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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5)화 (145/181)
  • 145화 

    “왜, 귀엽쨔나.”

    타르트를 삼킨 크레페가 갈레트의 접시에 두 알 남은 알사탕 중 하나를 입에 넣었다. 입이 작아서 사탕 하나만 넣었는데 볼이 볼록해졌다.

    “귀엽다니, 뭐가? 카눌레가?”

    “웅. 아기 고양이 같찌 않아?”

    “…….”

    갈레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훈련 중인 카눌레를 쳐다보았다. 암만 봐도 아기 고양이라기보다는 살인 살쾡이처럼 사나운 인상이었다.

    “…저게?”

    반응이 시원찮으니 크레페는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며 갈레트의 눈치를 보았다. 이와 사탕이 부딪쳐서 달그락달그락 유리구슬 구르는 소리가 났다.

    “물론 오빠가 더 귀엽찌만!”

    도로록 눈을 굴리던 크레페가 급히 덧붙이고 하나 남은 알사탕을 갈레트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그의 시원찮은 반응이 질투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신경 써주는 게 귀엽지!’

    갈레트가 합, 소리를 내며 크레페의 손가락까지 입에 넣었다.

    “으엑.”

    크레페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하지만 갈레트는 그것을 무시하고 곧바로 사랑스러운 동생을 꼭 껴안아 주었다.

    “수, 숨 막혀어.”

    갈레트가 크레페를 위해 살짝 팔에 힘을 풀었다. 하지만 아예 놓아주진 않았다. 폭신폭신한 게 외국에서 들여온 베개보다 좋았으니까.

    “제발 딴 데 가서 놀아!”

    멀리서 카눌레가 빽 소리쳤다.

    * * *

    “갈레트!”

    “예, 옙!”

    갈레트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판서 중이던 피오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는 것이 보였다.

    갈레트는 민망한 얼굴로 입가를 문질렀다. 다행히 침을 흘리진 않은 것 같았다.

    “잠을 못 잤나?”

    “예에, 조금…….”

    피오르는 갈레트가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수업 중에 조는 것이나 졸다 일어나자마자 입가부터 확인하는 것이나 똑 닮은 꼴이었다.

    ‘그래서 내가 더 약해지는 걸지도 모르겠군.’

    “크흠, 피곤해 보이니 여기까지 하지. 나머지는 숙제로 남겨두마.”

    “감사합니다. 하암…….”

    갈레트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끝내곤 곧바로 하품을 했다. 뭐라 한마디 할까 했지만, 스스로도 멋쩍은 표정이었기에 피오르는 그냥 못 본 척해 주기로 하고 교실을 나갔다.

    “…….”

    갈레트는 말없이 책 정리를 시작했다. 피오르는 좋은 스승이었고, 키슈도 자신을 신경 써주고 있었으며, 선배들의 텃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갈레트는 마탑 생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크레페가 없으니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크레페는 갈레트에게 마탑 입성을 권한 이후로 통 저를 보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편지는 자주 주고받고 있지만.’

    갈레트는 제 방에 들어가자마자 편지지부터 찾았다. 그가 크레페를 보겠다고 몰래 마탑을 탈주하려 했던 사건 이후, 크레페도 이젠 편지를 꽤나 열심히 써주곤 했다.

    ‘마지막 편지가 아마, 에클레르 오 바니유가 드디어 크레페의 생일을 제대로 알게 됐다는 말이었던가?’

    에클레르의 오빠인 젤라토와는 친분이 있었으나 에클레르 본인과 만난 적은 없었다. 갈레트는 괜히 깃펜을 굴리다가 젤라토의 안부를 묻는 말을 몇 줄 썼다.

    새로 배운 마법에 대해서도 몇 줄, 크레페가 좋아할 만한 디저트를 발견했다는 말도 몇 줄, 곁가지로 카눌레나 크바스에 대한 질문도 몇 줄.

    그러다가 갈레트의 손이 문득 멈췄다.

    ‘말할까, 말까.’

    답 없는 질문을 되뇌며 그는 책상에 올려둔 다섯 손가락을 파도타기 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손톱과 책상이 부딪치며 타르륵 타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엄마의 유품이 발견됐다. 아빠가 철수하라고 명령한 곳에서.’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생각이 정리됐다.

    프랄린 세자르 쉬제트. 그는 변방에서 제일 신임 받는 지휘관이었다. 또한 미개척지에 지원을 나간 귀족은 무려 십수 명. 만일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한 명쯤은 충분히 후방으로 빼낼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거야.’

    갈레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제 잠을 설친 게 그 정보 때문이었다. 차라리 아예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알아보려 하면 할수록 아빠에 대한 원망의 마음만 더해가고 있었다.

    - 그니까 엄마는 오빠한테 맡길게. 내가 마법 배워 오는 동안, 오빠가 엄마를 지켜줘! 알겠찌?

    “아니, 나에 대한 원망이지.”

    갈레트가 씁쓸하게 웃으며 혼잣말했다.

    어쩌면 크레페는 잊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갈레트는 기억하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동생과 무슨 약속을 했는지, 그리고 변방 지원을 나가겠다는 엄마의 말에 자신이 얼마나 안일하게 대처했었는지.

    ‘내가 못 가게 막았어야 했는데.’

    결국 이번에도 그의 생각은 자책과 후회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갈레트가 고개를 저어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고 편지를 마저 썼다. 부모에 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 없이.

    사랑스러운 동생은, 어릴 때부터 생각이 너무 많았으니까.

    * * *

    - 우리 막내, 맨날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을까. 겨우 다섯 살이면서. 응?

    크레페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걸까, 하는 의구심은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크레페는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아이였고, 행동반경도 그리 넓지 않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크레페도 ‘신탁의 서’를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 전까진.

    “…그럼, 처음부터 크레페는 전하의 비밀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숨기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펠이 담담히 대답했다. 갈레트가 상황을 정리하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젤라토가 죽었다는 말을 막 전해 들은 참이었다. 갑자기 크레페가 무력까지 동원해 가며, 심지어 변방 몬스터들의 습격이라는 위험을 감수해 가며, 본인의 마력마저 동원해 몽블랑을 돌려받아 갔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하지만…….’

    갈레트가 눈을 찡그렸다. 맺혀 있는 줄도 몰랐던 식은땀이 광대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크레페가… 제 동생이 그 사실을 퍼뜨리면 어쩌려고 고백하신 겁니까?”

    그 질문을 들은 아펠이 흘끗 그를 쳐다보았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손에 든 서류를 마저 보려는 것 같긴 했으나 페이지가 넘어가진 않았다.

    “어차피 크레페는 결국 절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게 제가 본 운명이니까요.”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고집 센 말에 갈레트의 미간이 움찔했다. 그러나 아펠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었죠.”

    완전한 과거형이었다. 종이를 내려놓은 아펠이 갈레트와 눈을 맞췄다. 눈빛은 그 푸른색과 어울릴 만큼 시리고 차가웠다.

    “갈레트 공께서 원래 오래전 목숨을 잃을 운명이었다는 건 말씀드렸었지요.”

    ‘협박이라도 하려는 건가?’

    말에 담긴 내용 때문에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펠에겐 딱히 그럴 기색이 없어 보였다.

    “예, 기억합니다.”

    갈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 원래 운명에서, 내가 죽을 거라는 거 알았어?

    아펠에게서 얘기를 듣고 나서, 갈레트는 크레페에게 물었고 그때 그녀의 눈빛과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갈레트는 그냥 물어봤다는 말로 얼버무렸지만, 실제로 크레페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모를 수는 없었다.

    - 나한테도 오빠밖에 없써. 마법 못 해도 돼. 내가 지켜주께.

    어릴 때 들었던 크레페의 혀 짧은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신탁의 서를 본 게 대체 언제지? 아니면 예지몽?’

    갈레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펠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공께서 멀쩡히 살아계신 것을 보니 역시 정해진 운명이란 없는가 봅니다.”

    그 말을 꺼내는 아펠은 뭔가를 포기한 것 같기도 했고 반기는 것 같기도 했다. 갈레트가 그의 심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리자 곤란한 질문이 나오기 전에 아펠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보다 공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제 비밀을 묵인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지탄을 피치 못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애초부터 명예나 명분 때문에 크레페와 대립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 나는 그저…….’

    - 미안, 크레페. 난 누가 황제가 되느냐, 그런 거엔 별 관심이 없어.

    갈레트는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잠시 입술을 짓씹었다. 이제 와서 자세한 사정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우선 목표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크레페의 안녕 말이다.

    “저는 바니유가의 장례식에 다녀오겠습니다.”

    갈레트가 자세를 추스르고 짧게 말했다. 아펠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펜을 들었다.

    “황실 기사단의 크바스 경과 친분이 있으신 것 같던데, 호위로 대동하시지요.”

    바니유 공작과 갈레트의 관계와 그 장소를 생각하면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으나 아펠은 그에 대해선 별 반응이 없었다.

    ‘호위이자 감시역이겠군.’

    “알겠습니다.”

    곧바로 수긍한 갈레트가 예를 올리고 집무실을 나가려던 차였다. 문고리를 잡은 그때 아펠의 마지막 물음이 이어졌다.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갈레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가 아펠을 돌아보며 잊을 뻔한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크레페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역시 너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고.”

    “…….”

    “조만간 ‘설득’하러 가지요.”

    갈레트가 평소 같은 미소를 짓고는 집무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 * *

    “너냐? 역대 최연소 입학자라는 놈이.”

    ‘놈?’

    거친 어투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겨우 열 살인 갈레트도 그런 호칭이 귀족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선 사람은 그런 것 따위 안중에 없는 듯했다.

    갈레트는 그를 무시하고 책을 꺼냈다. 그러자 그는 들고 있던 목검을 세워 책을 펼치지 못하게 꾹 눌렀다.

    그쯤 되니 더 이상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어차피 갈레트도 자신이 최연소 입학자라는 얘길 듣고 어느 정도의 텃세는 예상했다. 이 상황이 크게 당혹스럽진 않았다.

    “예의란 것을 모르십니까?”

    “하?”

    점잖은 척 목소리를 깔아봤자 아이 특유의 미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상대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맞아, 몰라.”

    뒤이어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대답을 가로채 간 절묘한 타이밍에 그가 얼굴을 구기며 뒤를 돌아보았다.

    갈레트가 목을 길게 빼자 상대의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보였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유순한 인상의 소년이었다.

    “내가 이 녀석한테 예의범절 좀 가르쳐보려고 몇 년을 고생했는데 안 먹히더라고.”

    “얌마.”

    “나는 젤라토, 이쪽은 크바스야. 너는 갈레트지? 얘기 많이 들었어. 유명하던데.”

    젤라토는 붙임성 좋게 말하며 갈레트의 옆자리에 앉았다. 갈레트가 무심한 눈빛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동갑?”

    “응. 열네 살이야.”

    “노안이구나.”

    주어를 붙인 적도 없는데 한 명의 얼굴만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풉.”

    젤라토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꼬맹이한테 당하는 게 재밌냐?”

    “꼬맹이라니, 아카데미 동기한테.”

    갈레트는 그들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의 성격과 관계를 파악한 그가 생긋 웃으며 젤라토에게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젤라토 형.”

    * * *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젤라토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며, 갈레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

    “…….”

    멍하니 앉아 있던 크바스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갈레트는 그의 허벅지 위에 놓여 있던 꽃다발을 직접 들고 장례용 제단 앞에 섰다.

    그러고는 꽃다발과 함께 품에서 꺼낸 브로치도 내려놓았다. 흑요석과 검은 진주를 사용해 백합 모양으로 만든 장신구는 부조금 대용이었다.

    브로치는 자신이, 꽃은 크바스가 사비를 털어 마련한 것이다.

    갈레트가 짧게 묵념하자 크바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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