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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4)화 (144/181)
  • 144화 

    【 외전 - 갈레트 드 루아 쉬제트 】

    ‘사람이 어쩜 저렇게 작을 수 있을까.’

    갈레트는 아기 침대의 창살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동생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땡글땡글한 눈은 맑은 보랏빛이었고 주먹은 하얀 조개처럼 꽉 다물려 있었다.

    “동생 괴롭히면 안 돼.”

    갈레트의 뒤에 서 있던 수플레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하지만 갈레트는 듣는 둥 마는 둥, 동생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대답했다.

    “안 괴롭히는데요?”

    “잠자는 데 대고 계속 책을 읽어주는 건 괴롭히는 거 아닐까?”

    “크레페도 좋아해요.”

    수플레가 할 말을 잃고 힘 빠진 미소를 지었다.

    크레페는 태어난 지 이제 겨우 몇 개월째였다. 좋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좋다’는 게 뭔지도 모를 텐데, 갈레트는 자신 있어 보였다.

    “진짜예요! 저번엔 제가 읽기를 멈추니까 곧바로 눈을 뜨고 내 옷을 잡아당기더라고요. 읽어달라는 뜻 아니겠어요?”

    “그래, 그랬구나.”

    “진짠데.”

    엄마인 수플레가 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자, 갈레트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꺄우!”

    “앗, 아냐, 나 화 안 났어.”

    크레페가 옹알이를 하자마자 갈레트가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갈레트의 말마따나 크레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생긋거렸다.

    수플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카눌레한테는 아직도 데면데면하면서.’

    크레페와 함께 있을 때의 갈레트를 카눌레와 뒀을 때와 비교하면 마치 딴사람 같았다.

    ‘크레페랑은 나이 차가 많이 나서 그런가…….’

    “엄마! 이거 봐요, 동생이 내 손 잡았어!”

    “아하하, 그래, 그래. 오빠가 얼마나 좋으면 떨어지질 않네.”

    “그쵸?”

    갈레트가 제 아빠를 닮은 얼굴로 눈웃음을 지었다. 수플레는 그림으로만 본 프랄린의 유년기 얼굴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갈레트는 반짝이는 눈으로 제 손가락을 세게 잡은 크레페의 고사리손을 톡, 톡 건드려보았다.

    “역시 우리 동생 너무 이쁘다. 인형 같아.”

    “푸!”

    크레페가 대답처럼 입술을 오물거리고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염없이 동생만 쳐다보는 통에 가만히 뒀다간 점심시간이 훌쩍 지날 것 같아서, 수플레는 얼른 갈레트를 달래 식당으로 향해야 했다.

    * * *

    수플레의 보좌관을 맡고 있는 에이미는 최근 누구보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쉬제트가의 막내인 크레페가 그녀의 디저트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쪼아하는 거에요? 사랑이지, 사랑!”

    아직 혀 짧은 소리를 내는 카눌레가 훙, 콧바람을 내쉬었다.

    “따랑! 따랑이야!”

    아기용 의자에 앉은 크레페가 발을 동동 구르며 뭉툭한 포크를 꽉 쥐었다. 카눌레의 말을 반복하는 걸 보니 지금 막 새로운 단어를 배운 모양이었다.

    “네에, 오늘 디저트 갑니다아.”

    에이미도 그 반응에 덩달아 신이 났다. 크레페의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보는 사람이 행복해질 정도의 표정에 수플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참, 누굴 닮아서 단걸 저리 좋아하는지.”

    “아기잖아요. 좋아할 만도 하죠.”

    에이미가 가볍게 말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수플레는 성인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갈레트와 카눌레는 둘 다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나름 좋아하긴 했지만 사랑하진 않았다.

    하녀나 시종 대신 에이미가 바빠진 원인도 거기에 있었다.

    그동안 굳이 디저트 전문 요리사를 고용할 필요가 없었기에, 오래전부터 베이킹을 취미로 하던 에이미가 제일 믿음직한 파티셰가 되어버린 것이다.

    ‘두 도련님은 디저트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굳이 찾지 않는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크레페는 달랐다. 제대로 말문이 트이지 않았을 때도 식사 후에 후식이 나오지 않으면 방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개를 저으며 ‘찌러! 찌러!’를 외쳤다.

    ‘아마 푸딩을 처음 먹고부터였지?’

    푸딩에 코를 박고 후루룩거렸던 크레페의 모습을 떠올린 에이미가 미소 지었다.

    “엑.”

    제 앞에 놓인 접시를 보자마자 카눌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시룬데요.”

    “카눌레, 에이미가 고생해서 만들어준 거잖아.”

    “그래도 시룬데요.”

    에이미가 크레페 앞에 접시를 놓으려다 말고 오늘의 메뉴를 내려다보았다. 생크림을 올린 당근케이크였다.

    ‘아차.’

    “이거 당근이자나요.”

    에이미의 내적 탄식과 동시에 카눌레의 투정이 터져 나왔다. 잘게 다져서 숨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카눌레의 매의 눈이 당근 조각을 찾아낸 듯했다.

    “네 살이나 먹고 유치하게 반찬 투정이라니.”

    여섯 살배기가 네 살짜리에게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갈레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당근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음, 맛있네요.”

    “호호, 감사합니다.”

    에이미가 카눌레의 투정을 무시하고 갈레트를 보며 웃었다. 수플레도 그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또야?’

    카눌레는 분위기를 느끼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그가 제일 싫어하는 상황이었다. 제 친형인 갈레트는 뭐든 잘하고 성격도, 사교성도 좋았다. 반면 자신은 외모부터 겉돌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쉽게 섞일 수가 없었다.

    ‘먹어야 하나…….’

    카눌레가 세상 복잡한 표정으로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먹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당근이라니, 케이크에 당근이라니!’

    대체 그런 악식을 떠올린 변태가 누구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순간, 별안간 크레페가 손을 뻗었다.

    “쪼!”

    “어머, 내 정신 좀 봐. 아가씨 몫을 아직 안 드리고 있었네요.”

    에이미가 들고 있던 접시를 크레페 앞에 놓았다. 하지만 크레페는 고개를 젓고 다시금 에이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 쪼!”

    “응?”

    크레페 옆자리에 있던 수플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눌레 케이크를 달라는 거 아닐까요?”

    “웅웅. 까눌레! 찌러! 크레페! 쪼아!”

    갈레트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레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통한 팔다리를 움직여 바지런히 자기주장을 했다.

    카눌레와 달리 자신은 당근케이크를 좋아하니 그의 것까지 제 몫으로 달라는 뜻으로 보였다.

    ‘하지만 아직 말도 떼지 못한 어린애가 자기 생각을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다고?’

    그런 의문에, 에이미와 수플레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크레페! 따랑!”

    “그럼, 그럼. 크레페는 사랑이지.”

    테이블 너머에서 갈레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거들었다.

    * * *

    갈레트는 학교에 입학했다.

    열 살. 공식적으로 기록된 커스터드 귀족 학교 최연소 입학생이었다.

    에이미는 혹시라도 어리다는 이유로 괴롭힘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했고, 수플레는 갈레트라면 걱정할 것 없다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에이미의 걱정은 다행히 실현되지 않았다.

    젤라토 르 바니유. 바니유 공작가의 장남이 앞서서 갈레트에게 다가와 준 덕분이었다.

    “야. 동생은 잘 있냐?”

    교실에서 과제물을 정리하던 갈레트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른 사람은 없었다.

    질문을 들은 갈레트가 실소했다.

    “형이 나한테 멀쩡한 말을 할 때가 다 있네.”

    “내가 뭘……!”

    크바스가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다가 멈췄다. 제가 생각해도 그가 먼저 갈레트에게 말을 거는 때는 손에 꼽혔다. 그나마도 시비 거는 말 아니면 비꼬는 말이었으니, 마냥 부정하기엔 찔리는 듯했다.

    그래 봤자 크바스는 한 번도 갈레트를 말로 이긴 적이 없었지만.

    “크흠, 아무튼 잘 있냐고.”

    크바스가 다시금 묻자 갈레트가 책을 정리하며 답했다.

    “크레페? 물론이지. 아, 아니, 설마 우리 동생한테 흑심이 있는 건…….”

    “도토리 아닌 쪽!”

    크바스가 다급히 덧붙였다.

    “카눌레? 뭐, 별일 없지.”

    “그 녀석도 커스터드에 들어오는 거 맞아?”

    “…왜?”

    “뭐…….”

    대충 얼버무리려는 크바스를 보며 갈레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눌레와 크바스의 접점은 얼마 전, 갈레트의 열한 번째 생일 파티 한 번이 전부였다.

    “나 졸업하기 전에 검술 대회에서 제대로 붙어볼 수 있을까 싶어서.”

    크바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가 붉어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저보다 한참 어린 애를 상대로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가 민망한 모양이었다.

    “크바스, 여기서 뭐 해!”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며 젤라토가 나타났다. 그는 크바스와 갈레트의 전담 중재인 격인 인물이었다.

    갈레트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크바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형! 크바스 형이 쉬제트가 사람이라면 아홉 살짜리라도 가만히 못 두겠나 봐! 카눌레가 입학하면 제대로 붙어보겠다고 난리야!”

    “뭐!? 야, 너…….”

    크바스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젤라토의 호통이 더 빨랐다.

    “크바스! 진짜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크바스가 당황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갈레트는 아무 일 없던 척 책을 마저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찔릴 것도 없었다.

    ‘거짓말은 안 했으니까.’

    뉘앙스의 차이는 있겠지만.

    “너 다음 검술 수업 때 두고 보자.”

    젤라토에게 붙잡힌 크바스가 갈레트를 향해 이를 갈았다. 하지만 젤라토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그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그러게, 평소 행실이 좋았어야지.’

    갈레트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 * *

    ‘카눌레가 그렇게 검술에 능한가?’

    갈레트는 피낭시에 제2기사단의 연무장 한편에서 카눌레가 훈련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검술에 재능이 없는 갈레트는 카눌레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냥 지루한 반복 작업으로 보였다.

    ‘물론 크바스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카눌레를 의식하는 거겠지만.’

    형이라는 호칭도 붙이지 않고, 갈레트는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바스는 검술 수업만 되면 제 상대로 그를 지목하고 있었다. 당연히 갈레트도 그의 검이 얼마나 무겁고 위력적인지 몸으로 겪어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과 젤라토의 눈치를 보는 건지 절대 아프게 때리진 않고, 넘어뜨리거나 땅바닥을 구르게 하거나 하여튼 온갖 망신을 주면서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갈레트는 그 얄미운 면상을 떠올리면…….

    “오빠? 무슨 생각하는 고야?”

    “응? 아, 아냐. 아무것도.”

    저도 모르게 표정이 험악해진 모양이었다. 갈레트가 싱긋 웃으며 크레페에게 들고 있던 접시를 내밀었다.

    크레페가 마지막 남은 에그타르트를 냉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작은 타르트에 더 작게 난 잇자국. 오물거리는 볼따구니가 아기 토끼처럼 사랑스러웠다. 갈레트가 곧바로 홍조를 띠고 크레페 옆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오동통한 뺨을 콕 찔렀다.

    말랑.

    “우움…….”

    크레페가 불편하다는 듯 갈레트를 곁눈질했지만 그는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우리 동생, 누구 닮아서 이렇게 귀여워?”

    갈레트가 연신 뺨을 조몰락거리자, 크레페가 인상을 찌푸리며 남은 에그타르트를 한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손을 털더니 훈련 중인 카눌레를 가리켰다.

    “꾸후움!”

    “카눌레를 닮아서 귀여운 거라고?”

    갈레트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크레페가 맞다는 뜻으로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귀엽다고? 저놈이?’

    갈레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애초부터 카눌레가 훈련하는 걸 구경하러 온 게 아니라 크레페를 따라온 것뿐이었다. 고용인 행세를 자처해 접시까지 들어주면서 말이다.

    ‘옛날에 마법서를 거꾸로 들고 날 따라다녔을 때도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그가 새삼 너무한 생각을 하며 진지하게 고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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