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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35)화 (135/181)
  • 135화

    “멈춰요.”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파타슈가 짧게 말했다.

    나는 몇 걸음 가지 않아 멈췄다. 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

    에클레어는 입을 다물고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새로 온 사람은 두 명으로, 모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갈레트와 크바스.

    “설마 조문객을 내쫓으시려는 건가요?”

    갈레트의 낭랑한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에클레어가 검 손잡이를 쥐었다.

    차랑거리는 쇳소리가 난 걸 보니 실제로 검을 빼 들려 한 모양이었는데, 곧바로 뒤따라간 카눌레가 손을 뻗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카눌레, 벌써 와 있었어? 자주 보네?”

    갈레트가 놀리는 것 같은 어투로 말했다.

    에클레어가 다시금 검을 빼 들려는 걸 보고, 나는 이대로 있다간 큰일 나겠다 싶어 그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내가 말리기 전에 갈레트 앞을 가로막은 인물이 있었다.

    “에클레어, 순수하게 조문하러 온 거야.”

    크바스는 전부터 젤라토와 친분이 두터웠고 에클레어와의 인연도 나보다 오래된 사람이었다.

    에클레어는 차마 그에게까지 검을 빼 들진 못했으나 얌전히 물러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오빠는……!”

    “언니.”

    내가 에클레어의 팔을 붙잡았다.

    “조문에 쓰일 꽃을 가져오셨잖아.”

    “…….”

    에클레어가 그제야 시선을 내려 크바스의 손을 확인했다.

    크바스가 가만히 들고 있던 검은 백합 한 다발을 내밀었다. 검을 오래 잡아 거칠어진 손에 가녀린 꽃다발이 들려 있는 게 조금 어색해 보였다.

    “에클레어, 손님맞이가 오래 걸리는구나.”

    “아빠.”

    뒤이어 바니유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게도 새로운 조문객에 대한 보고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에클레어가 눈썹을 움찔하곤 뒤로 조금 물러났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크바스 데 오크로시카가 오랜 친우의 비보를 듣고 걸음 하였습니다.”

    크바스가 깊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래. 오랜만이다, 크바스. 오크로시카 후작께선 별고 없으시겠지?”

    공작은 태연히 손을 뻗어 크바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하대하는 것을 보니 역시나 집안끼리도 제법 친분이 있었던 듯했다.

    그는 곧이어 갈레트에게로 눈을 돌렸다. 갈레트가 제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안 좋은 소식으로 걸음 하게 되어 면목 없습니다.”

    “쉽지 않은 걸음을 해주셨군요.”

    그게 대답의 전부였다.

    바니유 공작은 머리를 한 번 끄덕이더니 이번엔 카눌레를 쳐다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입니다. 기꺼이 문을 열어주신 뷔슈 드 노엘 바니유 공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저야말로 걸음에 감사드립니다.”

    간단히 답례한 그가 에클레어에게 말했다.

    “이분들께 식장을 안내해 드리거라.”

    “…네.”

    에클레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곤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공작은 다른 용건이 있는지 반대쪽으로 향했고, 갈레트와 크바스가 타고 온 듯한 황실의 마차는 코너를 돌아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나와 파타슈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에클레어의 뒤를 따랐다.

    “안녕.”

    나와 눈이 마주친 갈레트가 짧게 인사했다.

    웃는 얼굴은 평소와 같았지만, 호들갑을 떨지 않는 그는 마치 딴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몽블랑 후작을 구하러 온 거였구나. 갑자기 강경파로 돌아서서 놀랐어.”

    아무래도 갈레트는 내가 왜 그런 위험한 선택을 했는지 모르고 있던 듯했다. 젤라토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그래서.’

    그래, 그래서 마음을 정한 거지. 더 이상의 희생을 내고 싶지 않아서.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여전히 내 맘을 잘 알아주는구나, 역시 우리 오빠, 하고 감탄해야 할 타이밍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클레어는 아직 선두에 있었고,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괜히 갈레트와 친한 척 잡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갈레트는 내가 대답을 하든 말든 제 할 말만 계속했다.

    “이제 서로 양보할 수 없게 됐네. 괜찮겠어? 내가 볼 땐 조금 경솔한 선택이었던 것 같은데.”

    “…오빠야말로.”

    그렇게 맞받아치자 갈레트가 피식 웃었다.

    이후에 다른 말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무기 반입은 금지야.”

    연회장 문 앞에 멈춰선 에클레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카눌레가 제 검집을 풀고 조용히 크바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크바스는 갈레트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갈레트가 어깨를 으쓱하자 크바스도 무장을 해제했다.

    우리에게서 검과 견갑, 흉갑까지 몽땅 떠맡은 시종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검은색 백합은 슈트루델 제국 남부의 고산대에서만 나는 고산 식물이었다.

    흔히 볼 수 없는 만큼 고가의 품종이라고 들었는데, 그 드문 꽃이 장례의 상징이 된 이유는 순전히 꽃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나도 생화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평화롭게 눈을 감은 채 검은 백합에 둘러싸인 젤라토의 모습은 꼭 그림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황제의 장례식과 달리 이곳에는 사적인 친분을 가진 몇몇 조문객들밖에 없었고, 그런 만큼 예법이나 절차에 엄격한 자리도 아니었다.

    나는 성직자가 낭독하는 조의문을 듣다 말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있다간 눈물을 보일 것 같아서였다.

    바니유 공작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에클레어조차 꿋꿋이 눈물을 참고 있었다.

    심지어 갈레트, 크바스와 한 지붕 밑에 있는 상황에 긴장 풀고 울음이나 쏟아낼 순 없었다.

    “…괜찮아요?”

    “네에.”

    날 따라 나온 파타슈가 손수건을 꺼냈다.

    “…갈레트 님은 모르고 계셨을 거예요.”

    “그렇겠죠.”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동의했다.

    빈말로 들렸는지 파타슈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설마 갈레트 님이 크레페 님을 큰 곤경에 빠뜨리진 않을 테니까. 물론…….”

    “설마는 무슨. 이미 충분히 큰 곤경이잖아요.”

    내가 퉁명스레 답하자 파타슈가 차마 아니라는 말은 못 하겠는지 어색한 표정으로 큼큼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그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다 말고 팽 코를 풀었다.

    …아차.

    “저, 손수건 그거 하나뿐인데.”

    파타슈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방금 전까지 울던 것도 잊고 민망해하며 답했다.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연회장 밖에서 머무는 시간이 좀 더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머물던 기억을 되살려 우물가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공작가 정문에 또 다른 마차가 와 있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가볼까요?”

    나와 시선을 교환한 파타슈가 먼저 물었다. 내가 긍정의 답을 하고 발걸음을 돌려 정문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맞이를 하던 공작의 뒷모습이 보였다.

    “크레페 님!”

    나를 등지고 서 있던 공작보다 손님이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던 얼굴이었기에 나는 조금 어색하게 예를 차렸다.

    “오랜만이네요, 크렘 브륄레 커스터드 님.”

    “그런가요? 시간으로 따지면 그리 오래되진 않았을 텐데.”

    내가 별궁에 있을 때 크렘을 만나 여러 정보를 듣긴 했다. 그간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을 뿐.

    “파타슈 님은 오랜만에 뵙는 게 맞지만요.”

    크렘이 가볍게 눈웃음을 지으며 파타슈에게 인사했다. 파타슈는 그가 자신을 알은척할 줄 몰랐다는 듯 잠깐 몸을 움찔했다가 어설프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말없이 바니유 공작을 쳐다보았다. 혹시 공작이 커스터드 자작가와 다른 인연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작은 반대로 내게 질문했다.

    “믿을 만한 분입니까?”

    “아, 네.”

    아마도요.

    나는 뒷말을 삼키고 크렘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는 나나 에클레어와 학교를 같이 졸업한 동기였다. 하지만 크렘과 젤라토 사이에는 별 접점이 없었고, 그는 아펠의 적이라고 하기에도, 내 친구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크렘 님께서 여기엔 무슨 일로…….”

    나도 그의 방문이 뜻밖이라는 뉘앙스로 말하자 크렘이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은요, 당연히 비보를 접해 조문하러 왔지요. 제가 에클레어 님과 아예 연이 없던 것도 아니잖습니까. 게다가 바니유 공작님께 따로 전해드릴 물건도 있거든요.”

    전해드릴 물건?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지만 사교계 대표 마당발에 원작 공인 인싸의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하면 놀랄 것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공작이 나서서 말했다.

    “그러시군요. 제가 귀빈을 너무 오래 잡아둔 모양입니다.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기꺼이 문을 열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크렘이 고상하게 예를 갖추고 우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괜한 의심을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하긴 저희 입장에서야 요즘 같은 때 조문을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지덕지겠지요.”

    “그런…….”

    바니유 공작이 냉소적으로 말을 꺼내자 크렘이 불편한 듯 목소리를 흐렸다.

    “최근 정세가 워낙 흉흉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젤라토 오빠가 얼마나 좋은 분이었는지, 그분을 한 번이라도 만났다면 누구든 깨달았을 겁니다.”

    내가 담담한 어투로 문장을 맺었다. 손수건을 쥔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갔다.

    “…감사합니다.”

    공작이 날 돌아보지 않고 짧게 인사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크바스 님이 오신 것만 봐도 그렇잖아요. 황실 기사단에서 근무하고 계시는 분이에요. 아무리 오랜 친우라고 해도…….”

    “크바스 님이 오셨단 말입니까?”

    크렘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엇에 놀랐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내가 곧바로 대답해 주었다.

    “갈레트 오빠랑 같이 왔어요. 오빠가 아펠 측 사람이 돼서 오빠의 호위를 겸해 동행한 것 같더라고요.”

    간단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크렘의 눈동자가 서너 번쯤 굴러다녔다. 나름 정보에 빠르다는 평을 듣고 있을 그였지만 갈레트와 아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크바스 님도 이번엔 조용히 있다 가시려는 것 같았어요.”

    말하는 사이 연회장에 도착했다. 앞서 걷던 바니유 공작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은…….”

    내가 크렘을 보며 말을 마치려던 때였다.

    별안간 우당탕 소리가 나며 내 앞에 그림자가 졌다.

    “무……!”

    “끄악!”

    크렘과 내가 함께 찌그러질 뻔한 걸 파타슈가 어깨로 받쳐 막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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