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괜차나요. 낼 오는 사람을 설득하면 대는걸.”

“설득이 되겠냐?”

“누가 오시는데요?”

카눌레의 톡 쏘는 말을 가로채고 갈레트가 물었다.

엄마는 나를 보며 살짝 웃었다. 물론 난 그 미소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크레페의 첫사랑, 몽블랑 후작님.”

“엄마아…….”

설마 엄마가 이런 식으로 날 놀릴 줄이야.

반눈을 뜨고 질책하는 투로 엄마를 쳐다보자, 별안간 맞은편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악! 첫사랑이라니, 너무 풋풋하다! 그렇지 않니, 파타슈?”

“네에에.”

키슈가 파타슈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드는 통에 파타슈의 대답은 꼭 염소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첫사랑 발언에 화낼 타이밍을 잃어버린 갈레트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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