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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9)화 (129/181)
  • 129화 

    아빠의 공적을 기뻐해야 마땅할 기사가 나를 안내해 주며 비쳤던 근심스러운 기색, 바니유 공작가에서 목격됐다는 말 이후로 소식이 두절된 몽블랑.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여기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거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방, 그것도 집무실에서 웃통을 까고 있을 건 뭔가.

    물을 때를 놓친 내가 머쓱하게 눈을 돌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몽블랑이 미소로 답하며 돌아섰다. 집무실 구석에 있던 갑옷 거치대 앞에서 잠깐 고민하던 그가 끙끙거리며 흉갑을 뒤집어썼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거기 있는 갑옷은 장식용인데요.”

    “…….”

    아무래도 몽블랑은 자신의 옷차림이 눈에 띈다고 생각해 갑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한 것 같았다.

    “크흠, 갑옷과 투구를 걸치면 저도 밖에 나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니나 다를까 몽블랑이 변명처럼 덧붙이고는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잠시 후에 쉬제트 백작이 오시면 따로 부탁드려야겠군요.”

    으음, 아무리 변방이어도 해가 쨍쨍한 낮에 투구까지 쓰고 나가면 오히려 눈에 띌 것 같은데.

    심지어 흉갑은 셔츠 위에 입는 거다.

    문득 그렇게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이 치솟았지만 나는 애써 참고 다른 질문을 꺼냈다.

    “등에 난 흉터는 저 때문에 다친 거죠?”

    “굳이 치유 마법사까지 부를 정도로 위험하지 않아 놔둔 것뿐입니다. 흉이 지는 것 정도는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몽블랑은 책상 위에 벗어놓았던 제 셔츠를 다시 걸치고 단추를 여몄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그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내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가 어린 나를 감쌌을 때 등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흉터를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몽블랑은 담담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조금 어색해졌다. 나는 망설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갈레트 오빠의 일은…….”

    알고 있을까? 알고 있겠지. 그럼 어떻게 생각할까?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니유 공작가에는? 키슈와 파타슈, 젤라토와 에클레어에게는?

    바니유 공작가에 암살자가 들었다는 말 이후로, 나는 제대로 그쪽 소식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워낙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을뿐더러 다른 귀족들도 바니유 공작가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궁금한 일이 많으시겠군요.”

    몽블랑이 말했다.

    내가 원한다면 그간 있었던 사건들을 모두 얘기해 주겠다는 듯한 어투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몽블랑은 대화를 바로 잇는 대신 내게 손짓하며 다른 말을 꺼냈다.

    “이왕이면 다들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문이 벌컥 열리며 오랜만에 보는 아빠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우, 여기 있었구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아빠가 뒤늦게 숨을 고르며 문을 닫았다.

    “접대실에 아무도 없길래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오랜만에 보는 딸한테 할 말이 그것뿐이에요?”

    반가운 얼굴을 보니 긴장감이 풀려 웃음이 나왔다.

    황제의 장례식이 얼마 전이었기 때문인지, 아빠는 수염 자국이 조금 나 있는 것만 빼면 멀끔한 차림이었다.

    변방의 업무를 하느라 장례식에 참석하진 못했어도 왕당파 귀족이니만큼 나름의 예우를 갖춘 것 같았다. 목깃에 검은색 백합 브로치가 달려 있는 것만 봐도 말이다.

    “하하, 그래, 크레페. 오랜만이구나.”

    아빠도 반갑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던 듯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눈가에 옅은 주름이 패었다.

    아빠 역시 어느덧 마흔을 훌쩍 넘겼을 테다. 여전히 미남이긴 했지만 그게 외모에 변함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약 때문인지 마법 때문인지 몽블랑과 키슈의 외모는 거의 그대로인데 아빠만 늙었네.

    나는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낯선 것 같기도 한 아빠의 얼굴을 조금 감상적으로 쳐다보았다.

    “크레페?”

    “에, 네.”

    딴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빠가 곧바로 우리를 향해 손짓하곤 다시 문을 열었다.

    “일단 내려가서 얘기하는 걸로 하지요.”

    * * *

    “무사하셨군요!”

    키슈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파타슈도, 말만 안 했을 뿐 같은 마음인 듯 얼굴에 순간 안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 두 명이 접대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들의 안부를 걱정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리에 앉기 전에 그들의 모습부터 살폈다.

    바니유 공작가에 암살자가 들었다기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눈에 보이는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는 듯했다.

    “크흠. 앉으시죠.”

    영지도 아닌 요새에서 혼자 객식구 세 명을 감당하고 있던 아빠가 손짓을 했다.

    몽블랑이 말한 ‘다들 모인 자리’라는 건 지금 이곳을 가리킨 거였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파타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파타슈가 있는 테이블 밑에서 뭉툭한 주둥이가 튀어나왔다.

    “삐유?”

    응? 이 익숙한 콧소리는…….

    “브라우니!”

    “삐익!”

    내 부름에 화답이라도 하듯, 파타슈의 다리 위에서 웅크리고 있던 브라우니가 번쩍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평소의 녀석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브라우니의 머리에 마갑이 씌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작은 브라우니에겐 맞지 않을 정도로 컸고, 심지어 무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브라우니가 그 무게에 못 이겨 당장이라도 고꾸라지지 않는 게 다행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동안 못 본 것 때문에 더 반가운지, 브라우니는 막 피어난 봄꽃처럼 해사해진 얼굴로 격렬하게 반응하며 내 품으로 돌진했다. 아니, 돌진하려 했다.

    “삑!”

    그러나 브라우니가 여느 때처럼 공기를 밟고 두둥실 떠 오려던 그 순간, 녀석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꼬마 아이처럼 폭삭 바닥으로 꺼졌다.

    녀석의 머리에 씌워진 마갑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브, 브라우니?”

    머리가 그렇게 무거웠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억제구 때문일 테니까.”

    파타슈가 태연한 얼굴로 브라우니를 번쩍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억제구요?”

    “이런 거 말이에요.”

    키슈가 자연스럽게 끼어들더니 쇳덩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내가 버리는 것을 잊고 그대로 들고 온, 플뢰데 후작가의 마력 억제구였다.

    물론 후작가의 인장이나 마법진 같은 건 내가 모두 지워낸 후였지만 키슈는 그 흔적으로 용도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여긴 변방이니까 브라우니가 함부로 마나를 써서 날아다니면 몬스터들의 주의를 끌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급하게 브라우니 전용 수갑을 만들었죠. 마구 제작은 제 전공이 아니라 많이 허술하긴 하지만요.”

    그래, 마나를 감지하는 몬스터들이 있으니 마법 물품을 쓰는 것도 엄금이라고 했었지. 확실히 브라우니를 가만히 놔두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

    “이런 건 피오르가 전문인데.”

    짧게 덧붙인 키슈가 손가락을 뻗어 브라우니의 투구를 톡 건드렸다. 말마따나 크기도 맞지 않는 허술한 마갑이었다. 아마 하네스처럼 앞다리까지 고정해 놓은 저 가죽끈이 아니었다면 금방 벗겨졌을 것이다.

    키슈의 목소리에 옅게 묻은 슬픔을 눈치채고, 몽블랑이 말없이 그녀의 등을 짧게 토닥여 위로했다.

    “…끼잉.”

    브라우니는 테이블 가운데에서 시무룩하게 몸을 늘어뜨렸다. 아무래도 육체적으로 피곤해하는 것 같았다.

    무중력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중력을 느끼게 된 것과 비슷한 감각이려나.

    “자.”

    나는 손을 뻗어 아이 안듯이 녀석을 품에 안았다. 브라우니의 작은 몸뚱이가 축 처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보낸 달걀에서 이런 생물이 태어나다니, 소식은 들었지만 아직도 믿기질 않는구나.”

    아빠가 중얼거린 말에는 별 영양가가 없어 보여서 무시했다.

    “그나저나 태자 전하가, 아니 태자 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크레페 님한테까지 이런 걸 채워놓은 거예요?”

    키슈가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테이블을 내리치자 마나 억제구였던 쇳덩이가 달그락 소리를 냈다.

    아직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듯한 아빠는 키슈의 언행을 말리지도 거들지도 못하고 헛기침했다.

    “아, 아니에요. 그건 플뢰데 후작가에서… 오면서 버리려고 했는데 깜빡 잊었네요.”

    “플뢰데 후작가?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님 말이니?”

    아빠는 내가 잘못 이해한 거겠지, 하고 생각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거기에서 왔거든요.”

    “…….”

    깔끔하게 인정하자 아빠는 물론이고 몽블랑과 키슈, 파타슈까지 멀뚱멀뚱 날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 반응을 보니 역시나 내 소식이 변방까지 퍼지진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아빠를 포함한, 이 자리의 사람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히 풀어놓기로 했다.

    “크흠, 몽블랑 후작님이 누명을 썼다는 얘긴 들었죠?”

    “그래. 네가 이분들의 도주를 돕고 그동안 바니유 공작가에 숨어 있었다는 것까지 들었지.”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데 굳이 한 번 더 정리할 필요성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갈레트 오빠가 절 배신했어요.”

    “…예?”

    파타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황제 폐하를 죽인 건 아펠인 것 같아요.”

    “뭐?”

    아빠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대, 대체 왜…….”

    “자기가 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래요.”

    “…….”

    키슈는 숨도 못 삼키고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몽블랑은 이미 알고 있던 정보이니만큼 새삼 놀라진 않았겠지만, 내 가벼운 말투에 충격 받은 듯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말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제가 그 얘기를 들은 탓에 황궁에선 거의 반감금 상태로 있었어요. 장례 마지막 날에는 바움쿠헨의 플뢰데 후작님께 부탁해서 겨우 빠져나왔고요.”

    “플뢰데 후작에게 부탁을 했단 말입니까?”

    몽블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엄마를 죽이려 한 원수의 집으로 쫄래쫄래 따라갔다니 놀랄 만하긴 했다.

    하지만 내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아펠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건 타국의 귀족뿐이니까요. 더군다나 플뢰데 후작이라면 어떻게든 제게 정보를 얻어내야겠다는 욕심도 있었을 거고.”

    “그럼…….”

    몽블랑이 차마 묻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나는 그가 묻으려는 게 뭔지 눈치채고 먼저 고개를 저었다.

    “아펠의 부모에 대한 얘기를 털어놓진 않았어요. 그 전에 도망쳐 온 길이니까.”

    “도망이요?!”

    “도망?”

    키슈와 아빠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경악했다.

    놀라는 심정이야 이해가 됐지만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모여 앉은 사람들이 거의 번갈아서 몸을 들썩이는 것을 보니 갑자기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고 싶어졌다.

    “위험한 행동이었다는 건 아시겠지요?”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몽블랑이 입을 열었다.

    “몰랐을 리가 없죠.”

    속으로는 한숨이라도 쉬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짐짓 당당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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