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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31)화 (131/181)
  • 131화 

    그건 꼭 협박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갈레트의 표정은 협박하는 사람처럼 야비하지도 않았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 내용이라는 것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불과했다.

    그때, 내 뒤에 있던 건물에서 사람이 내려왔다.

    “이제 됐습니다.”

    냉혹하게 느껴질 만큼 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

    뛰어난 마법사라는 사실보다도 혼인을 포기하고 마법 서약을 택한 고위 귀족이라는 사실로 더 유명한 남자.

    노인의 상징과 같은 흰색 머리카락의 소유자이면서도 얼굴은 이십여 년 전 그대로인, 몽블랑 몬테 비안코.

    그는 느릿하게, 하지만 당당하게 걸어 갈레트의 앞에 섰다.

    “더 이상 일이 커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갈레트 님을 따라간다면 태자 전하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갈레트가 웃음으로 답했다. 몽블랑의 앞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얼굴이었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몽블랑에게 말을 붙이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카눌레가 내 팔을 잡아 내리고, 갈레트를 향해 입술을 뗐다.

    “후회 안 해?”

    “…….”

    카눌레의 등에 가려서 나는 갈레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갈레트는 특별한 대꾸 없이 몽블랑을 마차에 태우고 저도 올라탔다.

    곧바로 출발한 마차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나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마차의 바큇자국을 따라 몇 걸음 걸었다.

    하지만 내가 본부의 공터를 채 가로지르기도 전에, 누군가 내 팔을 붙잡았다.

    “크레페, 올라가자.”

    아빠가 담담히 말했다.

    * * *

    잠에서 막 깨어난 듯 멍한 기분이었다. 나는 아빠에게 이끌려 접대실로 돌아갔다.

    키슈는 침울해 보였고 파타슈는 무거운 표정이었으며 파타슈의 품에 안긴 브라우니도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마 브라우니가 그래 보이는 이유는 몽블랑과 관련 없겠지만.

    “…오셨어요.”

    키슈가 카눌레를 향해 짧게 인사했다. 파타슈도 고갯짓으로 가벼운 예를 표했다.

    그간 사건이 많았기에 그들은 카눌레와 제법 오랜만에 만난 셈이었다.

    그러니만큼 방금 약례는 이 상황에 별로 안 어울리는 예법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카눌레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 카눌레는 곧바로 파타슈의 맞은편에 앉아 한쪽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리고 껄렁하게 물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랍니까?”

    “…….”

    그때 아빠가 손날을 세워 카눌레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악.”

    “카눌레, 못 본 사이에 버릇이 없어졌구나.”

    나는 순간 상황을 잊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건 파타슈도 마찬가지였던 듯 잠깐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카눌레가 머리를 문지르는 동안 나와 아빠가 그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크흠.”

    내가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끌었다. 이미 상황이 종료됐다고 생각한 듯 침울해져 있던 키슈가 날 쳐다보았다.

    ‘상황이 종료됐다.’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몽블랑의 생각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한 번 목숨을 포기한 적 있었지만, 이번엔 그때의 체념과는 결이 달랐다.

    황비의 사망이 황제의 사망으로까지 이어졌다. 증거는 여전히 조작되고 있었고 바니유 공작가가 휘말린 것도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아마 오늘 몽블랑이 그대로 도주했다면 나와 아빠까지 위험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몽블랑이 아펠과 직접 만나 얘기할 수 있는지 물어본 것도 ‘자신 외의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해달라’는 정도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어쨌든, 몽블랑은 이미 제 발로 황궁의 마차에 올라탄 상태였다. 이제 와서 무슨 작전을 세워봤자 이 상황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순 없을 테다.

    그래도 들을 건 들어야지.

    “우선 말씀을 좀 해주시겠어요? 제가 루아 요새에서 아펠과 함께 황궁으로 떠난 다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

    키슈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내용은 거의 내가 예상한 대로의, 또는 크렘을 통해 들은 적 있는 것이었다.

    물론 카눌레는 처음 접하는 얘기겠지만.

    “바니유 공작가에 암살자가요?!”

    “네에.”

    원래도 카눌레는 사교계나 정치에 관련된 소식, 뒷공작 등등에 어두운 편이었다.

    그러니 나와 갈레트가 바니유 공작가의 신세를 지고 있다는 걸 들은 다음에도, 꼬투리를 잡힐까 하는 걱정에 따로 공작가 소식을 찾아보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공작님을 노린 거예요?”

    카눌레가 다시 질문했다. 하지만 탐탁잖아 하는 표정을 보니 그도 정답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키슈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암살자가 대(對) 마법사용 무구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어요. 꼭 공작가에 마법사가 머무는 걸 아는 사람처럼요.”

    “역시 갈레트 오빠가 알려준 거군요. 몽블랑 후작님이 그곳에 있다는 것도, 파타슈와 공작님이 그날 자리를 비우리라는 것도.”

    아마 그 암살자의 목표는 처음부터 몽블랑을 암살하는 것이었거나, 또는 몽블랑이 그곳에 몸을 숨겼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 몽블랑 외의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진 않았겠지?

    그제야 나는 한시름 놓은 심정으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키슈는 나나 카눌레, 아빠를 배려해서인지 그 이상 갈레트에 대한 말을 하진 않았다. 대신 그녀는 파타슈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파타슈가 돌아온 거예요. 젤라토 님의 주도와 세 명이나 되는 마법 인력 덕분에 곧바로 포트를 작동시켜 이곳 변방으로 올 수 있었고요.”

    지금 파타슈는 키슈보다 키가 컸다. 옛날이었다면 그녀의 손바닥에 머리가 눌린 파타슈가 마냥 귀엽게 보였을 테지만, 나는 이제 파타슈보다 키슈에게 더 시선이 갔다.

    팔 아프겠다.

    “…크레페 님의 빠른 판단 덕분이었죠.”

    파타슈가 느지막이 입을 열어 내게 공을 돌렸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갈레트의 배신을 알게 된 날 파타슈도 함께 있었다. 아무래도 파타슈는 그날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키슈가 파타슈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무튼!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내가 파타슈를 빨리 되돌려 보낸 덕분에 이들이 여기로 피신할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그들이 무사한 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 발로 떠난 몽블랑이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그 암살자는 놓친 겁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아빠가 짧게 물었다.

    하지만 키슈는 사태가 진정되기 전에 도망쳐서 이후 상황을 모르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기색이기에 내가 대신 답변했다.

    “암살자는 임무에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대요. 누가 보낸 건지는 영영 알 수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크렘에게서 들었던 얘기를 읊자 키슈가 말을 흐렸다.

    “네에. 암살자를 보낸 사람이 아펠이라는 증언만 얻었다면 돌파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나는 동아줄을 놓친 기분에 덩달아 심란해졌다.

    …아니, 잠깐.

    “아빠는 그동안 이런 얘기도 안 듣고 수배범을 숨겨주고 있던 거예요?”

    나나 카눌레는 그간의 소식을 몰랐을 수도 있지만 아빠는 이들을 벌써 며칠째 숨겨주고 있던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은 위화감이 들어 질문하자 아빠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뭐, 나야 후작님과 친분도 있었고, 수플레나 네가 키슈 님과 인연이 있었으니…….”

    “사람이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반사적으로 외쳤다. 순간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내게 꽂혔다.

    그, 그래.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 덕분에 다들 무사했던 거니까.

    뒤늦게 냉정을 되찾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빠가 피식 웃었다.

    “이곳의 기사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하지만 나도 아무 생각 안 했던 건 아니야. 그 후에 카눌레랑은 연락을 했으니까.”

    “오빠랑요?”

    “잊어버렸냐? 너랑 형이 갑자기 사라진 바람에 내가 영주 업무를 다 처리하고 있었잖아. 그래도 정식 영주는 아빠니까 보름에 한 번 중요 사항을 보고하고 있었지.”

    “…아하.”

    통신구를 이용해 보름에 한 번씩 아빠랑 연락하기.

    그러고 보니 그건 엄마가 영주 대리를 하고 있을 때부터 에이미, 나에 이르기까지 유지되어 온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뭐, 일단 일어나죠.”

    카눌레가 퉁명스럽게 대답하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바니유 공작가에도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으니까.”

    갑자기 리더라도 된 듯 행동하는 카눌레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의 말에 잘못된 점은 없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일어났다. 물론 통신구가 있는 방까지 안내하는 건 아빠의 몫이었지만.

    “오랜만에 연락해서 이런 소식을 전해야 한다니,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공작님께서도 많이 힘써 주셨는데.”

    키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변방으로 도망친 이후엔 한 번도 공작가와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괜히 통신 추적을 당하면 피차 곤란해질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마음이 무겁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애초부터 바니유 공작을 끌어들인 건 나와 갈레트였으니까. 그런데…….

    “자, 바니유 공작가의 좌표야.”

    통신실에 들어선 아빠가 좌표 책을 뒤적여 연결할 번호를 찾았다. 내가 통신구를 조작해 번호를 맞추고 숨을 골랐다.

    - …누구시죠?

    심하게 잠겨 있어서 못 알아들을 뻔했지만, 그건 분명 에클레어의 목소리였다.

    최대한 아무 일 아닌 것처럼. 너무 걱정 사지 않도록.

    내가 그렇게 되뇌며 답했다.

    “언니, 나야!”

    - 크레페?

    그리고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걱정하던 키슈의 고민은 불필요한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우리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에클레어의 말이 먼저 들려왔으니까.

    - 그 새끼 데려와.

    “으, 응?”

    - 아펠, 내가 직접 모가지를 따버려야겠으니까.

    “무슨 일 있어?”

    통신구를 사용하면 상대방의 목소리는 들리지만 모습까지 보이진 않았다. 나는 혹시 에클레어의 한 마디, 한 글자를 놓치기라도 할까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때 문소리가 들렸다. 에클레어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 아가씨, 장례 준비를 마저 하셔야죠.

    장례?

    “설마…….”

    참지 못한 중얼거림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에클레어는 대답이라기보다는 누군가를 타이르거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젤라토 오빠가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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