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41)화 (141/181)
  • 141화 

    “먼저 맞아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펜리르를 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괜찮아요. 제가 언제 깨어날지도 몰랐을 텐데요, 뭘.”

    실제로 5일이나 지나서 눈을 떴다니, 내내 침상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테다.

    아펠이 키우는 강아지가 이곳을 활보하는 것을 들키면 어떤 구설에 오를지도 모르고.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몽블랑은 얼떨하게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가볍게 넘기려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척 다른 질문을 꺼냈다.

    “제 상처는 후작님이랑 키슈 님이 치료해 주신 건가요?”

    “…응급 처치는 다 되어 있었습니다.”

    “갈레트 오빠는요?”

    “저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몽블랑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럴 줄 알았어요. 역시 오빤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자 머랭의 머리털이 내 입바람에 살랑거렸다.

    “크흠. 아무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아시겠지만 원래 저한테는 다른 마법이 안 통하거든요. 후작님도 기억하시죠?”

    “그거라면 짚이는 것이 있습니다.”

    몽블랑이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내가 그것을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아펠이 왔었나요?”

    “아뇨, 갈레트 님이 가지고 있던 겁니다.”

    몽블랑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을 집어 들었다.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이 음각된, 은색의 팔찌.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원래 내 것이었으니까.

    착용자의 마나 패턴을 기억하는 금속이라고 했던가.

    “…이것 때문이었군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불완전한 문장이었지만 몽블랑은 금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페 님과 아펠 전하의 마나 패턴이 동시에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갈레트 님이 크레페 님께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것도, 펜리르를 거대화시킨 것도 이 팔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오르가 오면 더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을 텐데…….”

    “됐어요. 이제 와서 무슨.”

    씁쓸히 웃었다.

    갈레트에게서 희미하게 아펠의 마력이 느껴졌던 것도, 더 과거에 아펠이 내게 치유 마법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이제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셈이었다.

    “자.”

    잠시 딴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피오르가 수프를 가지고 들어왔다. 머랭이 코를 씰룩거리더니 곧 고개를 들었다.

    “풋, 네 거 아냐.”

    머랭의 콧잔등을 톡 치고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피오르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바로 숟가락을 들었다.

    “후우.”

    김이 올라오는 수프를 후후 불어 식히고 입에 넣었다. 조금 싱겁긴 했지만 뜨뜻한 것이 속을 달래기엔 제격이었다.

    얼마 안 있어 브라우니와 함께 돌아온 키슈가 내게 눈인사를 하고 피오르를 돌아보았다.

    “뭐야, 왜 다들 내 방에 있어?”

    “부탁받은 거 완성했거든.”

    “벌써?”

    “어차피 오래 걸릴 만한 일도 아니었어.”

    피오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키슈는 여전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역시 그의 능력이 특출한 게 맞는 모양이었다.

    “뭐가요?”

    그들의 대화를 듣던 파타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피오르가 주머니에서 호박색 귀걸이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나는 입 안에 남은 수프를 삼키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거, 제가 쓸 수 있게 마법진을 조금 고쳐달라고 했어요.”

    * * *

    몬스터들의 사체를 치운 뒤 불에 태우고, 무너진 건물도 도로 세우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들꽃도 조금씩 흔해질 만큼 날이 따스해졌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으윽.”

    “수식을 계산하려고 하지 마. 마나의 흐름을 느끼는 게 더 쉬울 테니까.”

    “말이 쉽지, 이대로는 단계가 너무 많다니까요? 딱 하나만 건너뛰면 계산이 훨씬 편할 것 같은데…….”

    “그건 안 된댔지.”

    투정 같은 말에 피오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만 잘못하면 마력 고갈로 탈진이 올 거야. 힘들더라도 셈하는 데 익숙해져라.”

    “체엣.”

    본인도 머리 아프다고 못 하는 걸 내게 쉬운 것인 양 말하는 게 조금 얄미웠다.

    그래도 배우는 입장에서 밉살스러운 소릴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입술만 비죽 내밀고 말았다.

    피오르가 피식 웃고는 손마디로 내 머리를 통 쳤다.

    “그렇게까지 고생하면서 마법을 배워야겠냐? 그냥 나처럼 마구(魔具)를 만드는 쪽을 생각해 보라니까는.”

    “그래도요.”

    큼지막한 귀걸이가 흔들리며 내 팔뚝을 툭툭 쳤다.

    분명 근거가 있는 말이었지만 나는 고집으로 얼버무렸다. 피오르도 내가 그 말에 새삼 동의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고집은… 뭐, 아무튼 내일모레부터는 바빠질 테니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연습하다가 도움이 필요해지면 불러라.”

    “네에.”

    겨우 정신을 다잡은 내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벤치에 앉았다.

    피오르는 날 내려다보다 얕은 한숨을 내쉬며 먼저 저택으로 들어갔다. 론헤임 남작저, 마법 공방을 겸한 그의 자택이었다.

    내가 이곳에 머무른 지도 거의 한 달째였다. 물론 마법을, 정확히는 이 귀걸이를 쓰는 데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변방에서는 마나를 운용할 수가 없으니까.

    피오르의 성씨인 론헤임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가문명이었다.

    혼자 마법 공방을 운영할 만한 실력자가 있는데 가문의 유명세가 그 정도라니, 처음엔 그것이 의문스러웠지만 위치를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슈트루델 제국의 남쪽을 가로막은 거대한 산맥, 그 끝자락이 론헤임가의 영지였던 것이다.

    듣기로는 거주민도 몇 없어서 세금을 걷기가 힘들 지경이라고 했던가.

    영지 운영비도 대부분 고산지대에서 나는 검은 백합을 팔거나 공방 의뢰를 받아 얻은 이익으로 충당한다고 했다.

    “에휴.”

    아무렴 어때.

    딴생각을 하며 잠시 숨을 돌린 내가 도로 몸을 일으켰다. 피오르의 말대로 내일모레부터는 바빠질 테니까.

    나는 품에 넣어뒀던 편지를 꺼내 읽었다. 변방에 있을 때 푸딩을 통해 받은 바니유 공작의 친서였다.

    [플뢰데 후작과 접선 완료. 한 달 후 선언문 발표 예정.]

    그건 일찍이 젤라토의 장례식 날에 공작과 이야기했던 내용이었다.

    바움쿠헨의 황제와 뢰드그뢰드 후작이 가진 야심은 바니유 공작도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는 슈트루델 제국의 힘이 약해지길 바랐고, 뢰드그뢰드는 그런 황제의 눈에 들기를 바랐다.

    그런 사람에게 아펠의 정보를 흘리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세간에 공표하고 슈트루델에 내전이 일어나도록 조장할 것이다.

    아펠이 제국의 황제를 죽였다는 증거를 조작해서라도.

    “황제에겐 신임받고, 라이벌은 없어지고. 아주 살판나겠네.”

    내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뢰드그뢰드에게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라면 감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편지에 적힌 ‘한 달 후’는 바로 모레였다.

    이변이 없다면 그날 아펠은 정통성을 잃을 것이다.

    아펠 개인의 능력이나 무력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바니유 공작가 편에 서기로 한 귀족들은 차례로 성명문을 발표할 테고, 아펠은 우리를 처벌할 명분을 잃은 채 반역자이자 패륜아로 남겠지.

    - 우리 운명에는 행복이 보장돼 있잖아. 그대로만 가면 행복해질 수 있는데, 발을 내딛는 게 무서워?

    “아얏.”

    편지를 도로 접다가 종이에 손가락을 벴다.

    공연히 마음이 복잡해서 실수한 모양이었다.

    피가 나고 있었기에 나는 곧바로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아까와 달리 어지럼증이나 두통 따위의 증상은 없었다.

    말했듯이 마나 흡수 단계만 건너뛰면 어렵지 않았으니까.

    애초부터 피오르에게 부탁했던 것도 이 귀걸이의 마법진을 치유 마법 특화로 수정해 달라던 것이었고.

    역시 오빠랑 내가 선생님으로 모신 분이다. 실력 하나는 믿음직하지.

    미소를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눈에 익은 하녀가 다가와 내게 말을 붙였다.

    “밀 크레프 님, 쉬제트 저택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 *

    - 아가씨!

    통신구 너머에서 들려오는 에이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오랜만이에요, 에이미.”

    - 대체 언제 오시려고 그래요?!

    언성이 높아진 이유는 반가움 때문이 아니었나 보다.

    나는 통신구 옆에 선 피오르의 눈치를 살피며 어설프게 웃었다.

    “하, 하하…….”

    내 웃음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에이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또 미루겠다는 말씀은 마세요. 저는 보좌관이지 영주가 아니라고요!

    그러고 보면 내가 저택을 나오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아빠와 갈레트의 장례도 변방에서 치렀고, 카눌레는 여전히 북쪽의 요새에, 나는 이곳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었다.

    책임자가 전무한 저택에서 에이미 혼자 급한 일을 모두 처리하는 중일 테니 힘에 부칠 만도 했다.

    물론 나는 함부로 저택을 왕복하며 아펠과 마주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진 않지만.

    “미안해요, 에이미.”

    에이미의 요청을 에둘러 거절하자 잠시 어색한 적막이 찾아왔다.

    - …하루도 안 되겠어요? 수배령이 내려진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어쩐지 죄책감을 자극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펠은 공간 이동이나 투명화 마법 같은 걸 자유자재로 사용했으니,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날 다시 납치하는 일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역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 게다가 내일은…….

    에이미가 말을 흐려서 귀를 쫑긋 세웠다.

    듣기 거북한 얘기라도 하려나 했는데, 그녀가 머뭇거리다 꺼낸 말은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 아가씨 생일이시기도 하고.

    “…아.”

    잊고 있었다. 모레 있을 대업에 정신이 팔려서.

    - 파티를 열자고 하진 않을 테니 케이크라도 자시고 가세요.

    “아, 아니, 난…….”

    “다녀와라. 내가 데려다주지.”

    내 통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피오르가 끼어들었다.

    “네?”

    “어차피 그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인 것도 아니잖아. 모레부터는 시간이 더 빠듯해질 테니까. 마법으로 다녀오면 금방이기도 하고.”

    - 감사합니다!

    에이미가 부쩍 밝아진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렇게 선수를 치고 나오니 내가 더 거절하기 민망해진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으응… 그럼 내일 아침에…….”

    결국 내가 얼떨하게 항복 선언을 했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정해진 일정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