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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39)화 (139/181)
  • 139화 

    “이 녀석은…….”

    파타슈가 내 품에 안긴 머랭을 알아본 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긴가민가하는 것 같아서 내가 짧게 답해주었다.

    “아펠의 신수예요. 브라우니의 마갑은 이 녀석한테 씌워주세요.”

    “예에.”

    그렇게 말하며 머랭을 파타슈에게 안겨 주었다.

    파타슈는 아직 얼떨떨해하는 기색으로 머랭에게 마갑을 씌웠고, 나는 브라우니가 날지 못하도록 힘주어 안고 있었다.

    머랭과 브라우니를 단속하면 이 이상 몬스터들이 몰려오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와 파타슈가 기사들과 동행한 주요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보니 아직 마음을 놓기엔 이른 듯했다.

    “크레페, 조심해!”

    에클레어의 고함과 동시에 그녀의 검 끝이 내 코앞을 스쳤다.

    “삐윳?!”

    내가 비명도 못 지를 만큼 짧은 순간, 브라우니가 펄쩍 뛸 듯이 놀랐다.

    “…후우.”

    에클레어가 숨을 고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이번에 두 동강 난 몬스터는 성인의 발 사이즈만 한 벌이었다.

    “백작님, 곤충형 몬스터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소모전을 계속하면 기사단원들이 버티지 못할 겁니다.”

    기사 한 명이 아빠에게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을이 없는 방향, 어두운 숲, 달빛도 구름에 가린 하늘.

    봉화대에서 올라간 희미한 연기가 흩어진 허공을 중심으로, 흑색 하늘이 일렁이고 있었다.

    “1군은 몬스터를 막아내며 서서히 후퇴, 2군과 3군은 남아 있는 생존자를 수색해 중앙 요새로 대피시킨 후 방어에 집중한다.”

    아빠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1차 방어선을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나도 힘겹게 하늘에서 눈을 떼고 파타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본부에 있는 키슈 님이랑 후작님께 지원해 달라고 하죠.”

    그들이 주특기로 사용하는 마력 속성은 화염과 냉기였다. 날개 달린 곤충을 몰아 한꺼번에 태워버리기에 적합한 능력이었다.

    “…네.”

    수배령 때문인지 썩 개운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반대는 없었다.

    불빛 하나 없는 숲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새까만 하늘.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 실은 곤충형 몬스터들로 뒤덮인 하늘이라는 걸, 그도 알아챘을 테니까.

    ‘변방에 나가 있던 아빠의 전사 소식이 도착하고, 결국 의지할 이를 모두 잃은 크레페.’

    잊고 있던 원작의 내용을 떠올린 나는 이를 악물고 본부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 * *

    내가 머랭을 너무 늦게 찾아서일까?

    아니면 갈레트나 아펠이 다른 수를 써서?

    어쩌면 여러 상황이 겹친 데다 운까지 나빠서?

    학자가 아닌 나는 몬스터들의 갑작스러운 난동이 무엇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원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혹시라도 다른 몬스터들의 주의를 끌 것이 두려워 마법 물품도 쓰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에클레어는 우리를 쫓던 몬스터 몇을 마저 처리하고 따라오겠다며 조금 뒤처졌다.

    “헉, 후작님! 키슈 님!”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그들을 불러냈다.

    “어느 쪽으로 가면 됩니까?”

    “저희 도움이 필요한 거죠?”

    키슈와 몽블랑이 기다렸다는 듯 내려와 물었다. 그들도 하늘을 보고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채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 후욱.”

    나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헥헥거리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키슈가 브라우니를 대신 들어주곤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어느샌가 도착한 파타슈가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카눌레 님은요?”

    “응? 우리는 못 봤는데?”

    “잠깐, 품에 있는 건 태자 전하의…….”

    “일단 가요!”

    그들의 대화가 길어지려는 낌새가 보였기에 나는 세 명(과 두 마리)을 한꺼번에 떠밀며 재촉했다.

    “아, 네!”

    파타슈가 허둥지둥 그들을 안내했다.

    나는 마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건물 코너 너머에 시선을 고정했다.

    또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아펠의 마나.

    하지만 분명 머랭은 파타슈의 품에 안겨 보낸 상태였고, 이렇게 약한 마나라면 아펠의 것이라 하기에도 어려웠다.

    아니, 차라리 아펠이었으면.

    어쩌면 그에게 부탁해서 예전처럼 주변에 퍼져 있는 몬스터를 다 해치워 버리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나는 뒤늦게 그런 희망을 품고 희미한 마나를 따라 본부 뒤쪽으로 향했다.

    마법진이다.

    그 안에 발을 들이기가 꺼림칙해서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코너 너머에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이 있었다. 둘 중에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건 분명 카눌레였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그의 몸에 가려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내가 섣불리 끼어들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큭.”

    카눌레가 검을 뽑아 들고 무형의 기운을 막아냈다.

    검날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것을 보니 아빠에게서 받은 마나 차단 검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변방에서 그 검을 사용하는 데엔 누구나 아는 위험이 따랐다.

    마법진도 모자라 마법 검까지?

    순간 등줄기가 곤두섰다. 안 좋은 상상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몬스터가 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뒤 카눌레에게 돌진했기 때문이었다.

    “오빠!”

    사마귀처럼 생긴 몬스터가 카눌레를 향해 날카로운 앞다리를 치켜들었다.

    “쯧.”

    카눌레가 짜증스럽다는 듯 혀를 차고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막은 후 몬스터의 몸통을 벴다.

    하지만 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카눌레의 발밑에 함정처럼 펼쳐져 있던 마법진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뭐라고 소리쳐 봤자 카눌레에게 마법진이 보일 리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달려들어 그의 몸을 잡아당겼다.

    날카로운 마나가 이쪽을 향해 쏘아졌다.

    “크…….”

    카눌레에게 가려져 있던 상대는 갈레트였다.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당황한 듯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이미 발동되기 시작한 마법을 막지도 못했다.

    그래도 어차피 마법은 나한테 통하지 않으니…….

    “…어?”

    울컥.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크레페!”

    뒤편에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검이 쏘아져 갈레트의 복부를 꿰뚫었다.

    “에클레어? 자, 잠깐만, 이건…….”

    카눌레가 말을 더듬으며 에클레어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

    갈레트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고는,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듯이 휘청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크레페, 아냐, 이런…….”

    두 손으로 복부를 막고 있었는데도 그의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온전히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내 앞까지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을 꿇는 자세로 쓰러졌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니, 쓰러진 건 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자 갈레트의 얼굴 뒤로 하늘이 보였다. 나는 그제야 내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 때문에 생각이 둔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갈레트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오빠는 눈물이 너무 많다니까.

    “아.”

    나는 한 글자 겨우 내뱉고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꺼내고 싶어도 통증이 방해했다. 말은커녕 비명도 안 나왔다. 가는 숨소리뿐이었다.

    갈레트가 피로 흥건히 젖은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 손길에 잠시 가렸던 시야가 도로 트였다.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라니. 동화책에서나 나올 것 같은 비현실적인 조합.

    “하… 하하…….”

    언젠가 했던 생각을 떠올리자 갑자기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배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울컥거리며 핏물이 쏟아졌다.

    “…….”

    그때 갈레트가 팔을 들어 내 상처를 덮었다.

    곧 그의 금발에 어울리는 등자색 귀걸이가 흔들리며 마법진이 나타났다.

    허공에 그려지는 기하학적인 문양과 함께 꽃처럼 피어나는 마법진.

    너무도 아름다워서 계속 보고 싶은 모습이었지만,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 *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갈레트는 크레페의 열 살 생일에 목숨을 잃었다.

    겨우 열다섯의 나이에, 심지어 크레페의 눈앞에서.

    그날을 기점으로 크레페는 사람들과 친해지거나 그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태어나 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크레페.’

    나는 갈레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 다섯 살 생일에 들었던 말이었다.

    다섯 살.

    그럼 원작의 크레페도 그 축하 말을 들었을까?

    그래서 갈레트의 죽음에 그토록 힘들어했던 걸까?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원작이 있었다 해도 이미 바뀌어 버린 운명이었다.

    원작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없던 사람이었고, 나만이 유일한 나였으며 동시에 크레페였다.

    그러니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지 못한 건 원작 탓도, 운명 탓도 아니고 순전히 내 탓이었다.

    “…….”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밝았다.

    새소리는 선명했고 날씨는 따뜻했으며 누운 자리는 포근했다.

    악몽을 꿨다는 말로 덮어버리고 싶은 평화로운 아침이었지만, 나는 현실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내 옆구리에 선명한 흉터가 남아 있었기에.

    【 상실 】

    이곳에 머무는 마법사만 해도 두 명이었다.

    심지어 둘 모두 마법 서약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

    아직도 옅은 통증이 남아 있는 걸 보니 부상이 어지간히 심각했던 것 같긴 하지만, 치유 마법을 얼마나 쏟아부었는지 이제는 나 혼자 걸을 수도 있었다.

    “삐이!”

    내가 1층에 도착하기도 전에 브라우니가 날 향해 달려왔다.

    자유로운 브라우니를 보며 순간 움찔했지만, 녀석은 날아다니는 대신 네 다리로 달려 내 정강이에 툭 머리를 기댔다.

    “브… 크레페 님!”

    브라우니를 쫓아온 듯 키슈도 금방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발치에서 브라우니를 안아 들고 곧 계단에 서 있는 나를 부축했다.

    “전 괜찮아요.”

    “네에…….”

    내가 부축을 거부하자 키슈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그나저나 브라우니를 저렇게 놔둬도 돼요?”

    “괜찮아요. 여기 보이죠?”

    키슈는 내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브라우니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들고 녀석의 가슴께를 보여주었다. 작은 펜던트가 목덜미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법진이 새겨진 것을 보니,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던 마갑을 대신해 저게 브라우니의 마나를 억제하고 있는 듯했다.

    “피오르가 만든 거예요.”

    “선생님이요? 대체 언제…….”

    “이틀 전에 왔어요.”

    “이틀?”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인지 빠릿빠릿하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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