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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33)화 (133/181)
  • 133화 

    “몽블랑은 뭐, 워낙 대단한 집안의 아드님이시니 이런 간단한 요리도 할 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키슈의 투덜거림을 마저 들으며 나는 시선을 내렸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직접 요리한 것을 먹다니.

    에이미가 디저트를 준비해 줬던 것을 빼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내 생일을 착각한 에클레어가 밤늦게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준 것 정도 있었으려나?

    물론 그때의 에클레어는 아직 어린애라…….

    ‘직접 만들었어?’

    ‘늦은 시간이라 일손이 없다고 하더라고. 우리 오빠가 좀 도와줬어.’

    “…….”

    당시의 대화를 떠올리자 손에 힘이 빠졌다.

    키슈가 내 낯빛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왜 비밀로 하셨어요? 제가 억지로 크레페 님을 제자 삼을까 봐 걱정하신 거예요?”

    “네?”

    무슨 말인가 싶어 되묻자 키슈가 소리 내어 웃었다.

    “옛날 기억 안 나세요? 갈레트 님이랑 같이 마법 배우기로 약속해 놓고 저한텐 비밀로 했다면서요. 제가 마탑으로 납치할지도 모른다고.”

    “아하하.”

    그랬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옛날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문밖에서 엄마가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나는 조금 기운을 차리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아무튼 이쪽은 별문제 없었어요. 여기에 계신 기사분들도 다 정예뿐이었는걸요. 물론 저도 도왔고요. 쉬제트 백작님의 지휘력은 또 어찌나 대단했는지!”

    키슈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직 뒷수습이 남은 걸 보면 피해가 없진 않은 모양이었지만 분명 완전한 빈말도 아닐 것이다.

    아빠가 검을 빼 든 모습을 직접 본 적 없는 나지만 이제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저는 오히려 크레페 님이 더 걱정이라니까요?”

    “…저요?”

    입 안에 남은 음식을 삼키느라 대답이 조금 늦었다.

    키슈가 내 왼쪽 손목을, 정확히는 아펠이 준 팔찌 위를 감싸 쥐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몸에 겉도는 마나를 흡수 없이 바로 사용하신다면서요.”

    그녀의 시선에 위압감을 느낀 내가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슈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마나 고갈의 전조 증상이 따로 없을 텐데,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나를 쓰면 어떻게 될지… 크레페 님도 알고 있죠?”

    “…….”

    이번에 내가 기절한 건 마나 고갈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마나를 한꺼번에, 많은 양을 접해 생긴 멀미와 현기증 때문이었다.

    그렇게 확신한 이유는 간단했다.

    많은 마나를 써서 기절한 경우, 나는 그런 메슥거림을 느낄 틈조차 없이 픽 쓰러져 버리니까.

    그런 식으로 정신을 잃은 건 단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도 그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전조 증상 없이 기절할 수 있다는 건…….

    달리 말해, 아무 전조 증상 없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

    “파타슈한테 들었어요. 브라우니를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공간 이동 마법에까지 힘을 보태셨다면서요.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키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녀의 걱정을 눈치채지 못한 척 내 할 말을 꺼냈다.

    “파타슈 님은 괜찮아요?”

    “진작 일어났죠. 그 애도 꽤나 무리한 것 같긴 했지만요.”

    진작 일어났다는 말은 그 역시 혼절했었다는 의미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본 파타슈의 모습을 떠올렸다.

    밝은 황갈색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고 그는 눈을 찌르는 머리끝을 정리할 틈도 없이 집중해야 했다. 이리저리 뻗어 나가려는 마나를 어떻게든 제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원작에서 대마법사 소리를 듣는 인재였지만 그것도 성인이 된 이후의 일이었다. 아마 나와 몽블랑이 돕지 않았다면 이곳까지 공간 이동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했을지 몰랐다.

    황실에서 나온 기사들을 견제하는 데도 많은 마나가 필요했을 테고, 심지어 이 요새에는 공간 이동에 쓰이는 보조 장치조차 없었으니까.

    원래 포트나 리시버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공간 이동엔 마법사 두 명이 필요했다.

    파타슈는 보조 장치가 있다면 혼자서도 공간 이동 마법을 쓸 수 있었지만, 그건 그의 마나가 페가수스를 부화시킬 수 있을 만큼 고순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아펠 이놈이 문제다.

    혼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고 다니니 공간 이동이 너무 쉬워 보이잖아.

    나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한탄하며 그릇을 침대 옆 협탁에 내려놓았다.

    “벌써 다 드셨어요?”

    “네, 가능하면 빨리 다음 일을 얘기하고 싶거든요.”

    “…네, 그래요.”

    키슈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 *

    내가 아무도 없는 접대실에 앉아 창문 너머를 보고 있는 동안, 키슈가 사람들을 데려왔다.

    “오셨어요?”

    아빠와 몽블랑, 카눌레와 파타슈까지.

    내가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쭈, 네가 여기 주인 같다?”

    카눌레가 톡 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게.”

    나도 적절히 대답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차후의 계획을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는 듯했으니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젤라토의 소식을 듣자마자 몽블랑을 되찾아 오자고 말한 것도, 작전을 세우고 실행을 주도한 것도 나였다.

    거센 반대 의사를 표한 사람이 없었기에 가능했겠지만, 아무튼 나는 모든 이의 시선이 내게 향해 있는 것을 눈치채고 말문을 뗐다.

    “아펠이 황제를 죽였다는 소문을 퍼뜨릴 거예요.”

    내 말이 끝나자 잠시간의 침묵 후에 몽블랑이 입을 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몽블랑은 내가 무슨 결심을 했는지 금세 깨달은 듯했다.

    크렘에게 들은 바로, 아펠이 황제를 죽인 것 아닐까 하는 추측은 이미 귀족들 사이에 뜬소문처럼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다.

    똑같은 소문을 내봤자 아펠에게 타격이 갈 리 없었다. 하지만 거기에 황제 시해 동기가 포함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설마, 아펠이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을 같이 퍼뜨리려고요?”

    몽블랑의 뒤를 이어 키슈도 내 말뜻을 파악했다.

    “뭣?!”

    카눌레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와 함께 놀라줄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카눌레는 뒤늦게 우리 눈치를 살피고는 이내 민망해진 듯 얼굴을 구기며 도로 앉았다.

    나는 그의 체면이 더 망가지지 않도록 어색함을 못 느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펠의 동기가 들어가면 신빙성이 높아질 테니까요. 물론 아펠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없으니 위험하긴 매한가지겠지만…….”

    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 사람들의 안색을 살폈다.

    다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요?”

    내가 묻자 그들의 대표 격이라도 된 것처럼, 카눌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탁자를 툭 쳤다.

    “태자, 아니, 플럼을 배신하겠다는 소리야?”

    “풉, 배신?”

    그 단어를 듣자 웃음부터 나왔다.

    카눌레가 눈썹을 찡긋하고 말했다.

    “너도 알 거 아냐. 너한텐 수배령도 안 내려왔고 아직까지 쉬제트가가 받은 피해도 없어. 그게 무슨 뜻이겠냐고.”

    무슨 뜻이긴.

    나는 정답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카눌레도 대답을 바라진 않았다는 듯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인기 많아서 좋겠다? 어렸을 때부터 얼굴만 밝히더라니, 결국 세계관 대표 미남인 황태자 전하를 사로잡았구나! 이 상황에서도 너랑 결혼하고 싶으시다니 대체 네 매력의 끝은 어디까지길래!”

    그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몇 년 전에 사람들 앞에서 세계관 대표 미남이라는, 거창하면서도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던 스스로가 떠올라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걸 내색하면 카눌레만 좋겠지.

    “새삼스럽게.”

    내가 뻔뻔스레 대꾸하자 그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러고는 곧바로 아빠를 보며 다그쳤다.

    “쟤 저렇게 뻔뻔하게 놔둘 거예요?”

    “응? 아, 아니…….”

    별안간 타깃이 된 아빠가 말을 더듬고는 얼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크레페, 너 원래 그런 성격이었니?”

    “…뭐, 아무튼.”

    내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솔직히 그동안은 상황에 휩쓸려 다닌 감이 없잖아 있어요. 하지만 이대로 눈감아 주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될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내가 몽블랑을 쳐다보았다.

    “바니유 공작가의 영식, 젤라토 님이 독살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긴 들었나요?”

    “독살이라고요?”

    몽블랑이 놀란 표정으로 제 옆에 앉은 키슈를 돌아보았다.

    반응을 보니 부고는 들었어도 사인에 대해선 몰랐던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설명했다.

    “물론 암살자의 우선 목표는 후작님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 무기로 독을 선택한 걸 보면, 암살에 성공하기 위해 다소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것 아니겠어요?”

    담담히 이어지던 말이 끝에 가선 날카로워졌다.

    그래, 처음엔 암살자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몽블랑이 숨은 곳을 귀족들에게 알리려고 소란을 피운 것이었겠지’ 하는 식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내 낙관적인 희망일 뿐이었다.

    애초부터 아펠은 한 치도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오직 나와의 행복만을 위해.

    “저는 더 못 봐줘요.”

    내가 단호히 잘라 말했다.

    더 이상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그동안은 그저 잊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저울질해야 했던 건 몽블랑 한 명의 목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 상태로 발을 뺀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

    내가 강하게 나서자 접대실이 적막해졌다.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카눌레였다.

    “갈레트 형은?”

    내가 그쪽을 쳐다보자 카눌레가 이때다 싶었는지 곧바로 질문을 쏟아냈다.

    “형한텐 뭐라고 할 건데? 설득할 거야? 아니, 애초에 왜 그쪽 편에 붙은 거래? 저번에 봤을 때만 해도 너랑 같은 편인 것 같더니.”

    “…….”

    그러고 보니 아직 말하지 못했구나.

    어째서 갈레트가 아펠의 편에 서기를 선택했는지.

    “그러니까요. 설마 갈레트 님께서 그런 결정을 하실 줄은…….”

    이유를 모르긴 마찬가지였던 파타슈가 거들었다.

    나는 그가 새삼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저도 놀랐어요. 누가 날 배신한다면 분명 카눌레 오빠일 줄 알았는데. 완전 방심하다 뒤통수 맞은 꼴이지 뭐.”

    “왜 하필 나야?”

    카눌레가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 어깨만 으쓱했다.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날 배신한 게 카눌레였기 때문이라고 해봤자 이제 와선 별 의미도 없었으니까.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신도 뭣도 아니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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