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7)화 (147/181)

147화 

【 3부 - 다시 서고 밖으로 】

[‘나바께 없지?’

갈레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희뿌옇게 번진 시야로 몽블랑과 키슈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나한테도 오빠밖에 없써. 마법 못 해도 돼. 내가 지켜주께.’

크레페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으며, 갈레트가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흐읍…….”

책의 마지막 문장까지 읽은 내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디몬이 내 옆을 기웃거리다가 물었다.

“그렇게 재밌니? 벌써 다 아는 얘기를.”

“그래도요!”

산통을 깨는 디몬의 말에 재빨리 반격하곤 마지막 장을 덮었다.

“게다가 제가 정신을 잃은 다음 얘기는 처음 보는 거였다고요.”

“하긴 그렇겠구나.”

디몬이 금세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가 납득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바로 다음 권을 읽어야 했으니까.

이번엔…….

“어화둥둥 우리 아들?”

어째서 운명의 서는 다 제목이 이 모양인 거냐.

나는 내 옆에 쌓아둔 책 더미를 쳐다보았다.

『포동포동한 여주는 인기가 없나요』

『인생 스포일러를 피하는 법』

『운명을 믿지 마세요』

『대마법사가 되기 1,000일 전』

『악역 영애지만 악역은 아닙니다』

순서대로 나, 아펠, 몽블랑, 파타슈, 에클레어의 소예언서였다.

이 외에도 방금 본 갈레트의 생애가 적힌 것에서부터 부모님과 카눌레, 크렘, 뢰드그뢰드와 린처, 황제와 황비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최대한 많은 책을 섭렵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물론 디몬이 약속한 대로 ‘다시 돌아가게 될’ 그날을 위해서 말이다.

“안타깝지만, 그 책은 다 못 읽을 것 같네.”

“네? 자, 잠깐만요!”

디몬의 차분한 목소리와 달리, 내 마음은 조급해졌다. 나는 그가 날 뜯어말리기 전에 급하게 책을 펼쳤다.

이건 키슈의 책이구나. 어쩐지 제목부터 팔불출 느낌이 났지.

“세상 재구성도 이제 거의 다 끝난 것 같고.”

디몬은 내가 듣든 말든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가 내용을 열심히 훑어 내려가는 동안 그는 바닥에 널브러진 책을 들고 손가락을 튕겼다. 마법이라도 쓴 듯 책이 공중에 뜨더니, 책장이 펄럭거리며 안에 적힌 문장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저렇게 잉크가 사라지면 그의 ‘작업’은 끝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연신 되뇌며 한 줄이라도 더 읽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것도 곧 불가능해졌다. 읽고 있던 책이 공중에 뜨더니 바람에 휩쓸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앗!”

이제 와서 손을 뻗어봤자 떠나간 버스에 손 흔들기였다. 얼마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충분히 많은 정보를 얻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쉬웠다.

“이제 갈 시간이란다.”

시무룩한 내가 우스웠는지, 디몬이 웃음기 남은 얼굴로 손가락을 튕겼다.

“에, 어라?”

갑자기 내 몸이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당황한 나는 반사적으로 치맛단을 모아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붙잡을 만한 것은 없었고 내 몸은 우주 공간에 내던져진 것처럼 끝없이 높아졌다.

“이게 내가 바라던 결말이냐고 물었지. 이런 이야기를 봐서 행복하냐고.”

디몬이 평온히 날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혹은 그녀의 눈은 겨울 바다처럼 어둡고 한여름 숲처럼 푸르렀다. 비눗방울에 갇힌 듯 뱅글뱅글 돌던 내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뭐, 뭐예요? 설마 지난 일로 저한테 뭐라 하실 건 아니죠?”

이대로 추락하면 낙사 예정이었다. 물론 이미 죽은 내가 여기서 또 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쭉 늘어선 책장과 디몬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보니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긴 기분이었다.

내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그러쥐자 디몬이 피식 웃었다. 별안간 시야가 환해지며 밤도 낮도 없던 공간이 눈부신 순백색으로 물들었다.

“윽.”

태양을 똑바로 쳐다본 것 같은 고통에 눈을 꽉 감았다. 동시에 디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내 자식 같은 존재야, 너희가 불행하길 바란 적은 없단다.”

‘너희’라는 호칭 때문에 그의 말은 비단 내게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내가 아직 모르는 일이라도 있을까, 반사적인 경계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증명할 방법이 이뿐이라니 나 역시 아쉽구나.”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마치 깃털처럼 내 몸을 감쌌다. 먹지도 마시지도,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됐던 시간을 지나온 내 몸이 언제 그리 멀쩡했냐는 듯 포근함에 잠식당했다.

“후암…….”

점차 생각이 둔해졌다.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몽롱한 정신으로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이제 네가 원하던 이야기를 써보아라. 그리고…….”

‘그간의 일은 한낮 꿈을 꾼 듯 잊거라.’

디몬에게서 들은 것 중 제일 신 같은 말과 함께, 나는 눈을 떴다.

“어머, 일어나셨어요?”

에이미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팔에는 유아용 시폰 드레스가 들려 있었다. 나는 멍청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에이미, 회쮼했네요.”

“네에? 아유, 아가씨도 참!”

에이미가 호들갑을 떨며 내 팔을 잡아주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다시금 중얼거려보았다.

“회쮼.”

“네, 네. 회춘했다고 말하려던 거죠? 그 단어는 또 어디서 들었대요?”

에이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아기 같은 발음. 아기 같은 발. 아기 같은 손.

하나씩 짚어보던 내가 숨을 고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간의 일은 한낮 꿈을 꾼 듯…….’

마지막으로 들은 디몬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잊을 수 있겠냐!

* * *

“엄마아아아!”

“크레페?”

내가 제일 먼저 찾아간 건 엄마의 집무실이었다.

나는 침대 밑에서 귀신을 발견한 아이처럼 후다닥 달려 엄마의 허리를 끌어안고 품에 뺨을 비비댔다.

“얼굴에 흉 져요!”

에이미가 깜짝 놀라며 날 끌어당겼다. 내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엄마를 올려다보자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에이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딱히…….”

“나쁜 꿈을 꿨써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자 그들의 시선이 날 향했다. 곧 엄마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구나, 우리 딸. 많이 무서웠나 보네.”

그냥 잠투정으로 들리는 건가.

조곤조곤 날 달래는 목소리를 듣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예지몽 얘기를 꺼내고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 건 좀 더 미래의 일이었으니까.

아, 그래. 확인은 한번 해야지.

문득 떠올린 내가 엄마를 마주 보고 물었다.

“오늘이 오빠 생일이죠? 올해 몇 쌀이었떠라?”

“너보다 다섯 살 많으니까 열한 살! 계산도 못 해? 작년에 입학해서 이제 이 학년이잖아!”

카눌레의 앳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문을 돌아보자 잠옷 차림의 카눌레가 이마의 땀을 문대며 툴툴거렸다.

“으휴, 갑자기 무슨 호들갑이야?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네!”

“크레페가 안 좋은 꿈을 꿨대.”

내가 저택을 가로지르며 엄마를 부르는 것을 들은 모양이었다. 민망해진 내가 입을 다물자 카눌레 뒤로 조금 더 큰 사람 형상이 나타났다.

“응? 꿈에 귀신이라도 나온 거야?”

“…….”

갈레트였다.

생일의 주인공이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그 역시 잠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옷자락을 쥔 채 갈레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갈레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왜, 어떤 귀신이 우리 동생을 이렇게 무섭게 했어!”

굳이 말하자면 귀신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엄마랑 본인이겠지만.

나는 자세한 설명을 하는 대신 간단히 얼버무렸다.

“오빠랑 엄마랑 아빠랑 다 죽는 꿈 꿨써… 카눌레 오빠만 빼구.”

“왜 나는…….”

카눌레가 웅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살아있었다는데 왜 그렇게 찝찝한 표정이야?”

갈레트가 피식 웃으며 카눌레를 툭 치곤 집무실에 들어왔다. 그가 엄마의 품속에 있던 나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안 죽었어. 엄마랑 나랑 둘 다 여기 있잖아.”

“그래,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자고. 좀 있으면 형 친구들도 올 텐데.”

감정이 메마른 카눌레가 냉정히 말하고는 뒤돌아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 보면 오늘은 젤라토와 크바스를 처음 만나게 되는 날이기도 했다.

“가자.”

갈레트가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하지만 나는 발에 힘을 주고 자리에 서서, 곧바로 준비하러 가는 대신 갈레트의 옷자락을 꽉 붙들고 투정 부리듯 말했다.

“나, 이따 오빠랑 같이 입장할래.”

“크레페…….”

생일 주인공과 함께 입장하겠다는 말에, 갈레트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럴 만했다.

내 입장에서야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사람과 재회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그냥 어제도 평범하게 인사하고 헤어진 동생이 갑자기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갈레트의 반응은 내 예상과 달랐다.

그가 별안간 날 끌어안더니 감격에 찬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수가, 내 사랑이 드디어 보답받았어!”

…뭐라는 거야?

* * *

“걱정 마세요. 브라우니는 저희가 잘 돌보고 있을게요.”

“네에…….”

나는 키슈와 파타슈를 연신 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저렇게 당당히 말하지만 내일 그들은 브라우니를 잃어버리게 된다.

물론 오늘은 별일 없겠지만.

미래를 알고 있으니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물론 브라우니는 제 아빠인 파타슈가 옆에 있으니 아무 걱정 없어 보였고.

나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결연한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휴, 어때요? 괜찮죠?”

에이미가 내 시폰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물었다.

“네, 조아요!”

허리까지 구부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내 등에 묶인 커다란 리본이 팔랑거렸다. 에이미가 흐뭇하게 웃고는 내 머리카락을 두껍게 땋아 머리띠처럼 반대쪽으로 넘긴 후, 보라색 보석이 박힌 꽃 핀을 꽂아 고정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페가수스 모양의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후후, 오늘따라 아가씨가 너무 귀엽네요.”

에이미가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나름 어른스럽게 굴었던 내가 나쁜 꿈 한 번 꿨다고 아침부터 호들갑을 떨거나 진지한 얼굴을 하는 게 귀엽게 보인 모양이었다.

내 심정도 모르고, 하는 생각으로 삐치는 대신 나는 그녀를 보며 활짝, 마주 웃었다.

“저도 그러케 생각해요.”

“어머.”

에이미가 웃음을 삼키고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문을 연 후, 곧바로 허리를 숙여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왼쪽에 말을 걸었다.

“가시까요, 기사님?”

“오, 레이디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르크가 가볍게 대답하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제가 대기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인생 두 번 살면 알게 대요.”

친절히 대답해 주었는데도 마르크는 말뜻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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