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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8)화 (128/181)

128화 

【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

기분 좋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 간헐적인 덜컹임과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 그리고 은근히 풍겨 오는 구린내.

…구린내?

아차 하고 눈을 떴다.

그래, 지금은 나른함이나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챈 플뢰데 후작가에서 사람을 보내왔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몇 시간이나 긴장을 늦추지 않는 건 너무 어렵단 말이지.

보는 눈이 없었음에도 어쩐지 머쓱해진 기분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자 손가락에 엉망으로 뻗친 머리카락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나는 치마를 정리하고 책상다리로 앉아 기지개를 켠 후, 손빗으로 머리를 가다듬고 나서 조심스럽게 마차 문을 열어보았다.

마차는 아직 움직이는 중이었다. 서행하는 마차를 따라 꺄르륵거리며 달려오던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 누구…….”

“쉿!”

내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아이들이 합,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아직 열 살도 안 된 듯한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하나였는데, 옷이 허름한 것을 보니 평민 같았다.

혹시 마부가 듣기라도 할까(카미가 마부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으니 아군이 아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나는 한때 내 발목을 옭아맸던 쇳덩어리를 들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흠, 변방 근처인 것 같기는 한데.

옷에 묻어 있는 지푸라기들을 탁탁 털며 주변을 마저 둘러보았다.

작은 마을 같은 이곳은 여러 번 부수어졌다가 재건된 듯 건물의 형태나 크기가 중구난방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마을을 요새처럼 둘러싼 높은 담벼락이 보였고 봉화를 올리는 감시탑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제일 확실한 건 직접 물어보는 거겠지.

“슈트루델의 북쪽 요새가 이 근처인가요?”

달리 물어볼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날 올려다보았다.

“언니는 누구예요?”

“누나는 누구세요?”

“…….”

병아리 같은 눈빛에 순간 무장해제가 될 뻔했다.

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고 짧게 소개했다.

“슈트루델의 백작님을 뵈러 온 손님이에요.”

가볍게 치맛자락을 들고 아이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아이들이 워낙 귀엽고 순수해 보여서 조금은 귀족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어때, 이 정도면 기품 있어 보였으려나?

하지만 내가 허리를 펴자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들이 저들끼리 뭐라 소곤거렸다.

“누나, 저 사람 귀족이야?”

“저렇게 말랑말랑하게 생긴 귀족은 처음 보는데…….”

“옷도 이상해!”

“가난해서 그런가?”

…실내복 차림으로 나와서 그렇다.

그리고 뭐, 말랑말랑하게 생긴 게 죈가?

“아, 도망친 건가 봐!”

여자아이가 드디어 깨달았다는 듯 손바닥을 탁 쳤다.

나는 ‘도망’이라는 단어에 몸을 움찔했지만, 다행히 그 이후의 대화는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비 아줌마가 그랬어, 가끔 결혼하기 싫어서 가출한 사람이 여길 지나서 바움쿠헨으로 도망간다구.”

말을 들은 남자아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바움쿠헨에서 온 마차였잖아?”

“어라, 그러네?”

여자아이가 덩달아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움쿠헨으로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면 슈트루델로 도망쳐 온 사람이겠지만, 아무래도 어린아이들의 생각은 거기까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대화 속에서 얻은 정보는 있었다. 여기가 바움쿠헨이 아니라 슈트루델이라는 것.

“크흠. 쉬제트 백작님을 뵙고 싶은데요!”

이제 충분히 들었다 싶어 나는 헛기침으로 주의를 모으고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수다를 떨던 꼬마들이 갑자기 입을 쩍 벌리곤 반짝이는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쉬제트 백작님의 손님이라구요?”

“쉬제트 백작님?!”

“에, 예에…….”

아이들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놀란 내가 얼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놀랄 일은 더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안내해 줄게요!”

“저쪽이에요!”

안내를 해주겠다니?

그건 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변방 근처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나는 그래도 몇 시간 정도는 걸을 각오를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짐마차가 왕복할 수 있고 아이들이 어른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안전한 길이라는 건, 내가 변방에 들렀던 오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빨리 와요!”

“빨리요!”

아이들의 재촉에도 나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겨우 이삼십 분 정도 걸었을 뿐인데 눈에 익은 골목이 하나둘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에클레어가 기절했던 골목을 지나, 내가 주민들과 함께 몸을 피했던 피난소를 지나, 아펠과 카눌레가 대련했던 공터를 지나, 크렘이 반지를 빼기로 결심했던 후문이 보이는, 본부의 관문에서 멈췄다.

“저기 지붕 보이죠?”

여자아이가 손가락을 뻗어 건물을 가리켰다. 내 기억을 되새겨도 저건 분명 아빠가 있는 중앙 본부였다.

하지만 오 년 전과 달리 저곳으로 들어가는 경비는 한층 삼엄해진 모양이었다. 마을과 본부의 경계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우리 앞을 막아섰다.

“이 이상은 접근이…….”

“백작님 손님이래요!”

“저희가 모셔왔어요!”

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작은 새처럼 조잘거렸다. 하지만 기사가 말을 멈춘 이유는 그 녀석들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기사는 내 얼굴과 행색을 번갈아 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밀 크레프 님?”

“세상에!”

“진짜 귀족이었나 봐!”

아이들이 다시금 수군거렸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지만 이곳은 쉬제트 가문의 피낭시에 기사단이 책임지고 있는 요새였다. 내가 모른다고 해도 기사들이 내 얼굴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일단은 오 년 전에 방문한 이력도 있고 말이지.

“아빠를 뵙고 싶은데, 들어가도 될까요?”

난 그의 반응에 놀라는 대신 짐짓 무게를 잡고 말했다.

“네, 그야 물론…….”

기사는 아직도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얼떨떨한 듯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의 안내를 받아 관문을 통과하자 뒤에 남은 아이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백작님께 꼭 제 얘기 해주세요! 저는 라일리예요!”

“저는 코우가요!”

내가 뒤를 돌아보자 아이들은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빛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웃는 얼굴로 손을 한 번 흔들어주었다.

나한테도 저런 시절이 있었으려나.

* * *

“백작님께선 아직 주변 순찰을 돌고 계십니다. 접대실로 안내해 드리지요.”

“네에.”

나는 전보다 튼튼해진 구조를 살피느라 조금 건성으로 대답했다. 확실히 오 년 전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요새 본부라기보다는 그냥 작고 튼실하게 지은 저택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면 마을도 제법 평화로운 듯했고, 아이들이 아빠의 이름을 듣고 눈을 반짝인 것도 제 지방 영주를 동경하는 평범한 영지민 같았다.

이 정도면 아예 아빠를 영주로 삼은 영지가 변방에 하나 더 생겼다고 해도…….

“황궁에서 출발하신 겁니까? 카눌레 님은 아직 안 오셨는데 빨리 도착하셨군요.”

“네? 카눌레 오빠요?”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들은 내가 기사의 뒤통수에 대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가 날 돌아보며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했다.

“오늘 카눌레 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잖습니까. 그래서 겸사겸사 오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마차는 어디 갔습니까?”

“네, 네! 맞아요. 오빠랑 아빠를 빨리 보고 싶어서 일찍 출발했어요. 마차는 바로 돌려보냈고요.”

다급히 둘러대자 그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하곤 다시 앞을 보았다.

아무래도 변방이라 상대적으로 소식이 늦게 전해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뢰드그뢰드와 함께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을 보면.

“오 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죠?”

그는 내가 어색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그렇게 짐작한 듯 말을 이었다.

“백작님 덕에 개척지가 많이 넓어졌습니다. 다듬어진 구역을 벗어나면 아직 몬스터가 많지만, 바움쿠헨과 이어지는 길도 어느 정도 닦였고요. 아마 주둔군도 곧 분산될 것 같더군요.”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그의 목소리나 발걸음에는 들뜬 기색이 묻어 있었다. 쉬제트 백작령에 남아 있던 기사들이 아빠를 영웅처럼 얘기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게다가 플뢰데 후작가에서 들었던 말과 방금 겪은 일까지 떠올려 보면…….

- 쉬제트 백작가의 이름이 근방에서 얼마나 유명한지 아십니까?

- 백작님께 플뢰데 후작가의 카미가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세요.

- 백작님께 꼭 제 얘기 해주세요!

…역시 아빠는 이곳의 아이돌 같은 존재인 건가.

싱거운 생각이 스쳤지만 넘어가고, 나는 그의 말 중에 유독 내 신경을 잡아끈 대목을 콕 집어 물었다.

“주둔군이 분산된다고요? 아빠가 다시 쉬제트 백작령으로 돌아오신다는 건가요?”

“그냥 그런 말이 있다는 거지 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 물론 공적이 있으니 추가로 작위나 영지를 하사받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고요. 하지만…….”

그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고 근심스러운 낯빛을 보였다.

“아, 다 왔군요.”

내가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그가 발을 멈췄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그가 문을 열어주었기에 나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곤 문을 통과했다.

기사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올려 예를 표한 후 근무지로 돌아갔다.

오 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변방의 분위기가 아직 어색했다.

틀린 그림 찾기라도 하듯 주변을 둘러보며 의자에 앉은 나는 버리는 것을 잊고 가져온 쇳덩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추가로 작위나 영지까지 하사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던가?

혹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말이 오갈 정도라는 것만으로도 아빠의 평판이 얼마나 좋은지 충분히 알 만했다.

물론 내가 몽블랑 편에 서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빠는 작위 추가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워지겠지만.

순간 안 좋은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인 그때, 희소식을 전하다 말고 어두워졌던 기사의 표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설마.”

나는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접대실을 뛰쳐나가 아빠의 집무실로 향했다.

다행히 집무실의 위치는 오 년 전 그대로였고 날 막을 사람도 없었다.

나는 곧바로 집무실의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옷을 갈아입던 중인 듯 웃통을 벗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흰색 머리카락과 창백해 보이기까지 하는 피부, 그리고 얄상스러운 근육과 어울리지 않는, 등에 난 커다란 흉터.

분명 내가 아는 몽블랑 후작이었다.

아차.

“실례했…….”

당황한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몽블랑이 다가와 문을 닫았다.

“쉿. 저는 여기 없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놀란 나머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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