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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2)화 (142/181)

142화 

* * *

하긴 갈레트가 목숨을 잃은 이후로 아펠 쪽에선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 도리어 내가 그 무반응에 불안해질 정도로 말이다.

그래,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현실에 순응하는 게 낫겠지.

그렇게 결심한 나는 저녁을 먹자마자 방으로 돌아와 내 소지품을 살펴보았다.

간만에 돌아가는 것이니 뭔가 챙겨 갈 만한 게 있을지도, 하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사실 마땅히 준비할 건 없었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면 진작 저택에 다녀왔을 테니까.

“이게 단가?”

에클레어가 보내준 옷가지와 변방을 벗어날 때 카눌레가 핀잔하며 쥐여준 호신용 단검.

작은 가방 하나에 몰아넣어도 공간이 넉넉했다.

손을 털고 내 미니멀리즘적인 생활에 새삼 감탄하던 때였다.

똑똑.

“크레페.”

짧은 노크와 함께 피오르가 찾아왔다.

“무슨 일이에요?”

“이거, 혹시 모르니까 네가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피오르가 아펠의 팔찌를 내밀었다.

되짚어 보면 사실 내 것이었지만 그 전에는 피오르의 것이었다. 피오르는 내 체질과 팔찌, 아펠의 마나에 대해 변방에서부터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거 전해주러 오신 거예요?”

“그거랑…….”

피오르가 잠깐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 것 같아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택에 갈 거라면 갈레트가 쓰던 물건들도 챙기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아, 아… 네. 그렇네요.”

어쩐지 줄곧 연구하던 것을 갑자기 돌려준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아무래도 팔찌 얘기는 핑계고 갈레트 이야기를 꺼내러 온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원래도 갈레트는 피오르의 공방에서 자주 묵어가곤 했다. 그를 공공연히 ‘스승님’이라고 부를 만큼 친분이 있기도 했고.

하지만 내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와 갈레트 얘기를 나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오빠가 쓰던 물건들이 아직 남아 있겠구나.

나는 어리벙벙하던 정신을 추스르고 피오르의 안내를 받아 걸었다.

갈레트의 방은, 내가 들어올 일 없는 공방 한쪽에 마련된 소박한 공간이었다.

공방에서 오빠는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나는 오직 내 앞에서 보인 갈레트의 모습만 알고 있었다.

만일 그에 대해 조금 더 잘 알았다면, 지금보단 나은 상황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

조금은 씁쓸하고 한편으론 긴장되는 기분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

나는 방 안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돌처럼 굳었다.

피오르는 내 반응을 의아해하지도, 날 재촉하지도 않았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는 다른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문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 바로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에 정신이 팔려서.

군복을 입은 가족들과 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드레스를 입은 내 모습.

다섯 살 때, 우리 가족이 난생처음으로 남긴 초상화.

“…크레페?”

훌쩍.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콧방울을 문질렀다. 뒤에 선 피오르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크흠, 나가서 기다리마.”

“아니에요. 이것만 가져갈게요.”

나는 까치발을 들고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을 내렸다.

“선생님.”

피오르를 돌아보자 그가 말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나는 그림을 세게 안고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일 가기로 한 저택, 오늘 밤에 가도 되나요?”

“…기다려라. 선물을 좀 챙겨 주지.”

피오르는 내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 * *

나는 갈레트의 방에 있던 그림과 검은 백합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공간 이동용 포트에 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쉬제트가의 저택이 눈앞에 나타났다.

“끄응.”

“어지럽나?”

“아뇨, 괜찮아요.”

피오르가 비틀거리는 내 어깨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여러 마나가 섞인 게 아니었기에 심한 어지럼증은 없었다.

대답을 들은 피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내일 저녁에 데리러 오마. 그때까진 편히 쉬도록 해.”

그도 내가 오랜만에 저택에 돌아왔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피오르는 여유를 즐기라는 배려 섞인 말과 함께 돌아갔다.

“오랜만이긴 하구나…….”

적막이 어색해서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나는 마구간과 정원 사이에 있는 앞마당에 있었다. 마차를 세울 수 있게 해놓은 넓은 공터였는데, 내 발치에는 잔디가 돋아나고 있었다.

겨우 일 년여가 지났을 뿐인데 상황이 너무 많이 변했다.

무슨 얘기를 먼저 시작해야 할까.

에이미와 마르크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문득 씁쓸해졌다. 물론 지금은 야심한 시각인 데다 기사나 고용인들의 숙소는 따로 있으니, 오늘 그들을 만나기는 힘들 테지만.

나는 적막한 저택으로 들어가 말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어쩐지 삭막하게 느껴지는 공기였다.

“하긴 당연할지도 모르지.”

이제 이곳엔 갈레트와 카눌레도, 엄마와 아빠도, 키슈와 파타슈, 브라우니도 없으니 말이야.

우리를 학교 기숙사에 보내기 싫어했던 에이미의 마음을 이제 알겠다.

옛날얘기를 떠올린 나는 피식 웃고 갈레트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들어와 본 것이었지만 예전과 달라진 건 침대 크기밖에 없었다.

나는 원래대로, 넓은 벽에 우리 가족 초상화를 다시 걸어놓았다.

천장에 둥둥 떠 있던 브라우니와, 녀석을 잡겠다며 침대에서 점프하던 갈레트가 생각났다.

나는 그때 앉았던 의자 등받이를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차가운 감촉에 손이 금방 움츠러들었다.

그 앞의 티 테이블에 내 가방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내가 찾는 건 보이지 않았다.

검은 백합을 꽂아놓을 화병 말이다.

“으음…….”

에이미를 깨우고 싶진 않았기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꽃다발을 들고 파티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진열된 장식품 중에 화병이 있었던 것 같아서.

가제보가 있는 정원과 객실용 저택 사이에 난 꽃길을 지나면 홀이었다. 밤바람은 선선했지만 싸늘하진 않았고, 거기 섞여 은은하게 풍겨 오는 꽃 내음은 내가 처한 상황을 잊게 해줄 만큼 향기로웠다.

응, 아름다운 날이야.

괜스레 혼자 고개를 끄덕인 내가 정원을 지날 무렵이었다. 한차례 바람이 불어 자등색의 등나무꽃이 휘날리며 잠깐 시야를 가렸다.

그때였다.

“크레페.”

눈앞을 가린 꽃잎이 사라지기도 전에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깨달았다.

크림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어조. 달빛을 받은 밤이슬처럼 반짝이는 머리칼과 겨울 한낮의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

밤에 만나는 것이 누구보다 익숙한…….

“…아펠?”

나는 환상이라도 보는 사람처럼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황제의 장례식장에서 뢰드그뢰드 후작을 따라간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래?”

아펠이 조심스레 눈꼬리를 휘며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 * *

나는 후원에 있는 가제보로 그를 안내했다. 하지만 그는 딱히 안내가 필요했던 것 같지 않았다.

“역시 꿈에서 본 그대로네. 밤이라는 것만 빼면.”

아펠이 느긋하게 말하며 따라왔다. 나는 그가 예지몽에서 쉬제트가의 후원을 봤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에야 아무래도 좋은 얘기지만.

“내가 올 줄 알고 기다린 거야?”

꽃다발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제일 마음에 걸렸던 질문을 꺼냈다. 우리 정보를 빼돌린 갈레트의 선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펠의 태도가 아군을 잃고 수세에 몰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깐 내가 내려놓은 꽃에 시선을 멈췄다. 하지만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진 않았다.

“신탁의 서에서 봤지. 네 스물한 번째 생일 바로 전날에 우리가 여기서 만날 거라고.”

“아직도 그 예언서를 믿어?”

기가 막힌다는 심정을 대놓고 내색했다. 하지만 아펠은 딱히 저어하는 기색 없이 빙긋 웃었다.

“아니. 그래서 온 건 아니야. 마지막으로 널 보고 싶어서 적은 가능성에라도 걸어본 거지. 실제로 만난 건 내 운이 좋아서였다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그 단어에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곧 귀족의 선언문이 발표될 거라는 소식이라도 들은 게 분명했다.

순순한 답이 돌아오자 멋쩍어진 건 나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운 반응이 나와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필요 이상일 게 어디 있겠나. 정신 차려야지.

스스로 한 생각에 태클하고 도리질을 쳤다.

그는 분명 적이었다. 이 사태를 만든 주범.

“자, 앉아.”

아펠이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의자에는 그의 손수건이 깔려 있었다. 밤이슬에 젖은 흔적조차 없는 것을 보니 마법으로 수를 쓴 게 분명했다.

“…….”

나는 잠깐 침묵했다. 그는 여전히 자상하고 부드러웠다.

내게만은.

‘괜찮아, 크레페. 다 괜찮을 거야. 나 여기 있잖아. 너도 내 옆에 있어줘.’

어릴 적의 약속이 새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애초부터 아펠과 적대하게 된 것은 그가 싫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두와 행복해지고 싶은 나와 달리, 그는 오직 나와 행복해지기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나와 함께하는 미래를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마음. 그게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그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펠과 입을 맞췄던 단 한 번의 밤이 맥락 없이 떠올랐다. 외출해 있던 나를 다급히 찾은 아펠, 불안해하는 그를 보며 내가 느꼈던 애틋한 감정, 그보다 선명하게 남은 사랑스러움까지.

물론 지금도 그 마음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펠이 폭군이 되지 않게 하려고. 아펠은 그 자신이 나를 죽이지 않게 하려고.

선택한 방법과 각자의 가치관이 다를 뿐 우리는 그 빌어먹을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동지이기도 했다. 자꾸만 경계심이 허물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나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진심으로 싫어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은 아직 안 바뀌었어?’

나는 내내 그렇게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의 마음이 바뀌어 봤자 내일모레 귀족들의 선언문이 발표될 거라는 사실을 돌이킬 수는 없었으니까.

“역시 나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고 했던가?”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눈썹을 찡그러뜨렸다.

‘아펠에게 전해줘. 나는, 역시 너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고.’

나는 내가 갈레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몽블랑을 갈레트의 마차에서 빼내 오면서 선언한,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아펠에게는 그게 배신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가만히 아펠의 낯빛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눈썹을 찌푸렸던 것이 내 착각이었던 것처럼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나도 작년엔 정말 재밌었거든. 네 생일날에 말야. 기억해?”

연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는 그는 어쩐지 슬퍼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생긋 웃었다. 그러나 태연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그의 이마에는 서늘한 온도와 어울리지 않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디 아파?”

어딘가 심각해 보이는 증상에 내가 미간을 좁혔다.

“으음… 아니, 좋아.”

안색은 별로 안 좋아 보였지만, 그는 그렇게 대답하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한번 알아채고 나니 상태가 더욱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마치 감기라도 걸린 듯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빛은 탁했다.

“사실 네가 외세를 끌어들이기로 결정한 순간 이런 결과는 정해져 있었겠지. 명분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널 지킬 수 있겠어. 아니, 그런 말도 이상하다. 지켜진 건 나였지. 넌 진작 소문을 퍼뜨릴 수 있었으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일 아펠이 황제를 시해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그는 폐위뿐 아니라 사형까지 당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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