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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37)화 (137/181)

137화

겨우 두 명이 떠났을 뿐인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라진 듯 서먹한 공기가 감돌았다.

몇 포기 잡초가 난 공터 중앙에는 크바스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고 에클레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크흠.”

이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파타슈가 목을 가다듬었다.

“걱정 마세요. 갈레트 님의 실력이라면 치유 마법도 쉽게 쓰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에클레어가 고개를 들어 파타슈를 쳐다보았다. 파타슈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아차 하며 둘러댔다.

“아, 아니, 그럼 더 안 좋은 건가. 뭐, 어깨를 깊게 베인 것 같았으니 치유 마법을 써도 전처럼 검을 편히 휘두르긴 불가능할 수도 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마 그 생각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곳엔 크바스가 다친 것을 꼴좋다며 환영할 사람도, 반대로 대련인데 너무 심했다며 에클레어를 탓할 사람도 없어 보였으니까.

“됐어. 아니, 됐어요.”

에클레어가 드물게 파타슈에게 존대하며 손사래를 치고는 크렘의 앞으로 다가가 예를 취했다.

“여러 일로 경황이 없어 손님맞이가 늦었네요.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뇨. 별말씀을.”

넋을 놓고 있던 크렘이 도리질을 치고 정신을 추슬렀다.

그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크바스가 와 있다는 사실에 놀라, 에클레어에게 인사도 못 하고 그대로 대결 구경까지 하게 된 상황이었다.

뒤늦게 예를 차린 크렘이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영전에 꽃을 바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 * *

크렘은 사교에 능한 만큼 장례 예식에도 빠삭한 모양이었다.

그는 보통 사제들이 하는 미사를 직접 올리겠다며 기도문을 낭독하고는, 품에서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검은 백합 브로치를 꺼내 제단에 올렸다.

“그래도 그 아이를 보내줄 사람이 한 명은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바니유 공작이 크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꺼풀은 불그스름하게 부어 있었고 목소리는 가라앉은 채였다.

고목처럼 우직하게 서 있던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래성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약한 모습을 눈치채지 못한 척 담담히 대꾸했다.

“여기 오지 못한 사람들도 모두 같은 마음일 거예요.”

“…….”

그러자 공작이 메마른 눈빛으로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탓하는 것일 수도, 어쩌면 입바른 말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몽블랑 후작과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인맥도 정보력도 예전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공작이 말을 꺼냈다.

“나름 좋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내 인망이 겨우 이 정도였던가 싶군요.”

그가 말을 맺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분명 미소이긴 했지만 정확히는 씁쓸함과 회한이 담긴 조소처럼 보였다.

내가 말을 고르는 동안 장례 미사를 끝마친 크렘이 다가와 예를 표했다.

“참례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그의 정중한 말에 공작이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크렘은 몽블랑과 연관 없는 귀족들 중에선 유일한 조문객이었다.

바니유 공작은 자신의 권세가 추락한 현재 상황에 씁쓸함이 앞서는 모양이었으나, 나는 반대로 젤라토와 인연이 깊지 않았을 그가 이곳까지 걸음 해준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에클레어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자작가 나부랭이라고 크렘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았던 그녀가 입술을 깨물어 울음을 삼켰다.

크렘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감사합니다.”

에클레어가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 든 순간, 크렘의 외투 안주머니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 두 개가 떨어졌다.

“아, 이건…….”

크렘이 곧바로 그것을 주워 들고 헛기침을 했다.

“크흠, 공작님께 전해드릴 물건이 있다고 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크렘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종이 뭉치에 조금 묻은 먼지를 털고 그중 하나를 바니유 공작에게 건넸다.

그것은 크기도, 찍혀 있는 인장도 가지각색인 편지들이었다.

공작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편지들을 모아 묶은 끈을 풀었다.

제일 위에 있던 서신을 펼쳐 읽던 공작의 손이 금세 떨리기 시작했다.

크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바니유 공작님의 힘이 되어드리겠다는 약조를 담은 서신입니다. 태자 전하의 시선이 닿는 동안 직접적인 행동을 하진 못하겠지만, 공작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원조해 드리기로 약조하셨습니다.”

그가 몸을 돌려 에클레어에게 남은 편지 묶음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쪽은 젤라토 님의 친우분들께서 제게 전달을 부탁하신 서신입니다. 마차에 그분들이 보내주신 검은 백합과 장신구들이 남아 있으니 시종을 보내 가져오라 하시죠.”

에클레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크렘의 손수건을 꽉 쥐었다.

“늦게 전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크바스 님이 계실 줄은 몰랐기에…….”

크렘이 멋쩍은 듯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가 다시금 공작을 향해 섰다.

“오늘의 참례는 제가 그분들을 대표해서 한 것이라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두 젤라토 님의 비보를 애석히 여기고 계십니다.”

* * *

우리는 에클레어와 바니유 공작에게 잠시 마음을 추스를 시간을 주기로 하고 식장을 나왔다.

“크렘 님께서 와주셔서 다행이에요.”

“제가 나서서 한 일은 아닙니다. 거짓을 말한 것도 아니고요.”

크렘이 가는 눈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아펠의 시선을 겁내지 않고 직접 온 것만 해도 충분히 위험을 감수한 행동이었다.

나는 그의 공적을 새삼 끄집어내는 대신 미소로 답했다.

크렘도 내가 하려는 말을 이해한 듯 멋쩍게 시선을 피하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온 보람이 있는 것 같아 기쁘군요.”

나는 잠깐 입을 다물고 크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사실 그가 와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작뿐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바니유가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당장 뺨 맞고 쫓겨나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젤라토는 몽블랑 편에 서는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그러니 마침 크렘이 나타나주지 않았다면, 바니유 공작과 젤라토의 인망이 이렇게 두텁지 않았다면, 분명 앞으로의 일은 훨씬 어려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크렘 님.”

“네?”

“앞으로는 지금까지보다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바니유가에 서신을 주신 분들께도 전해주세요.”

“…예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크렘이 말꼬리를 늘였다.

그러나 나는 그와 그 귀족들이 어떻게 해야 안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목표는, 앞으로 일이 좀 더 심각해질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데 있었으니까.

이 정도 언급해 두면 되겠지. 크렘은 눈치가 빠르니까.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다려봤자 더 나올 정보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 크렘이 작별 인사를 했다.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기에 나 역시 그를 붙잡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가주를 대신해 크렘을 배웅하고 다시 식장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과 에클레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커스터드 자작가의 영식께선 영지로 돌아가신 모양이군요.”

바니유 공작이 첫마디를 뗐다.

문을 닫고 있었으니만큼 우느라 눈이 퉁퉁 부어 있다거나 목소리가 잠겨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았다.

그의 눈빛은 오히려 처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한편으론 결연해 보이기도 했다.

“정말이야? 손수건도 아직 못 돌려줬는데.”

에클레어도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

“뭐, 전해줄 기회야 있겠지.”

그녀가 짐짓 쾌활하게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게 다가왔다.

“변방으로 갈 거지? 나도 갈게.”

“으, 응?”

에클레어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녀는 곧바로 짐을 챙겨 오겠다면서 제 방으로 뛰어갔다.

카눌레는 놀라는 듯했지만 딱히 그녀를 막을 생각은 없는 듯 머리를 긁적였고, 파타슈도 내 눈치만 한 번 보고 말았다.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려 하지 않았기에 별수 없이 내가 공작에게 물었다.

물론 눈을 다쳤다고는 해도 에클레어의 무위라면 변방에서도 충분히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이곳엔 암살자까지 오간 전력이 있었다.

한 번 뚫린 보안에 두 번째가 없으리라는 법도 없고,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공작의 목숨이 위험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공작은 이미 결심한 듯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제 걱정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일이 마무리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예요. 게다가 앞으로 아펠의 소문이 퍼지면…….”

아펠과 황제의 관계에 관한 정보가 알려지면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그 말을 꺼내려다 말고 내가 주변 눈치를 보았다. 이곳은 앞뜰이었고 우리 일행뿐 아니라 바니유가의 고용인들도 있었다.

말해도 될까, 내가 우물쭈물하던 그때 공작이 선수를 쳤다.

“아펠이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얘기라도 하려는 겁니까?”

“…에?”

내가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자 내 반응으로 진위 여부를 확인한 듯 공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허황된 가설이라고 생각했지만, 모순적이게도 가능성은 제일 높더군요.”

그가 열린 문 너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실은 젤라토의 반대에 왜 진작 귀 기울이지 않았을까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젤라토가 우리의 도주를 돕는 데 반대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그래서 오늘 찾아오기가 더 면목 없기도 했고.

나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공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백합 장신구와 편지들이 놓인 젤라토의 영전이 보였다.

“하지만 암살자가 든 그날, 녀석도 몽블랑 후작의 결백을 깨달은 모양이더군요. 태자 전하께서 진정 무고하셨다면 이런 곳에 암살자를 보낼 리 없으니 말입니다.”

“…….”

그가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늦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크레페 님. 저는 기꺼이 행동을 함께하겠습니다.”

공작의 뒤에 펼쳐진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우리가 선 위치와 노을이 절묘한 역광을 만들어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공작이 짧은 말을 덧붙였다.

“그게 검을 들어야 하는 일이라도.”

‘검을 든다.’

나는 그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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