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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30)화 (130/181)

130화 

바니유 공작가에 머물 때 몽블랑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도 몽블랑은 아펠의 비밀을 알고 있었는데, 왜 그에 관한 소문을 퍼뜨려 직접 그를 폐위시키지 않았냐고.

그때 몽블랑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웃 나라인 바움쿠헨에서 그 정보를 이용해 전쟁을 일으킬까 봐 그랬다는 말이었다.

몽블랑의 소예언서에서, 그는 왕당파 귀족으로서 아펠이 직접 황태자 위에서 물러나길 바랐다고 한다. 황태자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가 알려진다면 타국에서는 앞다투어 슈트루델의 정치판에 끼어들려 할 테니까.

하지만 아펠은 자신의 약점이 되는 약혼녀, 크레페까지 직접 해치우며 황제 자리에 올랐고, 아펠이 제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하려 한다는 소문이 돈 것과 동시에 슈트루델은 내전에 휩싸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몽블랑이 순순히 처형당하려 했던 것도 이해는 갔다.

명백한 증거가 없는데도, 일국의 후작이 태자의 명령에 따라 순순히 목숨을 내놓는다.

그건 그 자체로 강력한 황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아마 몽블랑이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면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물론, 그다음에 아펠이 얼마나 대단한 폭군이 되었을지는 별개였지만.

아무튼 시대 상황을 막론하고 전쟁은 많은 희생을 동반하는 악이었다. 그걸 막기 위해 제 목숨을 바칠 각오였던 몽블랑을 일방적으로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마 몽블랑이 지금 걱정하는 이유도 내가 전쟁의 빌미를 만들었을까 싶어서겠지.

“괜찮아요. 마탑 서약 때문에 얘기 못 한다고 했으니 그 이상 정보를 파헤칠 수는 없을 거예요. 바움쿠헨과의 전쟁을 걱정하는 거라면…….”

“후작님의 걱정은 그게 아닐 텐데요.”

파타슈가 정말 모르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네?”

“그래, 네 안전 말이야.”

아빠가 나지막하게 말하며 내 눈을 마주 보았다.

“그동안 네가 영지 일을 잘 처리해 준 것도 있고, 들려오는 소식도 좋은 얘기뿐이라 몰랐다. 네가 이렇게 무모한 일을 벌일 줄은.”

“죄송해요…….”

나는 다섯 살 난 어린애처럼 우물거리며 사과의 말을 꺼냈다.

그래, 내가 잘못되면 아빠의 미래도 불투명해질 게 뻔한데.

“하지만 크레페 님도 저희 모두를 위해 고군분투하신 거잖아요.”

키슈가 내 입장을 변호하며 어설프게 웃자 아빠와 몽블랑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보다가 이야기를 끝마쳤다.

“…아무튼, 제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

“…….”

“히움.”

이 상황이 절망적이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소식이 너무 스펙터클했기 때문인지,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브라우니만 내 팔 안에서 하품하곤 입맛을 다셨을 뿐.

“아, 오늘 카눌레 오빠가 오기로 했다면서요?”

내가 뒤늦게 떠오른 것을 질문했다.

아빠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잠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하늘에 뜬 태양을 보니 어느덧 한낮을 지나 오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래, 슬슬 도착할 때가 됐겠구나.”

“백작님, 쉬제트가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타이밍 좋게 기사가 찾아와 보고를 올렸다.

“제가 데려올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 * *

사실 나도 아직 몽블랑과 키슈에게 물어볼 게 남아 있었다. 갈레트가 아펠의 편으로 돌아선 후에, 내가 황궁에 머물렀을 때 발생한 일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카눌레가 함께 있을 때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카눌레 오…….”

정문 앞에 서 있던 내가 마차를 발견하고 입을 벙끗거렸다. 분명 마차에는 쉬제트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 느낌은 뭐지?

순간 이유 모를 꺼림칙함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뒷걸음을 쳤다.

그제야 깨달았다. 마차를 둘러싼 호위 기사들 중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덜컥.

마차 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갈레트가 태연히 걸어 나왔다.

“우리 동생이 마중을 다 나와 줬네!”

“…….”

“하하, 농담이야. 카눌레가 오는 날이었나 보지?”

대답은 못 하고 뒷걸음질만 치고 있는데 문득 아빠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분들과 함께 왔구나.”

아빠가 인사말 대신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창문으로 상황을 살피고 이상함을 느껴 직접 내려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조금 냉정을 되찾았다.

“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날이 겹친 건 우연이야. 덕분에 널 더 쉽게 찾았으니 카눌레한텐 고맙다고 해야겠다.”

“아니, 오빠가 왜 여기 있냐고! 플뢰데 후작가로 간 거 아니었어!?”

그 질문의 어디가 그렇게 우스웠던 건지 갈레트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쪽에 간 건 내 대리인이지. 내가 플뢰데 후작가로 간다는 정보를 흘리면 넌 분명 여기로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거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눈앞이 아찔한 게 순간 현기증이라도 일어난 기분이었다.

“왜, 내가 널 그렇게 모를 것 같았어?”

“갈레트.”

아빠가 나와 갈레트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내게만 말을 붙이던 갈레트가 그제야 그를 마주 보았다.

갈레트가 태어난 건 아빠가 스무 살 때였다.

언젠가 생각했듯 그들의 외모는 닮은 꼴이었기에, 두 명이 마주 보고 서자 마치 동일 인물이 먼 미래나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아빠.”

갈레트는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키나 외모는 분명 장성한 청년의 그것이었으나 ‘아빠’라는 호칭과 그 표정 때문에 나는 순간 그가 몇 살인지 잊고 말았다.

“그래, 오랜만이다. 이곳엔 어쩐 일로 왔지?”

아빠가 짐짓 부드럽게 물었다. 둘 다 살벌한 기색을 숨기고 있었기에 겉으로는 사이좋은 부자지간으로 보였지만, 분위기만큼은 살얼음판 같았다.

갈레트가 별안간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아빠에게 내밀었다.

“몽블랑 몬테 비안코 후작을 내어달라는 태자 전하의 명이십니다.”

내가 아니라 몽블랑 후작을 내어달라고?

나는 그 명을 직접 받은 아빠보다 더 긴장한 채 둘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을 보니 아펠은 이미 이곳에 몽블랑 후작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가 신고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갈레트의 추측을 공유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

시치미를 떼면 황명을 거부한 게 되고, 몽블랑의 신변을 넘기면 지금껏 수배범을 숨겨줬다는 사실이 들통나게 된다.

나는 아빠의 어깨 너머로 서신을 쳐다보았다. 문장 말미에는 분명 황족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왕당파 귀족이라는 분이 설마 황명을 거스르려는 건 아니죠?”

갈레트가 마치 약 올리려는 것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쉬제트가의 문양이 달린 두 번째 마차가 들어왔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짜증이 섞인 퉁명스러운 말투.

카눌레는 마차가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훌쩍 뛰어내렸다.

살벌하던 분위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카눌레는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듯 조금 얼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형이 여긴 웬일이야? 우리 가문 인장까지 달고. 아, 물론 ‘내가 우리 사랑스러운 동생을 보러 온 건데 다른 이유랄 게 뭐가 있겠어~?’ 같은 말은 하지 말고.”

카눌레가 중간에 갈레트의 성대모사까지 끼워가며 말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카눌레는 갈레트의 성대모사엔 재능이 없었다. 그는 갈레트와 전혀 닮지 않은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가 아무도 웃지 않는 것을 보고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카눌레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깨에 걸친 보온용 케이프가 팔을 따라 올라가며 껄렁한 차림새가 드러났다. 허리춤에는 아빠에게서 받았던 검이 매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카눌레는 갈레트가 내게서 등을 돌려 아펠 편에 섰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갈레트가 부드러운 어투로 물으며 그를 향해 섰다. 카눌레는 그 말투에 진저리를 치며 뒷걸음질하더니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민간인들은 관문에 가로막혀 이곳 중앙 본부로 들어오지 못했고 동행한 기사들은 눈치껏 건물 외곽으로 물러나 있었다. 목소리를 낮추면 우리 얘기가 안 들릴 거리이기도 했다.

어차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동행했을 리 없다고 생각한 듯 카눌레는 어깨를 으쓱하고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나야 아빠랑 영지 이야기를 하러 왔지. 그리고…….”

“몽블랑 후작에 대해서는 모르고 온 거겠지?”

“뭐?”

갈레트가 카눌레의 말을 끊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화제에 카눌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빠가… 아니.”

갈레트가 말하다 말고 픽 웃었다.

“프랄린 세자르 쉬제트 백작이 몽블랑 몬테 비안코 후작을 숨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왔습니다. 후작은 온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니 어서 그의 신병을 내어주시지요.”

갈레트는 카눌레 대신 아빠를 보며 말을 맺었다.

카눌레가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미친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레페를 도와준답시고…….”

아니, 아직 파악 못 했나 보다.

“카눌레 경. 저는 아펠 슈트루델 전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

갈레트가 선을 긋자 그제야 카눌레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갈레트는 내가 플뢰데 후작가를 빠져나와 변방으로 올 것까지 예측한 상태였다. 몽블랑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아마 당장 몽블랑을 추적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그 전에 피오르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든지, 내 신변을 먼저 확보하기 위해서라든지, 아니면…….

- 나는 엄마를 죽이기 위해 뒤에서 수작을 부린 바움쿠헨의 귀족보다, 코앞에서 엄마를 지키기를 포기한 두 사람이 더 싫어.

몽블랑과 아빠를 함께 엮어 복수하기 위해서라든지.

“…….”

내가 움찔거리며 발뒤꿈치를 땅에 문댔다. 아직 실내복에 실내화 차림이었기에 빨리 달리기는 힘들 것 같았다. 변방이니 팔찌를 발동할 수도 없고.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지? 다시 몽블랑을 도망치게 해? 파타슈나 키슈에게 신호를 보낼까?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아니, 도망치면 나아지긴 할까?

사실 애초부터 내가 아빠와 만나 상의하려 한 것도 이런 내용이었다.

아펠이 이미 저지른 일과 끝없이 커져만 가는 사건. 이제 나 혼자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기도 전에 갈레트가 날 찾아올 줄이야.

“크레페. 도망치려는 건 아니지? 그랬다간 어떻게 될지 너도 알잖아.”

내 신발 밑창에서 모래가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은 듯, 갈레트가 내게 상냥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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