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옆에 선 그는 어색하게 빈손을 꼼지락거리다가, 갈레트가 고개를 들자마자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야, 내 꽃을 네가 올리면 난 뭐 해.”
“알아서 해.”
크바스의 입장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갈레트가 짧게 대답하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저…….”
“뻔뻔하기도 하지.”
크바스가 이를 갈던 그때,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에클레어였다.
크바스는 그녀의 시선이 순간 제게 와 있는 줄 알고 멈칫했다. 그러나 에클레어는 갈레트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오빠가 누구 때문에 죽었더라? 혹시 모르는 건가? 세기의 천재로 명성이 자자한 최연소 마법사께서?”
“…….”
그들 가운데 낀 크바스가 눈동자를 굴렸다. 아펠의 생일날 개최된 연회에서 둘은 서로 존대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반말을 쓰는 걸 보니 친해졌구나!’ 하고 있을 분위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갈레트가 어쩌다 크레페를 등지고 아펠의 편에 섰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저 아펠의 명령이 있었기에 수행했을 뿐, 그는 본래 정치판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둔한 편이었다.
‘젠장, 도토리… 아니, 크레페는?’
급히 찾아보았지만 갈레트가 껌뻑 죽던 막냇동생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크바스는 어쩔 수 없이 카눌레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카눌레는 침통한 표정으로 에클레어 쪽을 쳐다보았을 뿐 크바스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쯧.’
크바스가 내심 혀를 찼다.
사정도 모르면서 멋대로 끼어들 수는 없었다. 애초에 크바스의 특기는 싸움을 거는 것이지, 말리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건 오히려…….’
젤라토의 빈자리를 이런 식으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크바스가 눈물을 참으며 이를 악문 그때, 에클레어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 손잡이를 쥐었다.
“내가 이대로 보내줄 것 같아?”
“에클레어!”
크바스가 급히 에클레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장례식장에 들어오기 직전에 모든 무기와 방어구를 해제한 상태였다. 에클레어가 검을 휘두르거나 갈레트가 마법을 시전한다면 그의 몸은 종잇장처럼 찢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갈레트의 호위로 온 것이었다. 사정은 모르나 갈레트와 에클레어 둘 모두를 위해서도 이 사태를 그냥 방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크바스 오빠, 그래, 황실 기사단에 들어갔다고?”
감정을 억누르는 듯 에클레어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검 손잡이를 놓고 대신 제 안대를 부여잡더니, 이내 괴로움을 삼키는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차라리 오질 말지.”
크바스는 에클레어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크바스의 머릿속에선 그간의 정보들이 마치 도미노처럼 이어지며 하나의 가능성을 그리고 있었다.
‘설마…….’
초조하게 헤아려보던 크바스가 별안간 헉, 숨을 들이켜곤 갈레트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오늘 밤에도 그와 함께 호위를 비롯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 * *
- 저는 태자의 명을 받아 갈레트… 님을 호위하러 온 겁니다. 시비를 그냥 홀시할 수는 없습니다.
‘대결이라니, 참으로 좋은 핑곗거리구나.’
갈레트는 낮에 들은 크바스의 말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덕분에 혈혈단신 변방으로 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래도 크바스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는 수고로움을 덜었으니 그건 장점이었다.
‘그보다 권력이 좋긴 좋네. 크바스 형한테 갈레트 님 소리도 다 들어보고.’
“후회 안 해?”
“…….”
카눌레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갈레트는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얼마 전에도 똑같은 질문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갈레트는 카눌레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지만 카눌레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검은 숲 쪽에서 들려오는 괴성, 달빛 아래서 파도처럼 일렁이는 몬스터들의 그림자. 그것들은 조금씩 이곳 본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펜리르를 아직 못 찾은 거겠지. 머랭이라고 했던가.’
거대화는 아펠 슈트루델의 팔찌가 있어 가능했지만 투명화는 스스로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녀석이 마나를 사용해 몬스터들의 주의를 끌도록 놔둔 것이 갈레트였다.
마법사가 많으니 녀석의 투명화도 언젠가 발각되긴 하겠지만, 일이 이렇게 커진 이상에야 사태를 금방 잠재우지는 못할 것이다.
‘며칠 전에는 변방에서 마나를 운용하다니 무슨 짓이냐며 성을 냈었는데.’
갈레트가 자조했다.
“갈레트 형.”
그는 제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고서야 카눌레와 눈을 맞췄다. 부모 누구에게도 없는 검은 머리와 붉은 눈 때문에 그는 마치 타인처럼 보였다.
“크바스 형은…….”
말하다 말고 카눌레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보자 풋,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걱정되나 보구나.’
크바스가 에클레어에게 어깨를 베인 게 바로 열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이 다급한 상황에서 그의 이름을 꺼낸 데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카눌레는 원래 크바스와 친했으니까.’
마탑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갈레트도 크바스와 한방을 썼다. 둘의 친분을 새삼 지탄할 생각은 없었다.
“겁쟁이의 선택이지.”
맥락 없이 말하자 카눌레가 눈썹을 치켰다.
“무슨 뜻이야?”
“원래는 밤까지 나랑 동행하게 되어 있었어. 지금은 부상을 핑계로 빠진 거고.”
“…형이 일부러 다친 거라는 소리야?”
“눈치가 빠르네.”
‘머리는 나쁘지만.’
갈레트가 뒷말을 삼키고 웃었다. 그는 카눌레가 학교 입학 시험과 그 성적순으로 뽑히게 되는 기숙사에 한 번씩 미끄러진 걸 기억하고 있었다.
굳이 그 말을 꺼내 카눌레를 자극하는 대신, 그가 다른 말을 이었다.
“바니유 영애는 얻은 지 얼마 안 된 부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지도 못했어.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 질 이유가 어디 있겠어?”
“그렇게 될 걸 알고 결투를 허락한 거야?”
낮의 상황을 떠올린 듯 카눌레가 물었다. 갈레트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긍정을 대신했다.
“…형이 원하는 게 뭔데?”
카눌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갈레트는 그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을 떠올렸다. 자신이 크레페와 대립하게 된 원인과 지금 변방까지 찾아온 이유.
둘 중 무슨 답을 구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갈레트는 저에게 조금씩 가까워지는 몬스터들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몰래 입술을 달싹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진을 땅에 펼치는 게 평소보다는 까다로웠다. 아펠 슈트루델의 팔찌를 착용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어.”
대답이 늦어지자 수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역시 눈치는 빠르구나, 싶어 갈레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나 흐름에는 둔하지만 말이야.’
갈레트가 가볍게 수식을 계산하자 날카로운 마나가 쏘아졌다. 카눌레는 눈살을 찌푸리곤 검을 뽑아 들었다. 어릴 때 아빠에게서 받은 마나 차단 검이었다.
맥없이 막힌 공격이었지만 애초에 통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카눌레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뿐.
이제 그가 모르는 사이에 발밑엔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마나를 감지한 몬스터 하나가 이쪽을 공격하려 날아오자 카눌레가 인상을 구기고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지금.’
위협조차 되지 않은 출현이었으나 갈레트는 이때가 기회임을 눈치챘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곤 재빨리 새로운 수식을 계산했다. 노리는 것은 카눌레의 다리였다.
‘녀석이라면 얌전히 크레페를 보내주진 않을 테니까.’
마법진으로 카눌레의 움직임을 무디게 만든 후 공격 마법으로 그를 무력화시키는 게 목표였다.
그다음엔 아펠의 팔찌를 이용해 크레페에게 수면 마법이라도 걸어 데려가면 그의 임무는 끝. 이후 관련 인사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거나 소문을 막는 일은 아펠에게 맡기고 자신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갈레트가 그에게 마법을 쏘아낸 직후에 카눌레를 당긴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자, 그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직감했다.
- 사람이 어쩜 저렇게 작을 수 있을까.
“크레페!”
그 이름을 부른 것은 갈레트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갈레트의 몸을 향해 검이 날아왔다.
하지만 그것에 반응할 정신은 없었다. 갈레트는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끼고 나서야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클레어? 자, 잠깐만, 이건…….”
카눌레가 뭐라 말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갈레트는 크레페에게 다가가 주저앉았다. 크레페는 마차 사고를 당한 소동물처럼 속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바닥에 고인 피는 누구 것인지 구분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흥건했다.
갈레트는 제 상처를 막고 있던 손을 떼고 크레페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창백한 얼굴에, 그의 손에서 묻은 피가 도드라졌다.
“하… 하하…….”
별안간 크레페가 보름달 같은 눈을 휘며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웃음에 갈레트는 떨리는 손을 살짝 그러쥐었다.
- 이제 서로 양보할 수 없게 됐네. 괜찮겠어? 내가 볼 땐 조금 경솔한 선택이었던 것 같은데.
크레페에게 전한 그 말은 사실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젤라토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부채감을 가져봤자 선택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피오르를 설득하러 갔을 때, 그는 ‘무섭다’고 말했다.
아끼는 제자 둘과 오래 함께한 친우, 자신의 목숨 사이에서 어느 한쪽도 선택할 자신이 없다고.
크바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오래 함께한 친우에 대한 정과 기사로서의 명예, 그중 무엇도 선택할 수 없었기에…….
“…….”
갈레트는 더 이상의 생각을 멈추고 마법진을 전개했다. 순간 카눌레와 눈이 마주쳐, 갈레트는 이를 악물고 웃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그런 게 어디 있어.’
크레페는 이미 의식을 잃은 채였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수식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범인(凡人)의 눈엔 보이지 않을 황금빛의 진 위에서, 갈레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고백을 하기로 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숨겨왔던 것, 크레페에게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을 말이다.
“있잖아, 크레페.”
갈레트가 몸을 숙이고 귓가에서 속삭였다.
“나 사실 단것 별로 안 좋아해.”
크레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갈레트는 그 모습이 괜스레 우스워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그는 어느새 크레페의 몸 위에 쓰러져 있었다.
- 나바께 없지?
갈레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희뿌옇게 번진 시야로 몽블랑과 키슈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 나한테도 오빠밖에 없써. 마법 못 해도 돼. 내가 지켜주께.
크레페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는 소리를 들으며, 갈레트가 웃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