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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7)화 (127/181)
  • 127화 

    나는 쉬제트 백작가에 머무는 피낭시에 기사단 사람들에게서도 아빠의 명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전쟁 없는 시대의 영웅이니, 드래곤의 숙적이니, 검술의 초인이니 하는 온갖 신화적 호칭들 말이다.

    하지만 나열해 보면 알 수 있듯 그 명성은 모두 변방의 몬스터와 싸우며 얻은 것들이었다.

    만일 아빠가 백작령으로 돌아와 영주 업무에 골몰하게 된다면 그간 쌓아온 공적들은 변방의 다른 귀족들에게 분산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자 중 하나는 뢰드그뢰드가 되겠지.

    “…아버님께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으셨다는 말입니까?”

    린처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참지 못하고 조소했다.

    “예상은 하고 계셨나 보군요.”

    “…….”

    에두른 표현을 곧장 이해한 것을 보면, 그도 제 아비의 심성이나 소문을 통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던 것 같았다.

    내 말이 정곡을 찌른 듯 린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가 쥐고 있던 책장이 구겨진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린처 님께 책임을 돌리려는 건 아니에요. 말씀드렸듯이 자식이 부모를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몸을 숙이고 린처의 손을 세게 잡아 위로했다. 그의 손은 식은땀으로 조금 축축해져 있었다.

    “제가 레이디만큼 현명했다면 아버님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린처가 눈을 내리깔고 쓴웃음을 지었다. 언뜻 질문 같은 말이었지만 질문은 아니었다.

    자조의 뜻이 담긴 그의 표정을 보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겠죠.”

    “하하.”

    린처가 소리 내어 웃고는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레이디만큼은 못 할 겁니다. 오늘 아침 식사 때 아버님의 표정이 몇 번이나 구겨졌는지 떠올려 보면……. 후후, 아버님의 그런 표정을 그렇게 자주 본 건 처음이었다니까요.”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뢰드그뢰드의 포커페이스를 흔든 게 고의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곧 린처는 얼굴의 웃음기를 거두고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덮었다. 그리고 결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제게 바라는 게 있으십니까?”

    “…….”

    나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앙다물었다.

    린처의 말은 꼭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뢰드그뢰드의 아들이니 제법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입을 다문 이유는, 그 태도가 감격스럽다기보다는 가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어버이날에 부모님 일을 도와드리겠다고 고사리 같은 손을 꼼지락거리는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풋.”

    내가 끝내 참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자 린처가 당황한 듯 고쳐 말했다.

    “물론 제가 모든 것을 해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레이디의 안위만큼은 보장하겠습니다. 더불어 레이디께서 이 저택에 계시는 동안 최대한의 자유를 약속하지요.”

    최대한의 자유고 뭐고 내가 애초부터 내 목숨만 지킬 생각이었다면 아펠의 곁을 벗어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마땅히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린처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 금방 내 눈치를 보며 말을 흐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 정도뿐이라…….”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그의 손 사이에 낀 내 손을 꺼내고 생긋 웃었다. 혹여나 빈말로 들릴까 봐 어깨도 토닥여 주었다.

    그의 자신감 없는 성격이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 때문이기도 했고, 동시에 내 가족이 그리워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매사 자신감 없던 나를 다독여주었던 게 그들이었으니까.

    ‘칭찬이 늦었구나. 혼자 마법을 공부하다니 대단해. 앞으로도 기대하마.’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지면 그다음은 내가 책임질게. 우리 딸, 엄마 믿지?’

    나는 크레페의, 아니 나의 부모가 해주었던 말들을 되새기던 끝에 갈레트를 떠올렸다.

    ‘미안, 크레페. 난 누가 황제가 되느냐, 그런 거엔 별 관심이 없어.’

    그 순간 나는 현실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레이디?”

    “아.”

    뒤늦게 린처의 부름을 깨닫고 탄성을 내뱉었다. 나는 아직도 불안해하는 듯한 그를 보다가 희미하게 미소 짓곤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됐으니까 나중에 제가 도망갔다고 원망만 하지 말아주세요.”

    “도망이라니…….”

    “실례하겠습니다.”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서재의 문이 열렸다. 검회색 하녀복을 입고, 새까만 머리칼을 지닌 카미였다.

    “무슨 일이지?”

    린처가 자세를 가다듬고 물었다. 카미가 허리를 숙여 정식으로 예를 표한 후 입을 열었다.

    “저택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린처는 손님의 정체를 모르는 듯 반문했지만 카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무슨 질문이고 할 여유가 없었다.

    설마 갈레트 오빠가 벌써 온 건가?

    “아버님께서 안 계시니 제가 내려가 봐야겠군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결국 린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린처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의 발소리가 사라지자마자 서재를 나가 내 방으로 돌아갔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단순한 기분 탓이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창문을 내다본 나는 그 안 좋은 예감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정문에 서 있는 마차에 쉬제트 가문의 인장이 붙어 있던 것이다.

    뢰드그뢰드와 길이 엇갈린 건가?

    아니면, 갈레트가 서신을 보낸 것과 거의 동시에 출발했을 수도 있지.

    내게 도망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랬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잖아도 갈레트는 원작의 작가가, 아니 신이 공인한 천재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어디로든 도망치려는 생각으로 급히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문 앞을 가로막고 서 있던 카미와 딱 맞닥뜨렸다.

    “아, 아니, 이건…….”

    카미와의 첫 만남도 이랬다. 아마 지금은 그때보다 몇 배는 더 수상해 보일 테지만 말이다.

    “도망치시려는 겁니까?”

    “…….”

    후작이 출타 중이라 당장 알려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나는 어떻게 둘러대야 그나마 덜 수상할까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카미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따라오세요.”

    “뭐? 잠깐만, 설마 가둬두려는…….”

    “쉿.”

    카미가 일언반구 없이 내 반항을 종식시켰다.

    린처를 불러야 하나? 그랬다가 갈레트가 올라오면 어쩌지?

    아무리 생각해도 소란을 피우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았다. 나는 여차하면 마법을 쓸 각오를 하고 카미에게 순순히 끌려갔다.

    그러나 카미가 향한 곳은 내 예상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앞장서서 망까지 봐 가며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계단을 내려갔고, 고용인들이나 쓸 법한 쪽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다음 한쪽 길목에 세워진 허름한 짐마차의 문을 열고 날 밀어 넣었다.

    지푸라기로 가득 찬 화물 마차였는데, 아무래도 말에게 줄 건초를 실은 것 같았다.

    “윽.”

    나는 건초 더미에 파묻혀 반사적인 신음성을 내뱉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반발하기 전에 카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숨어 계세요. 이 마차는 슈트루델 변방에 있는 요새로 갈 겁니다.”

    의외의 말을 들은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금붕어처럼 입술을 뻐끔거렸다. 카미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곧바로 등을 돌렸다.

    “서, 설명 좀 해줘!”

    그녀를 그렇게 보낼 순 없었다. 나는 뒤돌아선 카미의 치맛자락을 후다닥 붙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했다.

    “…크레페 님의 방을 청소하다가 이걸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도망치시려는 거구나, 하고 알았고요.”

    카미가 하녀복의 두툼한 치맛자락 사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녀가 짧은 설명과 함께 꺼낸 것은 내가 마법으로 썩둑 잘라버린 마나 억제용 구속구였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마차가 출발한 후에 적당히 시기를 보아 버리는 게 좋겠군요.”

    잊고 있었다는 듯 말하며 카미는 망가진 구속구와 자물쇠를 지푸라기 사이에 숨겼다.

    “이… 무… 어…….”

    이게 대체 무슨, 어째서?

    수많은 질문으로 머리가 복잡해져 단어도 아닌 말이 튀어나왔다.

    그럴 만도 했다. 애초부터 나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데에 누구의 도움도 구할 생각이 없었다. 뭔가 도울 것이 없냐는 린처의 말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전적으로 타인의 협력에 기댔다가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심지어 안면이 있기는커녕 이름도 몰랐던 사람인데.

    물론 아군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도 몇 가지 정보나 얻기 위한 것이었을 뿐, 고용인에게 이렇게까지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

    “아, 린처 님이 부탁하신 거야?”

    떠오르는 대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미가 날 도와줄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린처가 따로 부탁했다면 납득이라도 가지.

    하지만 내 질문을 들은 카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혼란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게 웃겨 보인 모양이었다.

    “…아닌가 보구나.”

    “아니에요.”

    웃음기를 억누른 카미가 짧게 답했다. 무뚝뚝하고 어둡게만 보이던 그녀의 첫인상을 재고해야 할 지경이었다.

    “저는 변방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은 고아입니다. 린처 토르테 도련님 덕분에 거두어졌지요.”

    “그럼 린처 님이 날 돕겠다고 해서?”

    놀랍긴 했지만 아주 의외라고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카미는, 내가 뢰드그뢰드의 집무실 근처에서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날 재촉하지도 않고 기다려주었다.

    심지어 문틈으로 그들의 다툼 소리가 새어 나왔는데도 말이다.

    만일 그때 카미가 나를 타박하거나 발걸음을 재촉했더라면, 나는 끝까지 내 마음을 괴롭히는 묘한 불쾌감의 원인을 찾지 못한 채 린처를 피해 다니기만 했겠지.

    “도련님은 마음이 약하고 상냥하신 분이지요. 아마 저택에서 도련님을 싫어하는 고용인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카미가 에둘러 말했다. 나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애써 납득해 보았다.

    하지만 카미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변방 근처에 사는 사람 중에 슈트루델의 쉬제트 백작님을 싫어하는 사람도 없겠죠.”

    “…응?”

    대답을 들은 내가 더 묻지도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카미는 힘이 풀린 내 손을 떼어내고 자신의 목 밑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정례했다.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크레페 님. 백작님께 플뢰데 후작가의 카미가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세요.”

    “…….”

    “그럼, 다시 연이 닿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카미가 마차의 문을 닫았다.

    이후로도 잠시 동안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던 나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빼고 드러누웠다.

    폭신한 지푸라기가 휘날리며 마른풀 냄새가 퍼졌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아빠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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