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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38)화 (138/181)

138화

【 그날 밤 】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공작과 상의하고 나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우리는 밤이 되어서야 변방에 돌아왔는데, 에클레어의 합류가 갑작스러웠던 만큼 아빠와 몽블랑, 키슈는 당황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당연히 그녀의 합류를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에클레어가 머물 방을 안내해 주었다.

“여기야.”

“아, 예전 생각나네. 방이 똑같아.”

에클레어가 희미하게 웃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녀가 수련회 때를 기억한다는 것을 깨닫고 덩달아 미소 지었다.

에클레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럼 당분간은 쉬면 돼?”

“응. 소문을 퍼뜨리고 동향을 살피는 건 바니유 공작님이 해주실 테니까.”

“…그래도 맘 놓고 있을 상황은 아닌 거지?”

그녀가 넌지시 물었다.

“뭐어.”

이왕이면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내가 바니유 공작에게 알려야 하는 정보는 모두 전했다.

우리는 크렘과 크바스는 물론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까지, 쓸 수 있는 카드는 전부 쓸 생각이었다.

목표와 방법이 정해졌으니 실행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아펠의 반응이 좀 걱정되긴 하네.”

아펠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문제였지만 그 이후에 어떻게 행동할지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바니유 공작에게 재차 위험이 닥칠지도, 또는 내전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경이 복잡해진 내가 얼버무리듯 답하자 에클레어가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있지, 내가 검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빠가 자주 한 말이 있어.”

“응?”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기 힘들면 거꾸로 생각해 보래. 우리에게 최선의 수가 무엇일지 대신, 저쪽에서 피하고자 하는 최악의 상황이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는 거야.”

아펠이 피하고자 하는 최악의 상황?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다.

내가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하자 에클레어도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냥 그렇다고. 너한테도 도움이 됐으면 해서 한 말이었는데…….”

“으아아악!”

창문 밖에서 들린 비명이 에클레어의 말을 끊었다.

에클레어가 후다닥 창가로 가서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녀가 한 말을 되뇌고 있었다.

아펠이 피하려는 일이 뭘까. 그러기 위해 무엇을 할까.

“크릉!”

순간 거대한 늑대가 바닥을 박차고 숲을 향해 뛰어올랐다.

달빛에 반사된 흰 털.

설마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내 입에선 반사적으로 녀석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머랭?”

“뭐?”

에클레어가 날 돌아본 그 순간, 창문에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마나 파동에 감응한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며 동시에 날아오른 것이다.

아펠이 최악을 면하기 위해 선택할 행동, 그리고 원하는 것.

물론 자신의 약점을 아는 이들의 입막음과 우리의 목숨일 테다.

* * *

“왜 내가 오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에클레어가 짜증스럽게 말하곤 새장을 열었다.

“아무래도 언니가 변방이랑 궁합이 안 좋나 보다.”

나는 반쯤 해탈한 투로 대답했다.

“지금 농담할 때야?”

흰 매, 푸딩을 팔에 얹은 에클레어가 내게 눈을 흘겼다.

곧이어 요새 내부에 확성 마법을 이용한 경고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들은 중앙 본부의 훈련장으로 집합해 주십시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경보가…….

“와, 내가 과거로 돌아갔나 봐.”

기사 수련회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멘트를 들으니 정겹기까지 했다.

내가 영혼 없는 감탄사를 꺼내자 에클레어가 들으라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내 등짝을 후려쳤다.

“으휴, 정신 차려!”

물론 지금은 농담할 때가 아니었다.

단지 아펠의 행동력이 너무 놀라운 나머지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을 뿐.

나는 한 대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방송을 따라 훈련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상주하는 기사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 중 유독 튀는 한 명이 날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크레페 님!”

그가 튀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갑옷을 입지 않아서, 둘째는 품에 인형을, 아니 브라우니를 안고 있어서.

“파타슈 님? 다른 분들은요?”

“수배령 때문에…….”

파타슈가 말을 흐리며 본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좇자 창가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몽블랑과 키슈가 보였다.

“괜찮아. 플럼이 꾸민 일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끼리 어떻게든 해결하는 게 낫지.”

카눌레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체크하며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왜 하필 오늘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아무래도 에클레어 네가 변방이랑 안 맞는…….”

“시끄러!”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에클레어의 발차기가 꽂혔다.

푸딩이 주인을 돕겠다는 듯 부리로 카눌레의 머리를 쪼아대던 그때, 아빠가 선두에 나섰다.

“봉화가 올라온 북쪽 숲을 목적지로 진격한다! 2군과 3군은 양옆에서 1군을 보호할 것!”

“예!”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줄지어 섰다.

카눌레는 곧바로 그들을 따라가려던 아빠의 옷자락을 잡아챘다.

“설마 이번에도 절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백작님?”

도발적인 말을 들은 아빠가 픽 웃었다.

“물론 아니지. 카눌레 너는 이곳에 남아 몽블랑 후작님과 키슈 님을 호위하거라.”

“호위요?”

카눌레가 불만스럽다는 듯 눈썹을 치켰다.

하지만 아빠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몬스터들과 한바탕 싸운 게 불과 며칠 전이야. 이 정도 난동이라면 분명 누군가가 마법을 이용해 몬스터를 자극한 게 분명해. 그분들을 데려가기 위해서겠지.”

“…….”

“네 검술 실력에 대해선 이곳까지 소문이 자자하니, 믿으마.”

카눌레가 입을 다물자 아빠가 우리 일행 한 명 한 명을 번갈아 보며 지시했다.

“파타슈 님은 저희를 따라와 주십시오. 혹시 마법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바니유 영애께선 흰 매로…….”

“정찰은 맡겨주세요.”

에클레어가 오른 주먹을 왼 가슴에 대고 기사의 예를 취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빠가 뒤이어 내게 말했다.

“크레페는…….”

“마법에 대한 지식은 파타슈 님보다 제가 더 많아요.”

선수 치고 말하자 아빠가 파타슈를 쳐다보았다.

파타슈가 사실이라고 긍정한 다음에야 아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 * *

굳이 원작을 떠올리지 않아도 아펠의 마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기엔 충분했다.

그는 거대한 마법진을 띄워 일대의 몬스터들을 학살한 적도 있었고, 포트나 리시버 없이 공간 이동을 하루에 수 번씩 하는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이 이상했다.

“이상한데…….”

“뭐가요?”

파타슈가 내 중얼거림을 듣고 되물었다.

“아펠의 마나가 안 느껴져요. 아니, 아주 희미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마나 패턴은 확연히 보이지 않았다.

아펠의 마나는 선천적으로 강렬하고 진했다.

그건 속성이나 성질에 가까워서, 원한다고 약하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럼 마법이 아니라는 거예요?”

“뭐야?!”

파타슈의 말을 들었는지 에클레어가 발작하듯 되물었다.

사실 나와 파타슈가 대화하는 지금 이 순간, 다른 사람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격렬히 싸우던 와중에 우리 대화를 들을 정신이 있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큭.”

그때, 안대를 덮은 에클레어의 앞머리가 휘날렸다.

곧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팔뚝만 한 모기가 그녀의 공격을 피해 우리 쪽으로 날아왔다.

위협적이라기보다 혐오스러운 외양에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아요.”

파타슈가 마나로 바람을 일으켜 그것을 막았다.

잠깐 시간을 번 사이에 에클레어의 검이 모기를 반으로 갈랐다.

바스라질 것 같은 몬스터의 생김새와 달리 검이 부딪힐 때 난 소리는 쇳소리처럼 단단했다.

“야, 마법 쓰지 말라니까!”

“코앞에 공격이 날아오는데 어떻게 가만있어요?”

파타슈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에클레어는 이를 갈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와 더 말싸움을 하진 못했다.

대신 그녀는 내게 물었다.

“아까 머랭 쿠키인지 뭔지 중얼거렸던 건 뭔데?”

“아, 머랭?”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래, 처음엔 분명 머랭의 흰 털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고 아펠의 마나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냥 내가 헛것을 봤나 보다 하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머랭의 이름이 나오자 파타슈의 품 안에 있던 브라우니가 갑자기 날 쳐다보았다.

“삐?”

녀석이 턱을 치켜들자 큼직한 마갑이 머리에서 흘러내리려 했다. 파타슈가 곧바로 그것을 손으로 잡아 고정했다.

그 한가해 보이는 모습이 심기를 자극한 듯, 에클레어가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발끈했다.

“지금 망아지 산책이나 시키러 나온 게 아니거든요?”

그녀가 마갑을 잡아채자, 브라우니가 기다렸다는 듯 파타슈의 품에서 빠져나와 허공을 밟고 훌쩍 멀어졌다.

“언니!”

“왜, 왜 그래?”

마갑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모르고 있던 에클레어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으휴.”

나는 파타슈에게 잔소리를 떠넘기고 브라우니를 따라갔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된 마을 방향이었다.

그래도 원체 몬스터들이 많아서 브라우니가 마나를 쓰든 말든 상황이 특별히 나빠지는 것 같진 않았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삐유!”

브라우니가 좁은 골목에서 멈춰 날 돌아보았다.

“어딜 그렇게 도망…….”

내가 잽싸게 녀석을 안고 타박하는 말을 꺼내다 멈췄다.

희미하던 아펠의 마나 파동이 직전보다 선명해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길은 건초를 쌓아놓은 막다른 곳에서 끊겼는데, 이상하게도 건초 더미의 맨 위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었다.

꼭 뭔가가 웅크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삐.”

브라우니가 마치 내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듯, 나와 그곳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그 공간에 가만히 손을 대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부드러운 감촉과 따스함이 느껴졌다.

“낑?”

“머랭?”

내 부름과 동시에 머랭의 흰 털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제야 나는 마탑에서 머랭이 투명화를 쓴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너였구나.”

브라우니가 공중을 날 때 마나를 쓰는 것처럼 머랭은 투명화할 때 마나를 쓰는 모양이었다.

몬스터들이 왜 그렇게 쏟아졌는지 알겠네.

나는 허탈함과 다급함이 반반 섞인 마음으로 녀석을 안고 골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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