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크흠. 파타슈, 우리는 나가 있자.”
“네? 네…….”
“그럼 저도 이만 방으로 돌아가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레트의 동기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키슈와 몽블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는 만큼 우리 가족들만의 시간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크흠.”
나는 그들이 나가자마자 목을 가다듬었다.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임을 예상한 듯 아빠가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갈레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고 해봤자 그 ‘무슨 일’은 우리 모두가 함께 겪은 일이었다.
엄마는 나와 카눌레의 엄마이기도 했고, 아빠에겐 아내였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새삼 갈레트에게만 충격적일 것도 없었다.
나는 짧게 설명했다.
“아무래도 엄마 일 때문에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에요.”
“엄마 일? 그게 무슨 소리야?”
카눌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엄마의 목숨을 앗아 간 것도 아닌데 새삼 왜 갈레트가 내게 화를 내는 건가 싶은 모양이었다.
순간 몽블랑과 신탁의 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날 일을 들은 모양이구나.”
아빠가 한탄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날 일이요?”
카눌레가 곧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카눌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은 머리와 대조되어 더 희게 보이는 목덜미에 흙먼지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옷깃에 가려 지금까지 안 보인 모양이었다.
“너희들이 수련회로 이곳에 왔을 때 말하려고 했다.”
수련회.
그 단어를 듣고 나서야 내가 아빠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든다 했더니 오늘이 꼭 그날 같은 느낌이었다. 몬스터들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다음 날 말이다.
카눌레는 마을 주민과 함께 보수 작업을 돕다가 아빠를 찾아왔고, 우리는 이렇게 셋이 모여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 이야깃거리가 됐던 게 에클레어의 검술 실력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검술 실력에 감탄하자마자 아빠는 별안간 엄마의 이름을 꺼냈다.
내게는 다소 뜬금없다고 느껴진 화제 전환이었다. 실제로 검술 실력이 뛰어난 여자라는 것 외에 그들에겐 어떤 공통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빠에겐 그 정도 연결 고리만으로 엄마를 떠올리기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아마 그만큼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그의 슬픔은 내가 감히 가늠하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괴로울 만도 하건만, 아픈 기억을 꺼내놓는 아빠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수플레가 지원군으로 온 그날, 갑자기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했어. 마법을 쓰지 않고는 막아내기 힘들 정도여서 몽블랑 후작님도 힘을 보태주셨지.”
나는 갈레트에게 들어 얼추 알고 있었지만 카눌레는 처음 듣는 얘기일 것이다.
역시나 그는 아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방어를 위한 마법은 다른 몬스터들을 계속 자극할 뿐이었고, 결국 우리는 최소한의 방어 인력만 남겨두고 후퇴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테이블 위에 놓인 아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카눌레의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그래서, 수플레에게 지휘를 맡기고 나는 몽블랑 후작님과 함께 전방을 벗어났지.”
‘상상이 돼? 엄마가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 앞에서 칼을 빼 들고 있는데, 혈혈단신으로 떠맡기고 후작이랑 같이 도망쳤다고!’
갈레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아직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피시키려고 그런 거잖아요.”
내가 먼저 나서서 아빠를 감쌌다. 어쩌면 카눌레도 갈레트와 똑같이 생각할까 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요. 엄마의 희생이 헛된 것도 아니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그러나 내 불안과 달리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수련회 때 들었어요. 많은 주민들이 엄마랑 아빠 덕에 살았다고, 저한테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카눌레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적대적인 시선에 둘러싸여 지냈다. 악마의 눈이라고 불리는 적안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련회가 끝날 때쯤엔 달랐다. 그는 많은 주민들과 힘을 합쳐 마을의 복구를 도왔고, 이내 감사 인사를 받으며 돌아왔다.
내게도 그때 일은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당사자인 카눌레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랬구나.”
아빠가 씁쓸하게 웃었다.
낯빛이 어두워 보여서 나는 이때다 하고 아껴뒀던 얘기를 늘어놓았다.
“맞아요!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우리 기사단 사람들, 플뢰데 후작가의 카미, 여기 살고 있는 라일리랑 코우가도 다 알걸요.”
“하지만 갈레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거겠지. 너희에게도 진작 얘기해 줬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아빠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카눌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을 설득해 볼까요?”
그는 고개를 기울인 채 다리를 꼬고 있었다.
그 시건방진 태도와 차가운 눈빛을 보니 어쩌면 설득이라는 것도 말뿐이고 ‘그냥 잡아다가 어디에 가둬둘까요?’ 정도의 의미로 보였다.
물론 내 색안경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카눌레도 갈레트를 적으로 둔 현 상황이 부담스럽긴 매한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과거에 대한 미련 때문이거나.
“아니. 그 애가 직접 내린 결정이니까.”
하지만 아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나는 갈레트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너한텐 네 생각이 있고, 나한텐 내 생각이 있는데.’
각자의 생각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했던가.
“어쨌든 둘 다 훌륭하게 성장해 주어 고맙구나. 이번 일에 대해선 전적으로 너희의 의견을 따르마. 일이 잘 마무리되면 나는 자리에서 물러나도 되겠어.”
아빠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크흠!”
닭살 돋는 분위기를 못 견뎌 하는 카눌레가 헛기침을 하고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아펠 태자의 소문은 어떻게 퍼뜨릴 건데? 생각해 둔 게 있는 거지?”
“아, 응.”
잠깐 대화에서 물러나 있던 내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물론 지금 우리 중에 사교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문을 퍼뜨릴 방법조차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카눌레를 보며 답했다.
“젤라토 오빠의 장례식에 갈 거야.”
【 그날 】
“…도착한 거죠?”
“너무 조용한데.”
내 물음에 카눌레가 부언했다.
내가 도착을 의심한 이유도 같았다.
바니유 공작가의 후계로 알려진 젤라토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동해 온 바니유 공작가의 이동 장치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오늘 방문하겠다고 미리 서신까지 보냈는데.
“일단 나갈까요?”
“제가 먼저 갈게요.”
내가 파타슈를 가로막았다.
키슈와 몽블랑에게 내려져 있는 수배령 때문에 장례식에 올 수 있었던 건 파타슈와 카눌레, 그리고 나뿐이었다.
만일 파타슈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와 카눌레 둘만으로는 이동 포트를 작동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먼저 가긴 어딜 가? 검도 없으면서 무슨.”
카눌레가 쯧, 혀를 차고는 날 옆으로 밀어냈다.
잠깐 비틀한 내가 금방 다리에 힘을 주고 단단히 섰다.
“하지만 나한텐 마법이 안 통하잖아! 아펠이나 갈레트 오빠는 마법을 잘 쓰니까…….”
“시끄러.”
카눌레가 한 손으로는 귀를 막고 다른 손으로는 검 손잡이를 쥐었다.
카눌레와 나는 거의 어깨싸움을 하듯 서로를 밀치며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은 두 명이 동시에 통과하기엔 좁았다.
“내가…….”
내가 먼저 손잡이를 돌리려 손을 뻗은 순간 저절로 문이 열렸다.
“왔구나?”
“언니!”
건너편에 있던 에클레어가 문을 열어준 것이었다. 나는 반가움에 못 이겨 긴장을 놓았다가 카눌레의 어깨에 밀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중심을 잃었다.
“끄악!”
“철 좀 듭시다, 두 분.”
파타슈가 가볍게 타박하며 내 반대쪽 어깨를 받쳐주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우리를 바라보던 에클레어가 이내 키득거리며 웃었다.
“다들 별일 없어 보이니 다행이네. 가자. 식장은 저쪽이야.”
에클레어가 앞장섰다. 나는 안내를 따라 걸으며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흑단처럼 까만 머리칼은 수분이 빠져 건조했고 몸은 평소보다 말라 보였다. 자택임에도 그녀의 허리춤에는 검이 매달려 있었으며, 입고 있는 옷 역시 검을 휘두르기에 불편함 없는 바지 차림이었다.
그리고…….
“셋만 온 거야?”
“응? 응. 서신 했었는데…….”
내가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에클레어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갈레트는?”
존칭도 생략된 이름이었다.
나는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입술 안쪽을 씹었다.
“…미안해.”
바니유 공작의 정보력과 통찰력이라면 갈레트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금방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고 사과부터 했다. 에클레어는 대답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덜컥 겁을 먹기엔 충분한 태도였다. 당장이라도 날 탓하며 검을 휘두르거나 저택 곳곳에 숨어 있던 황실 기사단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겁보다 걱정이 앞섰다.
“혹시, 눈도 그날 다친 거야?”
그건 에클레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내가 걸음을 떼지 않고 묻자 에클레어가 힐끗 날 돌아보았다. 그녀의 오른쪽 눈에는 까만색 천으로 된 안대가 씌워져 있었다.
“언니.”
“이제 됐어. 아프지도 않고.”
재차 그녀를 불러 대답을 재촉한 다음에야 답이 돌아왔다. 에클레어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고 다시 발을 옮겼다.
“일단 가요.”
파타슈가 날 위로하듯 등을 토닥이고 앞서갔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바지런히 움직였다.
‘저희들 사이에선 몽블랑 후작님이 어디로 향했는지보다 바니유 공작님이 어떤 처벌을 받을지가 더 큰 화젯거리니까요.’
나는 크렘이 들려준 말을 떠올리며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걸었다.
공작 직위를 박탈당할 거라는 얘기도 있고, 전부 처형될 거라는 얘기도 있고… 라고 했던가.
그 때문인지 주변엔 사람이 드물었다.
이제 보니 조용한 게 당연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문객이라고는 우리 셋밖에 없었으니까.
“아가씨.”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녀 한 명이 다가와 에클레어에게 뭔가 귀엣말을 했다. 말소리가 워낙 작아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뭐?!”
별안간 언성을 높인 에클레어가 갑자기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나는 어리벙벙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카눌레가 에클레어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가, 같이 가!”
나도 허둥지둥 치맛자락을 모아 쥐고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