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내가 넋 나간 사람처럼 되묻기만 하자 그녀가 아차 싶은 듯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크레페 님은 5일 만에 깨어나신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무리해 움직이지 마시고…….”
“그,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어…….”
다급히 키슈의 팔을 붙잡자 그녀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 반응만으로도 안 좋은 소식을 예상할 수 있었기에 나는 금방 손에 힘을 풀었다.
“크레페?”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피오르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백합 생화로 만들어진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일어났구나.”
“…같이 가요.”
내가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잠깐 당황한 듯하던 피오르가 키슈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 * *
피오르가 앞장서서 탑 꼭대기로 향했다. 나는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지만 수련회 때 안내를 받은 적은 있었다.
변방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
그 층에는 문이 하나뿐이었다. 피오르가 문을 열자 방이라기보다는 홀에 가까운 공간이 나왔다.
벽 하나를 가린 널찍한 위령패와 그 앞의 제단.
나는 들어가자마자 그 위령패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낯선 이름으로 가득한 암석 끄트머리에서, 나는 익숙한 이름을 찾았다.
프랄린 세자르 쉬제트.
“아빠의…….”
목이 턱 막혀서 침을 한 번 삼켰다.
“아빠의 이름이 있네요.”
그의 이름을 더듬는 손가락이 떨렸다. 주먹을 쥐고 문 쪽을 향해 돌아섰다.
“발인은 끝났나요?”
담담히 묻자 문가에 서 있던 키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확히는 장례가 끝났다고 해야겠지만요. 변방에선 화장이 기본이라고 하더라고요.”
“내가 장례 미사를 올릴 성직자 자격으로 온 거지.”
피오르가 건조하게 말하며 들고 온 꽃다발을 제단에 내려놓았다.
“방금 도착한 거다.”
“어제도, 그제도 왔었어요. 뒤늦게 소식을 들은 분들이나 멀리 계시는 분들도 모두 백작님의 명복을 빌고 계세요.”
키슈의 보충 설명을 들으며 제단에 늘어선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대부분은 검은 백합 모양의 장신구였지만 고인이 생전에 사용한 유품처럼 보이는 것도 많았다.
어린아이의 머리끈, 깨끗하게 빨래한 앞치마, 이가 빠진 검과 창, 그리고…….
“…….”
나는 손을 뻗어 호박색의 귀걸이를 들었다.
이렇게 큼지막한 보석이, 그것도 마구가 또 있을 리 없었다.
“갈레트 오빠는요?”
“그날 크레페 님을 치료하시고…….”
키슈가 말을 흐리는 것을 듣고 나는 옆구리를 손으로 덮었다.
묻기 전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갈레트의 마법을 피하지 못하고 상처 입었다.
그가 놀랐던 것을 생각하면 사고였던 것 같지만 그걸 목격한 에클레어는 그리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내 눈앞에서 그녀가 던진 검에 맞은 갈레트의 모습이 악몽처럼 생생했다.
무엇보다 본인 대신 내게 치유 마법을 시전한 그의 마지막이.
“봉헌 기도를 올릴 거야. 보고 있을 테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키슈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얌전히 옆에 다가가 서자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브라우니가 내 팔에 정수리를 문댔다.
“평미사로 진행하겠습니다.”
피오르가 차분히 말하며 팔을 펼쳤다. 넓은 소매가 펄럭이며 위령패에 그림자가 졌다.
그것이 어떤 신호라도 된 것처럼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이곳이 변방이 아니라면 마법을 썼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경본, 염경, 응창.
평소에 들을 일 없던 낯선 단어들이 피오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시를 낭송하는 것 같기도 했고 주문을 읊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무미건조한 어조와 엄숙한 분위기는 내가 상념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엄마의 장례식이 있던 날, 나는 워낙 어렸고 시간도 정신없이 지나갔기에 당시의 기억이 그리 선명하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손에 든 갈레트의 귀걸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노을로 만든 위스키처럼 따스한 색깔의 보석과 그 안에서 아른거리는 마법진, 그리고 표면에 반사된 내 금발과 자안(紫眼).
바닥에 희게 부서진 햇빛, 피오르의 그림자, 거기에 은은히 풍기는 선향 냄새까지.
“삐이…….”
브라우니가 날 위로하듯 콧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입을 벙끗거리며 귀걸이를 꽉 쥐었다.
그리고 예식이 끝나자마자 피오르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그래.”
피오르가 소맷자락을 정리하고 안경을 고쳐 썼다.
나는 들고 있던 귀걸이를 내밀며 그에게 말했다.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 * *
“일어났냐?”
원래 아빠의 것이었던 집무실에 주인처럼 앉아 있던 카눌레가 내게 인사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오는 동안 키슈에게서 내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조심스레 묻자 카눌레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해. 네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다 내가 처리했단 말이야.”
카눌레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일전에도 나와 갈레트가 종적을 감춘 동안 저택의 서류 작업을 하며 한참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고생에 공감해 주는 대신 반문했다.
“그게 뭐 어때서?”
“어떻긴! 이쪽 재건 업무랑 관련 예산 책정, 경비 체계 재정비는 물론이고 바니유 공작가에서 온 연락에 답해주고 상부에 보고하고 연락을 돌리는 것까지 다 내가 해야 했다고! 게다가 오늘 밤엔 우리 저택이랑도 통신해야…….”
잔뜩 흥분해서 쏘아붙이던 카눌레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웃냐?”
“아빠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뭐?”
“훌륭하게 성장해 줘서 고맙다고 했던 거 말야.”
“…….”
아빠 얘기를 꺼내며 내가 웃을 줄은 몰랐던 듯, 카눌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나랑 갈레트 오빠 때문에 자신 없어 할 필요 없어.”
“웃기지…….”
“카눌레 님.”
노크 소리와 함께 기사 한 명이 들어왔다.
아빠의 곁에서 자주 본 얼굴이었다.
보좌관인지 피낭시에 제1기사단의 단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등장에 몇 걸음 물러났다.
“군사 쪽은 나보다 오빠가 더 잘 알 테니까 걱정 안 할게. 저녁에 얘기하자.”
그렇게 집무실을 나온 나는 치맛단을 가볍게 털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창 짐을 나르던 주민들 사이에 에클레어가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언니!”
“크레페!”
그녀가 내 목소리를 금방 알아듣고 이쪽으로 달려왔다.
“몸은…….”
“괜찮아.”
단답으로 대꾸하자 에클레어가 멈칫했다.
어쩌면 내가 저에게 화가 났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가 오해하기 전에 입을 열었다.
“언니는 다친 데 없지?”
“응.”
잠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미안해.”
에클레어가 먼저 사과했다.
오해였다고는 해도 내 눈앞에서 갈레트를 공격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게 맘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부터 잘잘못을 따질 일은 아니었다.
그럼 에클레어가 어떻게 했어야 했겠는가?
겨우 며칠 전과는 정반대가 된 상황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에클레어는 내가 담담히 받아들인 것이 의외라는 듯, 잠시 눈치를 보다가 안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이거, 아빠가 보낸 거야.”
“응?”
카눌레는 바니유 공작가와 통신구로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말했다.
공작이 내게만 따로 전할 것이 있었나, 하며 받아 들자 마침 하늘을 활공하고 있던 푸딩이 에클레어의 팔에 앉았다.
“얘가 전해준 거니까 정보 유출은 걱정하지 마.”
“으응.”
내가 얼떨하게 편지를 꽉 쥐었다.
보안이 중요하다면 다시 건물로 돌아가서 내용을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 주민들 틈새를 비집고 어린아이 두 명이 튀어나왔다.
“언니!”
“누나!”
라일리와 코우가.
내가 바움쿠헨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 마주친 그 아이들이었다.
“아는 애들이야?”
“응.”
에클레어의 질문에 가볍게 긍정하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조금 굽혔다.
“나한테 할 말이 있어?”
“아… 이거요.”
라일리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리더니 뭔가를 한 움큼 내밀었다.
“백작님의 손님이시잖아요. 전해주세요.”
“제 것도요.”
아이들이 쥐고 있던 것은 검은색 꽃이었다.
나는 잠깐 말을 잃고 그것을 쳐다보았다. 꽃을 쥔 손은 흙이 묻어 더러웠고 손톱 밑까지 흙 알갱이가 껴 있었다.
“백작님이 좋아하실 거래요.”
라일리가 웃는 얼굴로 어서 받으라는 듯 꽃을 흔들었다. 아빠의 전사 소식이 아이들에게까지 퍼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검은색 꽃.
물론 백합이 아닌 그냥 들꽃이었고, 자세히 보면 검은색조차 아니었다.
“…고마워. 꼭 전해드릴게.”
진보랏빛의 그것을 받아들고 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담에 봐요, 말랑 누나!”
코우가가 손을 흔들며 라일리와 함께 멀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아이들이 가져다준 들꽃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봄이구나.
* * *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제 몽블랑과 파타슈가 마지막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서 받은 들꽃을 탑 꼭대기 층 제단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벽에 기대 바니유 공작의 편지를 읽었다.
“…….”
“여기 있었구나.”
내가 편지를 다 읽은 것과 동시에 피오르가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날 찾아다니고 있던 모양이었다.
“부탁한 것 끝내 놨다.”
“벌써요?”
기대고 있던 등을 떼고 바로 섰다.
“그건 뭐냐?”
“그냥 잘 되어가고 있단 내용이에요.”
얼버무리고 편지를 접었다.
피오르는 더 묻지 않고 내게 손짓했다.
“뭐, 바로 확인시켜 줄까?”
“네!”
꼬르륵.
우렁찬 대답을 꺼내자마자 배에서 끓는 소리가 났다.
“…먹을 걸 좀 챙겨 갈 테니 먼저 키슈 방에 가 있어라.”
“네에…….”
피오르는 나보다 더 민망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 * *
“크레페 님, 몸은 좀…….”
방에 들어가자마자 파타슈가 의자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 뒤에 선 몽블랑도 말없이 인사했다.
“쉿. 멀쩡하니까 걱정 마세요.”
몇 번이나 반복되는 물음에 간단히 답하고 책상 위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머랭이 몸을 둥그렇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분명 평화롭고 귀엽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제 예전처럼 흐뭇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었다.
나는 녀석의 털을 헤집고 목덜미를 확인했다. 역시나 브라우니가 한 것과 똑같은 펜던트가 걸려 있었다.
“끼잉?”
“쉬이… 아무것도 아니야.”
잠에서 깬 녀석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내가 달래듯이 속삭이며 머랭의 눈을 가리자, 녀석이 금방 새근거리며 도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