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26)화 (126/181)
  • 126화 

    물론 린처가 걱정된다고 탈출을 포기한다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정보 역시 분명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뢰드그뢰드의 동기를 알고, 다음 작전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식사 내내 시선을 피했던 린처가 갑작스레 날 먼저 찾아왔을 정도니, 어쩌면 내게 용건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나는 나름 비장하기까지 한 각오로 마음을 가다듬고 방을 나왔다. 그러나 린처는 싱긋 웃고는 태연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는 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책을 뽑아 들었다.

    “그럼 저는 또 책을 읽고 있겠습니다. 아무쪼록 편히 계시길.”

    그러면서 린처가 책상 앞에 앉았다. 아침 식사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태도였다. 마치 그 잠깐 사이 새벽에 있던 일을 전부 잊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럴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나는 그의 태도를 보고 그가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깨달았다.

    “모르는 척해 달라는 건가요?”

    “…….”

    직설적으로 묻자 린처가 입을 다물었다. 기분 탓인지 ‘알면서 왜 그러느냐’는 원망 섞인 눈빛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린처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나는 그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청개구리라서도, 린처가 싫어서도 아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는 책도 들지 않은 빈손으로 그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책장을 채 펼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괜찮으세요?”

    다시금 질문하자 린처는 체념한 듯 눈썹을 찡그리고 웃었다. 내가 어젯밤의 일을 모르는 척해 주지 않을 것임을 그제야 확신한 것 같았다.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저야말로 어제 실례를 끼쳐드린 것 같아 면목이 없네요.”

    린처는 대답 없이 애꿎은 책 표지를 손으로 쓸었다. 아무래도 어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캐물어 봤자 그의 반감만 살 것 같았다.

    나는 조금 방향을 바꾸어 질문했다.

    “뢰드그뢰드… 아니, 플뢰데 후작님께서 어떤 분인지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아버님 말입니까?”

    분명 들었을 텐데도, 린처는 의외의 질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굳이 한 번 더 확인하려 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그가 눈을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경쟁심이 강한 분이죠. 능력도, 야심도 있으시고요. 그만큼 혈육인 제게도 엄하시긴 하지만, 제가 그분의 기대에 따라가지 못해 생긴 일에 아버님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대답을 하는 중에 린처는 한 번도 내 눈을 마주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진심이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어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 입학을 희망하셨다고 했죠?”

    “…그랬지요.”

    린처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어쩌면 커스터드 입학에 실패한 스스로를 질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냥 ‘입학에 실패하고’라고만 했던가?

    뭔가 놓친 게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적절한 말로 그를 위로해 주는 대신 가만히 린처의 표정을 살폈다. 작은 단서 하나라도 더 잡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린처는 자신의 태도 때문에 내가 불편해한다고 생각한 듯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버님만 막지 않으셨다면 레이디와 동기가 되었을 수도 있겠네요.”

    “막았다고요?”

    나는 찰나 스쳐 지나간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물었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린처가 실언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런 타이밍에 나온 말이 정말 아무것도 아닐 리는 없었다.

    나는 그간 수련해 온 눈치를 동원해 그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 순간 어제 들었던 뢰드그뢰드의 목소리가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선생을 수없이 붙여줬는데도 커스터드 수석 입학은 실패하고, 피가 무섭다며 일찌감치 검의 길도 포기했지.’

    ‘수석’ 입학에 실패했다?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머릿속에 어떤 가능성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아무튼 커스터드 귀족 학교의 명성이 그만큼 대단하니…….”

    이어지는 린처의 말에 아랑곳 않고, 내가 그와 눈을 맞췄다.

    “커스터드 입학시험에 합격하셨던 거군요.”

    린처가 부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반응을 보고 내 예상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역시, 그는 커스터드에 합격해 놓고 입학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설마 수석 입학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숨길 수가 없겠네요.”

    린처가 허탈한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사실 레이디께서 커스터드에 입학시험을 치르러 간 날에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입학 통지서도 받았고요.”

    말뿐이 아니라 진짜 나랑 같은 해에 입학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내가 여덟 살에 합격했으니 린처의 당시 나이는 열 살.

    갈레트가 입학했을 때와 같은 나이였다.

    “그럼 대체 왜…….”

    눈치껏 정답을 맞힌 것까지는 좋았지만 나는 아직 그가 입학하지 않은 진짜 이유를 깨닫지는 못한 상태였다.

    심지어 뢰드그뢰드는 내게 ‘아들도 입학시킬 걸 그랬다’는 말을 한 적도 있지 않은가.

    뭔가 숨겨진 뒷이야기라도 있었던 걸까,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레이디께선…….”

    린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처럼 잠시 시선을 피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다시금 확인한 후,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다음 말을 이었다.

    “쉬제트 백작가의 이름이 근방에서 얼마나 유명한지 아십니까?”

    지도에서 확인했듯 거리가 멀지 않으니 쉬제트라는 가문명도 이곳에 알려져 있을 법했다.

    그러나 ‘얼마나’ 유명한지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커스터드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집안 얘기인가 싶기도 했고.

    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 본 일이 없어 잘 모릅니다만…….”

    “그러시군요.”

    린처가 예상했다는 듯 짧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저희 플뢰데 후작령은 봉토가 넓은 편입니다만, 사실 미개척지가 대부분입니다. 특히 이 부근은 몬스터가 득세하는 곳으로도 유명했죠.”

    린처가 눈을 내리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제스처를 보고 나는 그가 말하는 ‘이 부근’에 저택이 포함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가용할 수 있는 영토가 꽤나 넓어진 상태입니다. 슈트루델의 쉬제트 백작님 덕분에요.”

    “아빠 덕분에요?”

    “예, 쉬제트 백작께서 머무르는 요새가 이 근방이거든요.”

    갑자기 아빠의 이름이 나온 것에 놀란 내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린처가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슈트루델의 백작이 없었다면 플뢰데 후작은 남작보다도 좁은 영지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다들 그렇게 말하죠. 심지어 평민들까지 말입니다.”

    “…….”

    내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잃은 듯한 나를 보며 린처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왜 쉬제트 백작가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는지 아시겠죠?”

    그 말대로,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타인과의 비교나 깎아내리기를 수도 없이 당해온 나였으니까.

    저번 생에서는 물론이고, 그리 대단치 못한 배경에도 유력한 황태자비 후보가 된 이번 생에서까지 말이다.

    - 제 아들이 원체 둔해 그런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 이쯤 되니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궁금해질 지경이구나.

    - 미련한 놈!

    린처를 보며 불편했던 것도 뢰드그뢰드의 태도가 안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경쟁심이 강하고, 능력도 야심도 대단한 사람.

    나는 린처가 제 아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되새겼다. 분명 원작 『하루만 못생기고 싶다』에서 드러난 면모도 실제의 그와 다르지 않았다.

    뢰드그뢰드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고, 자신의 정치권력을 위해서라면 거짓 정보를 흘리거나 이웃 나라의 예비 태자비를 인질로 잡기까지 했다.

    그런 사람에게 아빠가 얼마나 눈엣가시였겠는가.

    그 와중에 커스터드 귀족 학교에 최연소 입학 한 갈레트의 평판이 치솟았으니 린처에게 얼마나 닦달을 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리고…….

    “린처 님께서 커스터드에 입학하지 못한 게 저 때문이었군요.”

    “레이디가 타고나신 능력을 문젯거리 취급할 수는 없지요.”

    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린처가 태연히 맞받아쳤다.

    역시 그랬구나.

    나는 한층 복잡해진 심경으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린처가 열 살에 입학했다고 해도 그보다 어린 나이에 합격한 내 그림자에 가려졌을 게 뻔했다. 아무래도 뢰드그뢰드는 그 모습을 보기 싫어 아들의 입학을 불허한 모양이었다.

    린처가 감당해야 했던 압박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알기엔 충분했다고 해야 할까.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군요. 부디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저와 아버님 사이의 문제니까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린처는 선을 긋는 듯한 미소를 지은 후 곧바로 책을 펼쳤다.

    내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술을 뗐다.

    “부모가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자식을 압박하는 건 흔한 일이죠.”

    담담하게 말하자 린처가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날 쳐다보았다.

    “평생 억눌려 산 자식이 부모를 거스르지 못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고요.”

    내 말을 듣던 린처의 눈썹이 움찔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아무래도 내 냉소적인 태도가 시비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시비?

    나는 스스로 한 생각을 되짚고 내심 실소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였다. 당연히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순간이 있었고, 나는 그것이 지금임을 알았다.

    그래, 솔직해지자. 시비 걸고 싶은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우습군요. 두 분 사이의 문제라니.”

    말끝에 옅은 떨림이 묻어 나왔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우습다고요?”

    “제가 그런 사적인 일로 엄마를 잃었다는데, 어떻게 웃음을 참을 수 있겠어요?”

    “…예?”

    당황한 듯 린처의 눈빛이 흔들렸다.

    뢰드그뢰드는 린처가 못 미더워 모든 업무를 혼자 처리한다고 했다. 그러니 뢰드그뢰드의 행적에 대해서, 린처는 나보다도 아는 게 없을 것이다.

    나는 깊게 설명하는 대신 곧은 눈빛으로 린처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몽블랑에게서 들은 것과 내가 원작을 통해 알고 있던 정보를 합하면 답은 명확했다.

    뢰드그뢰드는 아빠가 최전방에서 물러나 영지로 돌아가길 바라고 모든 일을 저지른 것이다.

    저택에 암살자를 보내 갈레트를 죽이려고 한 것도, 몬스터의 습격을 유도해 엄마를 죽게 한 것도 모두.

    영주 업무를 맡고 있는 엄마와 차기 영주로 주목받는 갈레트가 없어지면 아빠도 별수 없이 요새를 떠나 백작령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0