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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36)화 (136/181)
  • 136화

    우리를 덮친 그림자는 에클레어였다. 뭔가에 떠밀린 듯 중심을 잃었던 그녀를 바니유 공작이 잡아 세웠다.

    하지만 에클레어는 우리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고함쳤다.

    “대결? 웃기시네, 누가 할 소릴!”

    앙칼지게 쏘아붙인 에클레어가 홱 몸을 돌려 날 쳐다보았다. 그 기세에 놀란 내가 딸꾹질할 때처럼 화들짝했다.

    에클레어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그녀가 갑자기 내 손아귀에 있던 손수건을 가로채 크바스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내 쪽에서 신청해 주지, 그 대결이란 거! 당장 밖으로…….”

    흥분해서 잔뜩 쏘아붙이던 에클레어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 뭐야, 이거?”

    “…미안.”

    코 풀고 나서 아직 세탁 못 한 손수건이었다.

    내가 말을 줄이자 에클레어도 답을 유추한 듯 와락 얼굴을 구겼다.

    “풉.”

    갈레트가 웃음을 터뜨렸다. 손수건을 얼굴에 덮은 채 서 있는 크바스가 그제야 내 눈에 들어왔다.

    * * *

    필연적으로 그들의 대결 장소는 우물가 근처의 뒤뜰이 되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파타슈의 손수건을 빨래했고 크바스는 찬물로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파타슈에게 손수건을 돌려준 것과 거의 동시에 크바스가 허리를 일으켰다.

    그가 하녀에게 수건을 건네받고 남은 물기를 닦았다.

    “꼴이 우습긴 하군.”

    크바스가 이를 갈듯 말하며 날 쳐다보았다.

    시선이 날카롭긴 했지만 나는 멋쩍은 나머지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연신 헛기침만 했다.

    참고로 파타슈는 내가 돌려준 손수건에 다시 물을 끼얹어 조몰락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내가 깨끗이 빨아서 돌려드린 거거든요!

    “어딜 갔다 온 거야?”

    카눌레가 나와 크렘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더 궁금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래?”

    나는 이때다 하고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눌레는 내 질문을 예상한 듯 줄줄이 답했다.

    “에클레어가 갈레트 형한테 시비를 걸었어. 근데 크바스 형이 끼어들어서 이렇게 된 거야.”

    “끼어들었다고요?”

    내 옆에 서 있던 크렘이 조용히 귀 기울여 듣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자기는 태자의 명을 받아 갈레트 형을 호위하러 온 거라 에클레어의 시비를 홀시할 수 없다고 했던가.”

    카눌레가 어깨를 으쓱하고 마저 설명했다.

    “그랬더니 에클레어가 발끈해서 덤벼들었고, 크바스 형은 그걸 몸으로 막고 대결 얘길 꺼냈지.”

    “언니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거지?”

    “그렇긴 한데…….”

    맘에 걸리는 부분이 있는 듯 카눌레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수다 시간은 거기까지인 듯했다.

    “흥, 됐어. 언젠가 진심으로 상대할 날이 올 줄 알았으니까. 젤라토 오빠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말이야.”

    신발 끈을 단단히 묶은 에클레어가 눈을 매섭게 뜨고 허리를 폈다. 하녀가 장비를 챙겨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우려던 찰나였다.

    “난 방어구 필요 없어. 필요해?”

    에클레어가 대놓고 하대하며 제 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그녀가 크바스를 향해 검 끝을 겨누고 까딱거렸다.

    “방어구는 몰라도 무기는 필요하지. 아까 압수당했잖아.”

    크바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관망하고 있던 바니유 공작이 끼어들었다.

    “괜찮다면 내 검을 빌려주지.”

    “아빠.”

    에클레어가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공작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검집이 매달린 혁대를 풀어 크바스에게 내밀었다.

    “…….”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말한 바 있었듯 바니유 공작은 무예에 적합한, 장대한 기골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크바스와 덩치가 비슷할 정도였으니 아마 사용하는 검도 비슷한 무게일 테고, 당연히 크바스가 공작의 검을 어떻게 쓰냐는 이유로 주변이 적막해진 것은 아니었다.

    크바스가 황실 기사단의 일원이라 두 명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라는 게 문제일 뿐.

    공작이 한 말은 적에게 자신의 무기를 건네주고 본인의 무장은 포기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크바스는 뭐라 대답하기 전에 잠시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갈레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그것이 뭔가에 대한 허락이었던 것처럼, 크바스가 공작에게서 검을 건네받았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들은 공작이 몇 걸음 물러나 다시 거리를 두자, 그의 혁대를 찬 크바스가 공터 중심으로 들어가선 에클레어를 마주 보고 섰다.

    “공작님의 검을 빌립니다.”

    “빌리시길.”

    대결 전에 오가는 의례적인 인사가 끝난 그때, 바니유가의 기사가 손을 들고 신호했다.

    “대전! 개시!”

    그 말이 끝나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닥을 박차고 서로를 향해 덤벼들었다.

    근육으로 덮인 다부진 체구의 남자와 마른 몸매의 여자.

    겉모습만 따지면 크바스의 압승이 불 보듯 훤했지만, 에클레어의 진짜 실력은 마법 물품을 사용할 때 비로소 빛을 냈다.

    게다가 지금은 커스터드에 재학 중이던 때와 달리 마법 물품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추첨도 없었으니, 아마 승기는…….

    “마법 물품을 쓰는 언니가 더 유리한 것 맞지?”

    내가 질문하자마자 에클레어가 몸을 웅크렸다가 돌고래처럼 튀어 올랐다. 운동선수라도 힘들 것 같은 높이로 점프한 그녀가 날래게 몸을 비틀어 검을 겨누며 떨어졌다.

    챙!

    하지만 크바스는 검의 면 쪽으로 그녀의 공격을 튕겨냈다. 검이 부러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너 황실 기사단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니냐?”

    카눌레가 시비 거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에클레어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발차기를 섞어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육탄전을 동반한 공방은, 보는 내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의 화려한 난전이었다.

    에클레어는 때론 벌처럼 날카롭게, 때론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빠른 공세를 펼쳤다. 공격 하나하나가 맞으면 치명타가 될 만한 강공이었다.

    그러나 크바스가 정타로 얻어맞은 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에클레어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거나 받아쳤고, 가끔은 아예 숙련된 투우사처럼 상대의 공격을 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건…….”

    내가 말을 흐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클레어의 호흡이 거칠어진 반면, 크바스의 절도 있는 동작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검술에 안목이 없는 내가 보기에도 명백히, 에클레어는 지쳐가고 있었다.

    게다가 차마 말할 수는 없었지만 에클레어와 크바스의 실력 차는 내가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커 보였다. 크바스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건 이상했다.

    언니의 실력이 전과 달라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안대 탓이야.”

    내 생각을 읽은 듯한 대답이 돌아왔다.

    “외눈으로 보니 거리감이 떨어져서 그런 거겠지.”

    카눌레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대답을 들은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바닥에 몇 번이나 구른 에클레어는 이미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내 심정은 처절하다 못해 비참할 지경이었다.

    “…….”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대결을 처음 구경하는 건 아니었다.

    카눌레는 어릴 때부터 검 휘두르기를 좋아했고, 아주 어릴 때부터 크바스와, 에클레어와, 아펠과 대결이나 대련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중 어떤 때도 이만큼 일방적이진 않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곧바로 수식을 계산했다.

    카눌레와 에클레어의 대련에서 그랬듯, 그들 몰래 마법으로 바람을 일으키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숫자 몇 개를 채 쓰기도 전에 카눌레가 그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치워.”

    “어쭈. 명령하는 거냐?”

    나는 카눌레를 째려보고 게걸음을 쳐서 조금 옆으로 물러났다. 다시 식을 계산하려는데 또 카눌레의 발이 살포시 내 글자를 지르밟았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내가 참지 못하고 빽 고함을 내질렀다.

    “야!”

    “흥.”

    “또 왜 그래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빨래를 하고 있던 파타슈가 급히 물기를 짜낸 손수건을 팔락거리며 다가왔다.

    “너 진짜 귀족 맞아? 진짜 모욕이 뭔지 구분을 못 하는 거야?”

    카눌레의 말을 들은 내가 이를 악물었다.

    크레페로 살아온 지도 이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내가 귀족의 명예나 명예가 걸린 대결에 관해 모를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언니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나는 모르는 척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그리 생각하자 크바스보다 카눌레가 더 원망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시죠?”

    입씨름하는 시간이 길어질 낌새를 보이자 크렘까지 이쪽에 말을 걸었다.

    의도치 않게 시선이 모이자 울화가 끓어올랐다.

    그때, 갈레트가 내 심정을 알기라도 하듯 말을 보탰다.

    “그래. 진정해, 크레페.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테니까.”

    “뭐?”

    그게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채 꺼내기도 전이었다.

    부산스럽게 싸우던 에클레어와 크바스가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

    우리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크바스의 옷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오른쪽 어깨의 자상에서 흘러내린 피 때문이었다.

    “조, 종료!”

    한 박자 늦게 기사가 외쳤다.

    에클레어가 크바스의 어깨를 벤 검을 거두어 검집에 넣었다.

    그녀의 사지는 물론, 심지어 얼굴에도 옅은 생채기와 자상이 남아 있었지만 크바스의 것만큼 깊은 상처는 없었다.

    “으휴, 적당히 하지.”

    종료 선언을 들은 갈레트가 크바스에게 다가갔다. 크바스는 언젠가처럼 갈레트를 무시하고 예를 차렸다.

    “공작님의 검을 빌렸습니다.”

    “…받았습니다.”

    대결의 끝을 알리는 인사말과 함께, 크바스가 멀쩡한 왼팔로 바니유 공작의 검을 갈무리해 검집에 넣었다.

    대꾸하는 에클레어의 낯빛이 어두웠다.

    “좋은 검이군요. 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바스가 바니유 공작에게 검을 돌려주었다.

    “의무실로 따라올 텐가?”

    “그리 중한 부상은 아닙니다.”

    “응급처치는 저도 할 수 있고요.”

    갈레트가 은근슬쩍 끼어들어 말했다.

    그래, 갈레트라면 치유 마법 정도는 쉽게 쓸 수 있겠지.

    내가 쉽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갈레트가 침착하게 이곳에 모인 인원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 호위를 맡은 사람이 부상을 입었으니 저도 이만 가봐야겠군요.”

    그러더니 바니유 공작의 앞에 바로 서서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뷔슈 드 노엘 바니유 공작님,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을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

    공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갈레트는 굳이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갈레트가 마지막으로 내게 눈인사하듯 고개를 까딱하고, 크바스와 함께 마차가 있는 마구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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