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3)화 (143/181)
  • 143화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네가 날 신경 써주고 있었던 건 나도 알아. 처음부터 네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도 몰랐을 이야기인데.”

    “그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갈레트가 널 설득해 보겠다고 나섰을 때쯤엔 어렴풋이 알았지만 말이야.”

    아프기라도 한가, 하는 의심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펠이 말을 이었다. 그가 이렇게 긴 말을 늘어놓기는 처음이었다. 잠에 취한 것 같기도 했고, 열에 들뜬 것 같기도 했다.

    느릿하게 말을 늘어놓던 그가 정신을 추스르려는 듯 짧게 고개를 털었다.

    “으음, 그래서 난 말렸어. 어차피 칼자루는 너한테 있었고, 소문을 완전히 막을 수도 없었거든. 난 그런 소문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했고. 그래, 사실 반쯤 포기한 상태였지.”

    아펠이 땀을 닦으려는 듯 손을 들었다. 하지만 손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손가락을 그러모아 쥐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난 몰랐던 거야. 네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아펠?”

    “그래서, 맞아, 그래서…….”

    그는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말을 반복하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꽃다발이 그의 팔에 밀려 테이블 모서리에 걸쳤다.

    “괘, 괜찮아?”

    심상찮은 상황에 놀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펠의 옆에서 허리를 숙였다. 가까이에서 확인하니 상태는 훨씬 심각해 보였다.

    그의 심장은 내게 들릴 만큼 크고 빠르게 뛰고 있었으며, 머리칼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손끝과 입술에는 서서히 보랏빛이 돌고 있었다.

    설마…….

    ‘마지막으로 널 보고 싶어서 적은 가능성에라도 걸어본 거지. 실제로 만난 건 내 운이 좋아서였다고 생각해.’

    마지막.

    그의 말을 떠올리자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너, 처음부터 죽으러 온 거야!?”

    이건 분명 음독 증상이었다. 내가 다그치자 아펠이 힘겹게 눈을 뜨고 미소 지었다.

    “쉬잇. 화내지 마.”

    그 반응에 내 예상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는 입술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 이를 앙다물었고, 아펠은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하.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

    “기, 기다려. 내가 어서 사람을…….”

    “아냐, 가지 마.”

    아펠이 내 팔을 잡아 막았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미안해. 그리고… 크윽!”

    갑자기 아펠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가 고통에 못 이겨 얼굴을 찌푸리고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어금니가 부딪히는 으득 소리와 함께 보랏빛 입술 사이로 선혈이 흘렀다.

    “아펠!”

    아펠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그의 손끝이 꽃다발을 밀쳐, 헐겁게 묶은 매듭이 풀리며 검은 백합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고통스러운 듯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꼬리를 휘었다. 검은 백합 사이에서 그의 머리칼과 눈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 못 지킨 것도 미안해.”

    입술이 달싹이더니,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파란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렸다. 그의 손은 내 뺨에 닿지 못하고 검은 백합 위로 떨어졌다. 그때 검은 백합의 꽃말이 문득 뇌리에 스쳤다.

    노스탤지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아냐. 그럴 순 없어.”

    고개를 젓자 귓불에 매단 귀걸이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지금은 공황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갈레트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피오르에게 치유 마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마법에는 관심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

    “두 번 다시는.”

    다짐하듯 중얼거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두 손을 아펠의 가슴께에 올렸다. 거세게 뛰던 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어.

    눈을 내리깔고 수식을 계산했다. 황금색 마법진이 떠오르며 아펠의 머리칼을 태양빛으로 물들였다.

    “이게 무슨 소란…….”

    뒤늦게 소란을 눈치챈 기사와 고용인 몇 명이 우리를 발견했다. 그들 중에는 총책임자인 에이미도 있었다.

    “아가씨?”

    “오지 마세요!”

    잠깐 계산을 멈췄을 뿐인데 마법진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추가 진을 펼쳤다. 마법진의 둥근 테두리가 분열하듯 삼각, 육각, 십이각형으로 변했다.

    그러나 빛은 점점 흐려졌다.

    “큭.”

    마나의 흐름이 내 계산 속도를 못 따라가는 거야.

    아픈 것도 아닌데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원인을 알고 있으니 답을 구하기는 쉬웠다.

    바로, 리미터를 푸는 것.

    -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나를 쓰면 어떻게 될지… 크레페 님도 알고 있죠?

    - 조금만 잘못하면 마력 고갈로 탈진이 올 거야.

    미안해요, 키슈 님, 선생님.

    하지만 옆에 있어주겠다고 약속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는걸.

    내심 듣는 이 없는 말을 읊조리며 웃었다.

    곧 마법진이 화려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에이미가 벙벙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력을 있는 대로 쏟아부었더니 마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마법진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두근.

    내 심장이 짧게 뛰었다. 어떤 징조인지 파악할 새도 없이 정신이 까무룩 멀어졌다. 그리고 아펠의 몸을 덮듯이 쓰러지려던 그 순간, 문득 내 몸이 멈춘 것을 느꼈다.

    ‘…어라?’

    이상한 광경이었다. 멈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아른거리던 빛도, 에이미의 놀란 표정도, 뛰는 듯 마는 듯 하던 아펠의 심장도 정지해 있었다.

    마치 영화의 스틸컷처럼.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주변이 하얗게 바뀌었다.

    “허억!”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내가 크게 숨을 들이켜며 허리를 세웠다. 내 품에는 아펠도 없었고, 주변엔 빛도 어둠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흰색뿐이었다.

    얼떨하게 몸을 일으켜 섰다. 이것이 주마등도, 사후 세계도 아니라는 것은 금방 깨달았다.

    나는 이곳을 알고 있었으니까.

    “…디몬?”

    “소원을 다 쓰기도 전에 그러면 어떡해.”

    낯선 목소리만 들릴 뿐 누군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두리번거리자 그가 다시 말했다.

    “여기야.”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내리니 마치 물그림자처럼 나와 발바닥을 맞대고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꺄악!”

    공포 영화의 귀신 같은 등장이었다. 내가 소스라치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둥실 떠올라 내 옆에 섰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발을 굴렀다. 그러나 물속에서처럼 자유로이 유영한 그와 달리 내게는 딱딱한 바닥만 느껴졌다.

    “후후, 오랜만이야.”

    상황을 봐도 그렇고, 하는 말을 들어도 그는 분명 디몬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바로 알은체하지 못했다.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 나오는 크레페의 모습을, 다음에는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제일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 된다고 했던가?

    하지만 지금의 그는 내가 아는 누구의 모습도 아니었다.

    “디몬 님… 맞아요?”

    “응?”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제 몸을 살폈다.

    바다처럼 파란 머리와 우주를 담은 듯한 깊은 남색의 눈동자, 나무 속껍질 같은 피부나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운 생김새.

    하나부터 열까지 낯설었다.

    “아아, 내 모습이 보이는구나. 이거 좀 부끄럽네. 본모습을 보이는 게 워낙 오랜만이라.”

    “본모습?”

    “그래. 죽은 사람에게는 내 본모습이 보이거든.”

    죽어?

    그 말을 듣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 아펠은요? 살았나요?”

    “자기 자신보다 아펠을 더 걱정하는 거야?”

    디몬이 피식 웃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것도 없이 새하얗던 공간에 순식간에 책장이 늘어섰다.

    마법사들이 말하는 인생 서고.

    익히 본 그곳이었다.

    “어디 볼까.”

    주변을 스윽 훑어보더니 그가 손을 들었다. 와이어라도 달린 듯 책 한 권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디몬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하곤 담담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그를 살리고자 했던 누군가의 마력은 통증을 덜어주었을 뿐 생명을 이어주지는 못했다. 고통과 괴로움, 수없는 갈등의 끝에서 아펠 슈트루델은 이내 평화롭게 잠들었다. 항상 함께하겠다던 어린 날의 약속만이 신기루처럼 남아 검은 백합 사이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디몬이 피식 웃으며 책을 덮었다.

    “안타깝네.”

    “…….”

    놀리는 것 같은 어투에 화낼 기력도 없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도 나는 오로지 아펠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결과를 듣고 나자 절망도 슬픔도 아닌 허탈감이 태풍처럼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게…….”

    “응?”

    “이게, 당신이 바라던 결말이에요?”

    ‘원래 인생이라는 건 신이 재미로 쓴 소설이란다.’

    디몬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손에서 놀아났다고 생각하니 뒤늦게 분노가 들끓었다.

    그러나 디몬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크레페. 왜 소원을 말하지 않고 있었지?”

    “왜냐니……!”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내 도움을 받으면, 그게 운명에 굴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 남은 소원에 대해 깊이 파고들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디몬에게 직접 걸어놓은 제약이 있었으니까.

    운명으로 장난치지 말 것.

    그건 내가 제일 처음 말한 소원이었다. 물론 디몬의 직접적인 개입을 막기 위해서.

    “…어차피 과거는 못 바꾸잖아요.”

    사춘기 아이처럼 퉁명스레 말했다. 일찍이 나는 그에게 엄마를 살려달라는 소원을 빈 적도 있었다.

    물론, 그는 나의 ‘첫 번째 소원’을 들먹이며 거절했고.

    “들어주지도 않았을 거면서.”

    나는 그때를 떠올리며 주먹을 꼭 쥐었다.

    디몬이 다시 물었다.

    “내게 뭐라도 해달라고 매달렸다면 다른 결말을 맞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니?”

    “지금 저한테 책임을 돌리는 거예요?”

    “하하. 아니, 그냥 괴롭히고 싶었어. 네가 그러지 못할 성격인 건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하.”

    새삼 느끼건대 디몬의 성격에는 악취미적인 구석이 있었다.

    기가 막혀 코웃음을 친 내가 그에게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그래서, 행복해요? 이런 이야기를 보고 싶었죠? 제가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나요? 재밌었어요?”

    “크레페.”

    언짢은 내색을 보이자 디몬이 짐짓 인자하게 손짓했다.

    “바라는 걸 말해 보렴.”

    “바라는 거?”

    그의 말을 되풀이하는 내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행복했을 때로 돌아가는 거 말고 뭐가 있겠어요?”

    나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펠과 갈레트만큼은 내 편이 되어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적이 되었고, 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유명을 달리했으며, 이제 내가 바로잡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내 소원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신 예전처럼 행복한 때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 그저 절망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디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에는 반발심이 들어서.

    그러나 이어진 디몬의 대답을 듣고,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 소원 들어줄게.”

    “네?”

    “널 이 세계에 데려온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야.”

    태연한 대답과 함께 그가 양팔을 펼쳤다. 무한히 펼쳐진 책장에서 책들이 모조리 빠져나오더니 곧 그 책들의 페이지가 팔락거리며 넘어갔다.

    수십, 수백만의 책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소리.

    거기서 만들어진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휘날리다 못해 눈까지 따갑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감지 못했다. 그저 종이에 빽빽이 적힌 문장이 거꾸로 사라져가는 것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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