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막다른 골목에 몰린 개는 호랑이를 문다 】
변방에서 마법을 사용하면 몬스터들의 주의를 끌 수 있다.
갈레트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아마 뛰어난 마법사인 그가 황궁의 공간 이동 포트를 쓰지 않고 마차를 타고 온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 얼마 가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위험 부담이…….”
키슈가 말렸지만 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위험하긴 매한가지일 텐데요, 뭘. 게다가 이 마을엔 거주민이 있으니 그 사람들을 지키려면 병력도 많이 필요할 테고요.”
“…….”
아빠는 우리를 말리지도 응원하지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온 카눌레가 신발 끈을 조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우리도 다 성인인데 뭘 걱정해요?”
“저는 아직…….”
파타슈가 태클을 걸자마자 카눌레가 콧방귀를 뀌었다.
“열아홉이나 스물이나.”
그러나 파타슈는 발끈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놓고 말씨름을 하진 않았다.
어차피 이번 작전엔 나와 카눌레, 파타슈, 브라우니까지만 참여하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이제 와서 다툼을 일으켜 키슈의 걱정을 사봤자 좋을 게 없었다.
“시간을 끌면 더 위험해진다는 거 알죠? 부탁드릴게요.”
나는 마지막으로 키슈와 아빠를 번갈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슈가 한숨을 삼키고 지도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갈레트의 마차가 어디까지 갔을지 예상해 보는 것 같았는데, 그녀와 함께 마나를 주입해야 하는 파타슈도 그 옆에 서서 필요한 마나양을 물었다.
나는 계산을 그들에게 맡기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때 아빠가 입술을 뗐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니?”
‘후회 안 해?’
겨우 몇십 분 전에 들었던 카눌레의 목소리가 오버랩됐다.
이건 무슨 감정일까.
나는 순간 스친 기묘한 감상을 붙잡으려 했지만 끝내 그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몽블랑 후작이 누명을 썼다면서요.”
내가 대답을 미룬 사이, 옷을 털고 일어선 카눌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 없는 사람이 죽으러 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죠.”
그는 아빠에게서 받았던 검을 허리춤에 꽉 묶고 키슈와 파타슈를 향해 똑바로 섰다.
기사 지망생다운 대답이라고 해야 하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카눌레의 대답을 들은 아빠가 이번엔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아빠를 설득할 때 무엇보다 적합한 말을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우리가 명예를 지키는 방식이니까요.”
내가 눈을 접고 생긋거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자, 아빠는 내가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준비 다 됐어요!”
“네!”
그때 키슈가 좌표 계산을 끝내고 날 불렀다.
밝게 대답한 나는 파타슈와 키슈가 띄운 마법진 안에 서서 기절하지 않도록 정신을 곤두세웠다.
* * *
“히히힝!”
과연 저명한 마탑의 연구원 키슈는 단순 계산도 뛰어난 모양이었다.
나와 카눌레, 파타슈는 서행하던 마차 앞에 정확히 나타났다. 마차를 이끌던 말이 깜짝 놀라 앞발을 치켜들었고 카눌레는 검을 빼 들며 그 앞을 막아섰다.
“이, 이게 무슨!”
마부가 당황한 듯 고삐를 짧게 쥐었다. 장식으로 붙어 있는 쉬제트가의 인장을 보니 분명 아까 떠난 갈레트의 마차가 분명했다.
그때 마차 주위를 지키던 기사 네 명이 우리를 둘러쌌다.
“칼을 거두시…….”
“미쳤어?!”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며 갈레트가 상체를 내밀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변방에서 마법을…….”
그 순간 파타슈가 갈레트를 향해 날카로운 바람을 쏘았다. 녹인 황금으로 자아낸 듯한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갈레트의 뺨에 가느다란 자국이 남았다. 화살에 스친 것 같은 상처였다.
“…….”
갈레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몽블랑 후작의 신변을 넘기시지요.”
카눌레가 무뚝뚝하게 말하며 갈레트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그리고 파타슈는 주변 기사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그들의 발치에 바람으로 된 방벽을 만들었다. 기사들을 태운 군마들은 코앞의 압력에 놀라 허둥지둥하거나 뒷걸음질을 쳤다.
기사 중 제일 앞으로 나와 있던 남자가 갈레트를 곁눈질했다. 허가만 떨어지면 곧바로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하지만 갈레트는 그들 대신 우리를 향해 말했다.
“마법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군요. 변방에 거주하는 이들의 목숨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변방은 아빠랑 키슈 님이 지켜줄 테니까.”
내가 아빠 얘기를 꺼내자 카눌레나 파타슈에게 존댓말로 거리를 두던 갈레트가 내게 잠시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여유롭게 마차의 발 받침대를 딛고 가도로 내려왔다. 갈레트의 걸음에 따라 등자색 귀걸이가 흔들렸고, 그를 향해 겨누어진 카눌레의 검 끝도 움직였다.
“키슈 님이라는 건 수배범 키슈 로렌을 말하는 거겠지?”
갈레트가 뻔히 아는 사실을 물었다.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 선을 긋기 위해서든 협박하기 위해서든, 썩 불쾌한 태도였다.
파타슈도 그 의도를 느낀 듯 눈썹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말씨름을 해봤자 불리한 건 우리 쪽이었다.
나는 품에 안고 있던 브라우니의 마갑 잠금을 푼 후, 녀석을 내려놓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바닥에 단단히 선 채 갈레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펠에게 전해줘. 나는…….”
그 순간 변방 쪽에서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몇몇 기사들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진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내가 팔찌에 손을 올렸다.
“역시 너 하나만으로는 안 된다고.”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브라우니를 향해 마나를 불어넣었다. 브라우니가 제 움직임을 옥죄고 있던 마갑을 털어내며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페가수스의 존재를 몰랐던 기사들이 당황한 틈을 타 파타슈가 바람 방벽을 거두고 갈레트의 정면을 노렸다.
태풍처럼 거센 바람이 불어닥치자 갈레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빠!”
갈레트를 향해 서 있던 카눌레가 내 외침을 듣고 곧바로 몸을 돌려 기사들을 견제했다.
나는 성장한 브라우니를 바람막이로 삼아 마차로 향했다. 팔찌의 힘을 빌린 상태였기에 나는 평소의 나보다도 잽싼 몸놀림으로 달려가 마차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나와요!”
“크레페!”
갈레트의 외침과 동시에 호박색 마법진이 전개됐다. 브라우니는 당황한 몽블랑의 목덜미를 이빨로 잡아챘고, 나는 두 팔을 벌려 브라우니와 몽블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레페 님!”
파타슈가 놀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갈레트의 마법은 분명 공격형이었다. 막 벼려낸 바늘처럼 날카로운 가시들이 빼곡히 내 몸 주위를 둘러쌌다.
하지만 그것들은 내 몸에 닿지 못하고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푸릉!”
브라우니가 콧바람을 내쉬며 머리로 나를 밀어 파타슈 곁으로 보냈다.
갈레트가 입술을 꾹 다물고 재차 손을 치켜들었다. 아직 허공에 남아 있는 자신의 마나를 파타슈의 것과 융합해 나를 기절시키려는 것 같았다.
황궁에서 그랬듯이.
“지, 지금 그건 대체…….”
“설명할 때냐?!”
카눌레가 날 대신해 호통쳤다. 나는 미리 계산해 놓은 수식을 펼치고 짧게 외쳤다.
“됐어요!”
“예, 예!”
파타슈가 급히 대답하고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브라우니와 몽블랑, 카눌레가 우리를 중심으로 한데 모였다.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속눈썹에 맺혔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섞인 마나는 세 명분이고, 공간 이동 마법을 쓸 때 필요한 마나양은 막대한 수준이었다.
마나의 충돌로 속은 울렁거렸고 눈앞은 현기증이 난 것처럼 희끄무레해졌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의식이 흐려진 그때, 몽블랑이 나를 부축하며 자신의 마나를 보탰다.
“…갑시다.”
* * *
돌아오자마자 기절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돌아오는 길에 기절했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인지 따질 필요 없이 내가 눈을 떴을 땐 이미 상황이 마무리된 후인 것 같았다.
어둑한 천장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끄응.”
숙취를 앓듯 뻐근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창밖을 보니 밖에선 이미 재건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래도 기사 수련회로 왔을 때만큼 심하게 무너진 곳은 없는 걸 보니 키슈와 아빠가 몬스터들의 난동을 잘 방어해 준 모양이었다.
“아, 마침 일어나 계시네요?”
키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팔에는 작은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그 위에 그릇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니 내 저녁 식사를 챙겨 온 모양이었다.
창가에 서 있던 내가 다시 침대에 앉으러 돌아가려는 찰나 뭔가가 발등에 걸렸다.
흘러내린 이불 끝자락을 궁둥이 밑에 깔고 곤히 잠들어 있던 브라우니였다.
“삐윳?!”
녀석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가 곧바로 폭삭 쓰러졌다. 다시 덮어씌운 마갑이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었다.
“삐이…….”
“에구, 고마워. 오늘 고생했어.”
나는 잠깐 쪼그려 앉아 브라우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공치사를 해주었다.
물론 기특하다면서 마갑을 풀어준다거나 할 순 없었지만.
“크레페 님이야말로 고생 많으셨어요.”
키슈가 미소 지으며 트레이를 내밀었다.
나는 곧바로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트레이 위에 있던 그릇과 숟가락을 들었다.
“감사합니다. 직접 오실 필요는 없었을 텐데…….”
“별말씀을요.”
키슈가 가볍게 대답하며 침대맡에 놓인 스툴에 앉았다. 쟁반을 협탁에 내려 둔 것을 보니 내게 할 말이 남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릇에 담긴 것은 오트밀로 만든 포리지였다. 알갱이 하나 없이 갈아낸 죽.
환자식의 일종이었는데, 기절한 나를 위해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변방이라 재료를 아끼려 한 건지 맛이 영 싱거웠다.
생긴 것만 보면 플뢰데 후작가에서 먹은 디저트랑 비슷한데.
라즈베리 소스를 끼얹어 먹는, 은은한 단맛의…….
“이름이 뭐더라?”
포리지를 먹다 말고 디저트를 떠올린 내가 혼잣말을 웅얼거렸다.
“네? 포리지 말인가요?”
키슈의 목소리가 날 잡념에서 일깨웠다.
“아, 네, 네. 포리지요, 하하… 맛있네요.”
포리지 때문에 나온 리액션은 아니었지만 곧이곧대로 말하기엔 민망했다.
내가 대충 둘러대며 얼버무리자 키슈가 싱긋 웃었다.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직접 만든 거거든요.”
“키슈 님께서요?”
“다들 바쁘니까요.”
키슈가 짧게 말하곤 창문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마나 파동을 감지한 몬스터를 막는 것까지는 저도 도왔지만, 마을 사람들 앞에까지 모습을 드러내기엔 아직 걱정이 돼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충분히 그럴 만했다. 그녀는 수배범 신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